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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가구(可久). 호는 연촌(烟村)·존양(存養). 최용봉(崔龍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을인(崔乙仁)이고, 아버지는 참의 최담(崔霮)이며, 어머니는 박인부(朴仁夫)의 딸이다. | + |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가구(可久). 호는 연촌(烟村)·존양(存養). 최용봉(崔龍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을인(崔乙仁)이고, 아버지는 참의 [[최담|최담(崔霮)]]이며, 어머니는 박인부(朴仁夫)의 딸이다.<ref>김용만,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7250 최덕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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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05년(태종 5)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한 뒤 추천을 받아 사관이 되었고, 1409년 교서관정자로서 원구단(圜丘壇)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오제제문(五帝祭文)을 준비 못하여 한때 투옥되었다. | + | 1405년([[조선 태종|태종]] 5)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한 뒤 추천을 받아 사관이 되었고, 1409년 교서관정자로서 원구단(圜丘壇)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오제제문(五帝祭文)을 준비 못하여 한때 투옥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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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 감찰 등 삼사(三司)의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외관으로 김제군수·남원부사 등 여러 주·군을 다스렸다. 남원부사를 사퇴한 뒤 영암의 영보촌(永保村)에 내려가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는데 이때 존양(存養)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 뒤에 감찰 등 삼사(三司)의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외관으로 김제군수·남원부사 등 여러 주·군을 다스렸다. 남원부사를 사퇴한 뒤 영암의 영보촌(永保村)에 내려가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는데 이때 존양(存養)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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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문종|문종]]이 즉위하자 그를 불러 예문관직제학에 임명,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였으나 그는 아직 치사할 나이가 안 되었는데도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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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풍습으로 볼 때 명예로운 직책을 사임하고 귀향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므로 동료들은 그의 높은 덕과 행동을 칭송하며, 다투어 시부를 지어주고 노자를 마련하여 주었다. 72세에 죽으니 영암의 주민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하고 존양사(存養祠)라 이름지었다. | 당시 풍습으로 볼 때 명예로운 직책을 사임하고 귀향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므로 동료들은 그의 높은 덕과 행동을 칭송하며, 다투어 시부를 지어주고 노자를 마련하여 주었다. 72세에 죽으니 영암의 주민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하고 존양사(存養祠)라 이름지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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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그는 [[조선 세종|세종]] 때 배출된 많은 학자 중 한 사람으로 정치적 격동에 휘말려들지 않고 문신이자 학자로서 명예로운 삶을 마쳤다. 전주의 서산사(西山祠), 남원의 주암서원(舟巖書院),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ref>김용만,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7250 최덕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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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05년(태종 5)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추천을 받아 사관(史官)이 되었고, 1409년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로서 원구단(圓丘壇)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오제제문(五帝祭文)을 준비 못해 한때 투옥되었다. 뒤에 3사(司)의 벼슬을 역임, 여러 주군(州郡)을 다스리고 남원 부사(南原府使)에 올랐다가 사퇴, 영암(靈岩)의 영보촌(永保村)에 내려가 학문을 연구했다. 1450년(문종 1)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이 되었으나 이듬해 노령으로 사직, 고향에 돌아가자 조정의 선비들이 시부(詩賦)를 지어 그의 높은 덕을 칭송했다. | ||
[네이버 지식백과] 최덕지 [崔德之] (인명사전, 2002. 1. 10., 민중서관) | [네이버 지식백과] 최덕지 [崔德之] (인명사전, 2002. 1. 10., 민중서관) |
2017년 8월 8일 (화) 14:53 판
최덕지(崔德之) | |
대표명칭 | 최덕지 |
---|---|
한자표기 | 崔德之 |
생몰년 | 1384년-1455년 |
본관 | 전주(全州) |
호 | 연촌(烟村), 존양(存養) |
자 | 가구(可久), 우수(迂叟) |
시대 | 조선시대 |
국적 | 조선 |
대표직함 |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 |
부 | 최담(崔霮) |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내용
개요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가구(可久). 호는 연촌(烟村)·존양(存養). 최용봉(崔龍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을인(崔乙仁)이고, 아버지는 참의 최담(崔霮)이며, 어머니는 박인부(朴仁夫)의 딸이다.[1]
업적
1405년(태종 5)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한 뒤 추천을 받아 사관이 되었고, 1409년 교서관정자로서 원구단(圜丘壇)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오제제문(五帝祭文)을 준비 못하여 한때 투옥되었다.
뒤에 감찰 등 삼사(三司)의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외관으로 김제군수·남원부사 등 여러 주·군을 다스렸다. 남원부사를 사퇴한 뒤 영암의 영보촌(永保村)에 내려가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는데 이때 존양(存養)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문종이 즉위하자 그를 불러 예문관직제학에 임명,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였으나 그는 아직 치사할 나이가 안 되었는데도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당시 풍습으로 볼 때 명예로운 직책을 사임하고 귀향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므로 동료들은 그의 높은 덕과 행동을 칭송하며, 다투어 시부를 지어주고 노자를 마련하여 주었다. 72세에 죽으니 영암의 주민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하고 존양사(存養祠)라 이름지었다.
그는 세종 때 배출된 많은 학자 중 한 사람으로 정치적 격동에 휘말려들지 않고 문신이자 학자로서 명예로운 삶을 마쳤다. 전주의 서산사(西山祠), 남원의 주암서원(舟巖書院),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2]
1405년(태종 5)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추천을 받아 사관(史官)이 되었고, 1409년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로서 원구단(圓丘壇)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오제제문(五帝祭文)을 준비 못해 한때 투옥되었다. 뒤에 3사(司)의 벼슬을 역임, 여러 주군(州郡)을 다스리고 남원 부사(南原府使)에 올랐다가 사퇴, 영암(靈岩)의 영보촌(永保村)에 내려가 학문을 연구했다. 1450년(문종 1)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이 되었으나 이듬해 노령으로 사직, 고향에 돌아가자 조정의 선비들이 시부(詩賦)를 지어 그의 높은 덕을 칭송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최덕지 [崔德之] (인명사전, 2002. 1. 10., 민중서관)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최담 | 최덕지 | A는 B의 어버이이다 | |
최치원 | 사산비명 | A는 B를 저술하였다 | |
최치원 | 토황소격문 | A는 B를 저술하였다 | |
최치원 | 계원필경 | A는 B를 저술하였다 | |
최치원 | 시무십여조 | A는 B를 저술하였다 | |
최치원 | 신라 진성여왕 | A는 B와 관련있다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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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8년 | 최치원이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 |
874년 | 당나라에서 빈공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
토황소격문을 저술하였다. | |
886년 | 계원필경을 신라 정강왕에게 바쳤다. |
894년 | 신라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를 올렸다. |
사산비명을 저술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