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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학(道學)·문장(文章)·덕행(德行)·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영남 유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묘지는 안동시 풍산읍 수리 뒷산에 있다. 안동의 병산서원(屛山書院)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도학(道學)·문장(文章)·덕행(德行)·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영남 유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묘지는 안동시 풍산읍 수리 뒷산에 있다. 안동의 병산서원(屛山書院)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는 『서애집(西厓集)』·『징비록(懲毖錄)』·『신종록(愼終錄)』·『영모록(永慕錄)』·『관화록(觀化錄)』·『운암잡기(雲巖雜記)』·『난후잡록(亂後雜錄)』·『상례고증(喪禮考證)』·『무오당보(戊午黨譜)』·『침경요의(鍼經要義)』 등이 있다.
 
저서로는 『서애집(西厓集)』·『징비록(懲毖錄)』·『신종록(愼終錄)』·『영모록(永慕錄)』·『관화록(觀化錄)』·『운암잡기(雲巖雜記)』·『난후잡록(亂後雜錄)』·『상례고증(喪禮考證)』·『무오당보(戊午黨譜)』·『침경요의(鍼經要義)』 등이 있다.
편서로는 『대학연의초(大學衍義抄)』·『황화집(皇華集)』·『구경연의(九經衍義)』·『문산집(文山集)』·『정충록』·『포은집』·『퇴계집』·『효경대의(孝經大義)』·『퇴계선생연보』 등이 있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1546 유성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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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서로는 『대학연의초(大學衍義抄)』·『황화집(皇華集)』·『구경연의(九經衍義)』·『문산집(文山集)』·『정충록』·『포은집』·『퇴계집』·『효경대의(孝經大義)』·『퇴계선생연보』 등이 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1546 유성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주석==
 
==주석==

2017년 8월 9일 (수) 03:21 판

정의

내용

생애

서애 류셩룡(西厓 柳成龍, 1542~1607)은 황해도 관찰사인 유중영(柳仲郢)과 진사 김광수(金光粹)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둘쨰아들로 중종 37년 외가인 경상도 의성현의 소리촌에서 채어났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이다. 10대에는 주로 서울에서 지냈으며 이 때 이순신과 교분을 맺었다. 21세에는 예안의 도산서당으로 이황을 찾아뵙고 근사록을 수강하여 사제관계를 맺었으며 조목, 김성일 등과도 교유함으로서 후일 퇴계를 종주로 하는 영남학파의 정통에 서게 되었다.[1]

정치활동

1566년(명종 21), 25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에서부터 시작해 1589년(선조 22) 48세 이전까지는 대체로 언관직이나 승지직에 머물러, 국정을 담당하기보다는 이를 감독하고 비판하는 자리에 있었다. 부친상과 신면 정세의 불안 등으로 자주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에 머물거나 지방 관직을 지낸 기간이 많았다. 이에 비해 48세인 1589년(선조 22)이후는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오르고 뒤이어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계속 국사를 담당하였다.[2]

  • 1589년 이전 정치활동

류성룡은 청요직인 승문원 부정자, 예문관 대교, 성균관 전적, 홍문관 수찬, 사간원 정언, 이조와 병조의 좌랑을 역임하였다. 이 중에서 수찬은 경연에 참여하여 경서의 뜻을 풀어 군덕의 성취를 돕고 이끄는 자리이니만큼 중시되었던 자리였고 임금의 측근세력이 되어 정치적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유성룡은 경연관의 자리를 10년이나 역임하면서 선조의 군덕 성취에 진력하하여 많은 영향을 주었다. 또한 삼사언관에 대한 통청권(通淸權)을 지녀 막강한 정치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조전랑의 벼슬도 두 번이나 역임했다. [3]

