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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신라 제일의 사찰이었던 [[황룡사]]의 조영 광경을 그린 작품이다. 현재까지의 발굴에 따르면 이 절의 전역은 약 2만5000여 평에 달하였으며 절의 중앙에는 9층 목탑이 존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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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신라 제일의 사찰이었던 [[경주 황룡사|황룡사]]의 조영 광경을 그린 작품이다. 현재까지의 발굴에 따르면 이 절의 전역은 약 2만5000여 평에 달하였으며 절의 중앙에는 9층 목탑이 존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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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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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건축은 553년부터 569년까지 총 17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본래는 [[진흥왕]] 때에 본궁 남쪽에 짓던 새 궁궐이었으나, 궁을 짓는 도중에 황룡이 출현하자 이를 기려 불사(佛寺)로 고쳤고 [[황룡사]]라 명명하였다. 절의 구조는 전형적인 삼국시대 가람 건축 구조를 따르고 있으며 남쪽에서부터 중문·탑·금당·강당의 순으로 당우를 배치하고 그 주위에 회랑을 돌림으로써 명실공히 국찰(國刹)의 면모를 갖추었다. 중앙에 위치한 구층 목탑에는 한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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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황룡사|황룡사]] 건축은 553년부터 569년까지 총 17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본래는 [[진흥왕]] 때에 본궁 남쪽에 짓던 새 궁궐이었으나, 궁을 짓는 도중에 황룡이 출현하자 이를 기려 불사(佛寺)로 고쳤고 [[경주 황룡사|황룡사]]라 명명하였다. 절의 구조는 전형적인 삼국시대 가람 건축 구조를 따르고 있으며 남쪽에서부터 중문·탑·금당·강당의 순으로 당우를 배치하고 그 주위에 회랑을 돌림으로써 명실공히 국찰(國刹)의 면모를 갖추었다. 중앙에 위치한 구층 목탑에는 한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Blockquote|당나라로 유학갔던 자장이 태화지(太和池) 옆을 지날 때 신인(神人)이 나와서, “황룡사 호국룡은 나의 장자로 범왕(梵王)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서 그 절에 9층탑을 이룩하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며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요, 탑을 세운 뒤에 팔관회(八關會)를 베풀고 죄인을 구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출처="[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5126 황룡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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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당시에는 월성(月城)의 동쪽 용궁의 남쪽에 있었던 [[황룡사]]는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에 사적 제 6호로 지정된 [[황룡사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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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당시에는 월성(月城)의 동쪽 용궁의 남쪽에 있었던 [[경주 황룡사|황룡사]]는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에 사적 제 6호로 지정된 [[경주 황룡사지|황룡사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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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0일 (목) 21:32 판


황룡사의 조영
김태-황룡사건축-1977s.jpg
작가 김태
제작연도 1977년
규격 300호(197x290.9cm)
유형 종교/건축
분류 유화
소장처 미상


정의

과거 신라 제일의 사찰이었던 황룡사의 조영 광경을 그린 작품이다. 현재까지의 발굴에 따르면 이 절의 전역은 약 2만5000여 평에 달하였으며 절의 중앙에는 9층 목탑이 존재하였다.

설명

작품 소재

황룡사 건축은 553년부터 569년까지 총 17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본래는 진흥왕 때에 본궁 남쪽에 짓던 새 궁궐이었으나, 궁을 짓는 도중에 황룡이 출현하자 이를 기려 불사(佛寺)로 고쳤고 황룡사라 명명하였다. 절의 구조는 전형적인 삼국시대 가람 건축 구조를 따르고 있으며 남쪽에서부터 중문·탑·금당·강당의 순으로 당우를 배치하고 그 주위에 회랑을 돌림으로써 명실공히 국찰(國刹)의 면모를 갖추었다. 중앙에 위치한 구층 목탑에는 한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Quote-left.png 당나라로 유학갔던 자장이 태화지(太和池) 옆을 지날 때 신인(神人)이 나와서, “황룡사 호국룡은 나의 장자로 범왕(梵王)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서 그 절에 9층탑을 이룩하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며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요, 탑을 세운 뒤에 팔관회(八關會)를 베풀고 죄인을 구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황룡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품 배경

건축 당시에는 월성(月城)의 동쪽 용궁의 남쪽에 있었던 황룡사는 현재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에 사적 제 6호로 지정된 황룡사지로 남아 있다.

그림 읽기

김태-황룡사건축-1977s.jpg
이 그림에 대한 정보

지식 관계망

추후 제작 및 삽입 예정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김태 김태-황룡사의 조영 A는 B를 그렸다 1977년
김태-황룡사의 조영 황룡사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김태-황룡사의 조영 황룡사 구층목탑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진흥왕 황룡사 A는 B를 건설하였다 569년
황룡사 황룡사지 A는 B와 관련이 있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977년 김태가 김태-황룡사의 조영을 제작하였다.
569년 진흥왕황룡사를 건설하였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관련 민족기록화

시각자료

가상현실

추후 제작 및 삽입 예정

갤러리

영상

주석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자원
    • "황룡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