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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궐인 [[경희궁]]의 외전으로 [[숙종]]이 재위 46년 동안 [[창덕궁]]과 [[경희궁 융복전]]에 번갈아 가며 거주하기도 했으며 여기서 승하하였다. 구조는 정면 6칸에 서쪽으로 ㄱ자로 꺽이는 건물이 이어져 있다. 남쪽으로는 [[경희궁 집희전]]이 있었는데, [[창덕궁 집상전]]을 지을 때 헐어 옮겼다. 휴식공간으로 사용된 전각이다.<ref>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1999, 221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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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궐인 [[경희궁]]의 외전으로 [[숙종]]이 재위 46년 동안 [[창덕궁]]과 [[경희궁 융복전]]에 번갈아 가며 거주하기도 했으며 여기서 승하하였다. 정조가 지은 「경희궁지」에는 [[경희궁 융복전]]이 [[경희궁]]의 정침(正寢)이고 [[경희궁 회상전]]은 임금이 거처하는 내전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궁궐지』에는 [[경희궁 회상전]]이 궁궐의 정전(正殿)이고 [[경희궁 융복전]]은 [[경희궁 회상전]]의 동쪽에 있는 전각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ref>[http://waks.aks.ac.kr/dir/searchView.aspx?qType=0&secType=&sType=&sWord=%ed%9a%8c%ec%83%81%ec%a0%84&dataID=00010739@AKS-2013-CKD-1240001_DIC 한국학진흥사업단 융복전]</ref>  구조는 정면 6칸에 서쪽으로 ㄱ자로 꺽이는 건물이 이어져 있다. 남쪽으로는 [[경희궁 집희전]]이 있었는데, [[창덕궁 집상전]]을 지을 때 헐어 옮겼다.<ref>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1999, 221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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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9년(순조 29) 대화재가 일어나 [[경희궁 회상전]], [[경희궁 융복전]] 등이 소실되었다. 그 후 [[경희궁]]은 일제 침략기에 7만평 규모에서 3만평의 규모만 남아있는데 [[경희궁 어조당]] 또한 이 시기에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980년 9월 1일 [[경희궁]]의 터가 사적 제 271호로 지정되고, 1990년에는 [[경희궁]] 복원 공사가 착공되었으나 이미 고층 건물이 들어서 있기 때문에 일부 전각만 복원되어 완전한 복원은 기대하기 어렵다. <ref>이근도, 『경희궁의 복원과 역사산책』, 도서출판 수서원, 2004, 67~77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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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9년(순조 29) 대화재가 일어나 [[경희궁 회상전]], [[경희궁 융복전]] 등이 소실되었다. 그 후 복원되지 못한 채 1900년대 일제 침략이 시작되면서 경희궁은 황폐화되고 일본인 학교인 경성중학교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고의적으로 궁궐을 지형을 변형시켰다. [[경희궁]]은 일제 침략기에 7만평 규모에서 3만평의 규모만 남아있는데 [[경희궁 어조당]] 또한 이 시기에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980년 9월 1일 [[경희궁]]의 터가 사적 제 271호로 지정되고, 1990년에는 [[경희궁]] 복원 공사가 착공되었으나 이미 고층 건물이 들어서 있기 때문에 일부 전각만 복원되어 완전한 복원은 기대하기 어렵다. <ref>이근도, 『경희궁의 복원과 역사산책』, 도서출판 수서원, 2004, 67~77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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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8일 (화) 22:51 판

틀:장소정보1

정의

경희궁에 있는 전각으로, 의 침전이다.[1]

내용

역사

서궐인 경희궁의 외전으로 숙종이 재위 46년 동안 창덕궁경희궁 융복전에 번갈아 가며 거주하기도 했으며 여기서 승하하였다. 정조가 지은 「경희궁지」에는 경희궁 융복전경희궁의 정침(正寢)이고 경희궁 회상전은 임금이 거처하는 내전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궁궐지』에는 경희궁 회상전이 궁궐의 정전(正殿)이고 경희궁 융복전경희궁 회상전의 동쪽에 있는 전각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2] 구조는 정면 6칸에 서쪽으로 ㄱ자로 꺽이는 건물이 이어져 있다. 남쪽으로는 경희궁 집희전이 있었는데, 창덕궁 집상전을 지을 때 헐어 옮겼다.[3]

현재

1829년(순조 29) 대화재가 일어나 경희궁 회상전, 경희궁 융복전 등이 소실되었다. 그 후 복원되지 못한 채 1900년대 일제 침략이 시작되면서 경희궁은 황폐화되고 일본인 학교인 경성중학교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고의적으로 궁궐을 지형을 변형시켰다. 경희궁은 일제 침략기에 7만평 규모에서 3만평의 규모만 남아있는데 경희궁 어조당 또한 이 시기에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980년 9월 1일 경희궁의 터가 사적 제 271호로 지정되고, 1990년에는 경희궁 복원 공사가 착공되었으나 이미 고층 건물이 들어서 있기 때문에 일부 전각만 복원되어 완전한 복원은 기대하기 어렵다. [4]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숙종 경희궁 융복전 A는 B에서 승하하였다 1720년

시간정보

시간 내용
1720년 6월 8일 숙종경희궁 융복전에서 승하하였다

공간정보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주석

  1. 공준원, 『오궁과 도성』, 세계문예, 2009, 381쪽.
  2. 한국학진흥사업단 융복전
  3. 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1999, 221쪽.
  4. 이근도, 『경희궁의 복원과 역사산책』, 도서출판 수서원, 2004, 67~77쪽.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이강근, 『한국의 궁궐』, 대원사, 1991.
  • 이근도, 『경희궁의 복원과 역사산책』, 도서출판 수서원, 2004
  • 이태호, 『그림으로 본 옛 서울』, 서울학연구소, 1995.
  • 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1999.

더 읽을거리

유용한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