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신한첩"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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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f>장루비, 「《淑明宸翰帖》의 書體 硏究」, 원광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5, 1-6쪽.<ref> | ||
+ | 『{{PAGENAME}}』은 1962년 故김일근 선생이 발견할 | ||
+ | 당시에 표지가 소실되어 있었고, 부분적으로 서첩 뒤편 하단부가 훼손되어 있다. 『[[숙휘신한첩]]』과 대조하여 볼 때 앞뒤가 빠졌을 것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수록된 편지는 모두 68편이나 서첩 뒤편에 빠진 부분이 있다면 먼저 발견된 『[[숙휘신한첩]]』의 내용으로 보아 ‘명성왕후 어셔’로 분류된 편지가 몇 편 더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ref>장루비, 「《淑明宸翰帖》의 書體 硏究」, 원광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5, 11쪽.<ref> | ||
+ | ==={{PAGENAME}}의 서예사적 가치=== | ||
+ | 조선시대에 쓰여진 한글 편지는 대부분 필사자와 편년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PAGENAME}}』은 17세기 효종 대부터 현종 대까지 필사 시기가 분명하고 필적이 확실하다. 또한, 전후시기를 살펴보건대 現傳하는 왕후들의 언간 자료 중 | ||
+ | 시기적으로 가장 이른 자료임이 확인되었다. 이 편지들의 서체는 효종과 숙명공주의 정자체 2편, 반흘림체 1편, 흘림체 64편으로 구성되어 있다.이를 통해 한글 궁체의 변천 시기를 파악할 수 있으며, 궁체가 왕실에서부터 형성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서 한글서예사를 파악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 ||
+ | <ref>장루비, 「《淑明宸翰帖》의 書體 硏究」, 원광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5, 2쪽.</REF> | ||
+ | ==={{PAGENAME}}의 사회 배경과 역사사료적 가치=== | ||
+ | 『{{PAGENAME}}』이 쓰인 시기는 단순한 복상 논쟁이 아니라 학문과 사상을 매개로 한 일대의 정쟁의 시기였다. 17세기 율곡학파로 대표되는 서인과 퇴계학파로대표되는 남인이 禮로써 다스리는 이상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그 실현 방법 | ||
+ | 을 둘러싸고 전개한 성리학 이념 논쟁이 성행했던 시기9)였기에 禮를 더욱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당시 禮學을 중시하였던 상황에서 예송논쟁이 일어났는데, 이 논쟁의 주인공인 [[조선 효종|효종]]·[[장렬왕후]]·[[인선왕후]]의 글씨가 『{{PAGENAME}}』에 실려있다. 특히 [[숙명공주]]의 어머니인 [[인선왕후]]의 편지가 많은데 내용은 일상생활의 안부이지만 궁중풍속이나 앞서 말한 정치사건 및 상황 등을 포함하고 있는 부분이 있어 사료적 가치가 크다. | ||
+ | <ref>장루비, 「《淑明宸翰帖》의 書體 硏究」, 원광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5, 8-10쪽.<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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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30일 (일) 03:34 판
숙명신한첩(淑明宸翰帖) | |
대표명칭 | 숙명신한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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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淑明宸翰帖 |
이칭 | 신한첩 |
저자 | 조선 효종, 조선 현종, 장렬왕후, 인선왕후 ,명성왕후 |
시대 | 조선 |
소장처 | 국립청주박물관 |
지정번호 | 보물 제1629호 |
지정일 | 2010년 01월 04일 |
정의
조선시대 효종, 현종, 장렬왕후, 인선왕후, 명성왕후가 숙명공주에게 보낸 한글편지를 하나로 묶은 첩(帖)이다
내용
숙명신한첩의 구성
『숙명신한첩』은 효종의 둘째 딸인 숙명공주가 궁궐에서 출가한 후 40여 년간 왕과 왕비, 대비 등과 주고받은 한글로 쓴 친필 문안편지를 모은 총 68편의 서첩이다. 이 중에는 효종 어셔 9편・현종 어셔 2편・인선왕후 어셔 53편・명성왕후 어셔 1편・숙명공주의 편지 1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공주가 출궁한 사가였던 심익현 집안에서 전해져 내려오다가 故 김일근이 소장하던 것을 국립청주박물관에서 인수하여 현재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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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신한첩의 사회 배경과 역사사료적 가치
『숙명신한첩』이 쓰인 시기는 단순한 복상 논쟁이 아니라 학문과 사상을 매개로 한 일대의 정쟁의 시기였다. 17세기 율곡학파로 대표되는 서인과 퇴계학파로대표되는 남인이 禮로써 다스리는 이상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그 실현 방법 을 둘러싸고 전개한 성리학 이념 논쟁이 성행했던 시기9)였기에 禮를 더욱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당시 禮學을 중시하였던 상황에서 예송논쟁이 일어났는데, 이 논쟁의 주인공인 효종·장렬왕후·인선왕후의 글씨가 『숙명신한첩』에 실려있다. 특히 숙명공주의 어머니인 인선왕후의 편지가 많은데 내용은 일상생활의 안부이지만 궁중풍속이나 앞서 말한 정치사건 및 상황 등을 포함하고 있는 부분이 있어 사료적 가치가 크다. <ref>장루비, 「《淑明宸翰帖》의 書體 硏究」, 원광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5, 8-10쪽.<ref>
지식 관계망
주석
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 단행본
- 국립청주박물관, 『조선 왕실의 한글 편지 숙명신한첩』, 국립청주박물관 2011.
- 황문환, 『조선시대 한글편지 판독자료집』, 역락 2013.
- 논문
- 정복동,「《신한첩》서의 심미 양식 고찰 : 《숙명신한첩》·《숙휘신한첩》을 중심으로」, 『서예학연구』23, 한국서예학회, 2013.
- 김연희, 「《숙휘공주신한첩》의 서체연구」, 원광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2.
- 웹자원
- "현종이 숙명공주에게 보낸 편지", 조선시대 한글편지,
『한국학자료센터』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2016년 12월 27일. - "안순자. 조선 왕실의 한글편지", 『충청일보』, 2011년 7월 5일.
- "현종이 숙명공주에게 보낸 편지", 조선시대 한글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