  • 사론(士論)의 원만한 수습

이 시기 류성룡의 정치활동 중 두드러진 역할은 당시 대신들의 대립을 완화하는 것이었다. 특히 선조 초 구신(舊臣)과 사림 세력이 을사사화의 후처리 문제를 두고 대립하여 혼란한 시기였다. 이 때 구신세력의 대두였던 이준경이 죽을 때 올린 '붕당의 조짐이 있다'는 상소는 당시 을사사화의 주된 원인을 제공한 사람 중 하나인 윤임의 처분을 두고 대립한 기대승, 심의경, 이이, 정철 등의 사류를 붕당으로 몰아간다는 혐의를 받기에 충분했다. 당시 붕당은 신하들 사이의 사사로운 결당으로 군주권의 행사를 막고 조정을 어지러히는 죄목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이 등의 사류는 이준경이 그들을 붕당으로 지목해 죄망에 몰아넣을 사화를 획책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이에 류성룡은 말이 만지 않으면 변론하는 정도로 그치지 죽은 대신의 관직을 추탈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견해를 펼쳤고 조정의 일반여론이 동조하여 사건이 수습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류성룡의 식견이 크게 드러나 결국 선조 이후 정계로 나온 신진사류의 대표적 존재로 부상하게 되었다. [4]

  • 정치관의 형성

이후 조정에서 물러나 노모 봉양을 이유로 지방관을 전전하며 은거하였다. 이 시기에 옥연정사와 남계서당을 건립하여 후학 양성에 힘을 썼으며 율곡 경장론의 허첨을 주시하면서 이황을 통해 전수받은 성리학적 학문기간을 현실에 적용하면서 정치적 식견을 닦았다. 뿐만 아니라 군사관계와 국가재정, 민생의 생계대책과 같은 경제문제에까지 관심을 갖고 그 대안과 방법을 강구하였다. [5]

임진왜란과 국란극복활동

  • 기축옥사 후의 상황

정여림 모반사건기축옥사로 인해 서인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자 선조는 이를 저지하고 왕권을 보장하기 위해 이산해(북인), 정철(서인), 류성룡(남인)을 각각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으로 삼는 三相체제를 전개한다. 그러나 정여림 옥사의 불공정한 처리 문제로 정철이 쫓겨나 서인 세력이 크게 축출되고 북인은 역모로 인해 기세가 크게 꺾인 상황에서 남인을 중심으로 정국이 개편된다. 류성룡은 남인의 중심에 서있었다. [6]

  • 임란의 대비

정국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류성룡이 당면하였던 가장 큰 문제는 일본의 위협에 대처하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일본에서 요구하는 통신사의 파견과 같은 외교 정책과 혹시 있을지도 모를 일본의 침입에 대비한 방어시설과 군대훈련과 같은 군사적 측면이었다. 류성룡은 통신사의 파겨을 적극 잔동했다. 그리고 군비의 정비를 주장한 김성일과 더불어 산성의 축조와 함께 진관체제의 복구를 주장했으며 이순신, 권율 등 장재의 발탁을 통해 요해처의 군사력을 강화하고 군비 태세의 점검을 위해 신립, 이익 등 이름난 장수들이 지방을 순시하도록 추진하였다. [7]

  • 임진왜란 초기

임란이 발생했을 때 좌의정이었던 류성룡은 도체찰사를 겸하여 대응 마련에 부심하였다. 그러나 상주, 충주 등의 패보가 잇따르자 북행하는 선조를 수행하였고 중국으로 망명하려는 선조를 설득하여 조선에 남게 했다. 개성에 이르러서 이산해와 같이 탄핵되었다가 다시 다시 풍원부원군으로 복직되었고 이후에는 평안도 도체찰사로 삼아 군량미의 확보나 조선군의 정비에 히쓰고 하고 뒤이어 올 명나라 군대의 지원을 준비하는 한편 명나라로 망명하려는 선조의 의지를 돌리고 명의 군대와 양동작전을 주장하였다. [8]

  • 한양수복과 강화론의 대두

명나라 군대가 진입하여 평양이 수복된 후로는 충청, 전차, 경상 삼도 도체찰사로 임명되어 명나라 군대를 따라 서울을 진공하였다. 이 떄 사실상 전국의 전선지휘권을 사실상 류성룡이 장악하였다. 명나라 군대와 함께 전투를 지휘하면서 동시에 호남의 곡식으로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하고 강화도에 목장을 개설하여 소금을 굽게 하는 등 민생대첵을 건의하였다. 또한 이시발과 더불어 기교신서를 연구하여 훈련도감을 창설, 전투력의 강화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명과 일본간의 강화론이 제기되자 이를 반대하여 선조로부터 신임을 잃기도 하였다. [9]

  • 정국 수습에 대한 노력

선조 26년 10월부터 30년 4월까지는 명과 일본간의 강화 문제와 이로 인한 선조의 사퇴 요구, 정여림 옥사의 잘못된 처리를 들어 복권을 꾀하는 북인 세력 등으로 인해 조정이 혼란에 빠졌다. 류성룡은 이를 수습하여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일본군과의 전투나 민생문제의 해결책도 안정된 정권 위에서 추진되었으나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게다가 선조 29년 강화교섭의 지지부진함에 따라 일본의 재침이 가시화되면서 그에 대한 대비책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순신 체포문제 등이 발생하여 대비책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0]

  • 정유재란 발발

정유년에 전쟁이 재발하여 한산도에서 조선군이 패한 이후 류성룡은 대비를 잘못 했다고 하여 선조로부터 질책을 받았다. 게다가 도산성 전투가 실패로 끝나고 이산해를 필두로 한 북인 세력으로부터 류성룡을 목표로 한 남인에 대한 공격이 일어나는 등 정치정세마저 불리해지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응태 사건이 발생하였고 오랜 전란참여로 심신이 함께 약화된 류성룡은 결국 정응태 사건 변무를 위한 사신파견을 지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으며 조정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11]

저술활동

도학(道學)·문장(文章)·덕행(德行)·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영남 유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묘지는 안동시 풍산읍 수리 뒷산에 있다. 안동의 병산서원(屛山書院)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는 『서애집(西厓集)』·『징비록(懲毖錄)』·『신종록(愼終錄)』·『영모록(永慕錄)』·『관화록(觀化錄)』·『운암잡기(雲巖雜記)』·『난후잡록(亂後雜錄)』·『상례고증(喪禮考證)』·『무오당보(戊午黨譜)』·『침경요의(鍼經要義)』 등이 있다. 편서로는 『대학연의초(大學衍義抄)』·『황화집(皇華集)』·『구경연의(九經衍義)』·『문산집(文山集)』·『정충록』·『포은집』·『퇴계집』·『효경대의(孝經大義)』·『퇴계선생연보』 등이 있다.[12]

주석

  1. 정고조, 「서애 유성룡의 정치활동과 임란 극복」, 『한국학논총』 vol.30,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8.563쪽.
  2. 정고조, 「서애 유성룡의 정치활동과 임란 극복」, 『한국학논총』 vol.30,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8.565-6쪽.
  3. 정고조, 「서애 유성룡의 정치활동과 임란 극복」, 『한국학논총』 vol.30,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8.567-9쪽.
  4. 정고조, 「서애 유성룡의 정치활동과 임란 극복」, 『한국학논총』 vol.30,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8.569-71쪽.
  5. 정고조, 「서애 유성룡의 정치활동과 임란 극복」, 『한국학논총』 vol.30,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8.573-4쪽.
  6. 정고조, 「서애 유성룡의 정치활동과 임란 극복」, 『한국학논총』 vol.30,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8.574-7쪽.
  7. 정고조, 「서애 유성룡의 정치활동과 임란 극복」, 『한국학논총』 vol.30,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8.577-9쪽.
  8. 정고조, 「서애 유성룡의 정치활동과 임란 극복」, 『한국학논총』 vol.30,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8.579-81쪽.
  9. 정고조, 「서애 유성룡의 정치활동과 임란 극복」, 『한국학논총』 vol.30,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8.581-2쪽.
  10. 정고조, 「서애 유성룡의 정치활동과 임란 극복」, 『한국학논총』 vol.30,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8.582-4쪽.
  11. 정고조, 「서애 유성룡의 정치활동과 임란 극복」, 『한국학논총』 vol.30,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8.564-6쪽.
  12. "유성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