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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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27일 (목) 16:3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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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중국의 서예가 왕희지(王羲之, 307-365)의 글씨체.

내용

왕희지(王羲之)는 동진(東晉)시대 사람으로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의 서체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서예가이다. 서진(西晉)의 여류 서예가인 위부인(衛夫人)의 서풍을 배웠고, 한(漢)나라와 위(魏)나라의 비문을 연구하여 해서·행서·초서의 각 서체를 완성하였다. 당 태종(唐 太宗)은 그의 글씨를 수집하여 한 조각의 글씨까지도 아끼다가 죽을 때 관에 넣어갔다고 한다.[1][2]

해서의 대표작으로는 『악의론(樂毅論)』 『황정경(黃庭經』이, 행서로는 『난정서(蘭亭序)』, 초서로는 그가 쓴 많은 편지를 모은 『십칠첩(十七帖)』이 유명하다. 또 송(宋)의 태종(太宗)이 992년에 조각한 『순화각첩(淳化閣帖)』이라는 법첩에는 그의 편지가 많이 수록되었고, 당(唐)나라의 회인(懷仁)이라는 중이 고종(高宗)의 명을 받아 672년에 왕희지의 필적 중에서 집자(集字)하여 세운 ‘대당삼장성교서비(大唐三藏聖敎序碑)’ 등도 그의 서풍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 밖에도 『상란첩(喪亂帖)』, 『공시중첩(孔侍中帖)』, 『유목첩(遊目帖)』, 『이모첩(姨母帖)』,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 등이 있다.[3]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비 왕희지체 A는 B로 쓰여졌다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 왕희지체 A는 B로 쓰여졌다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 왕희지체 A는 B로 쓰여졌다
왕희지체 왕희지 A는 B와 관련있다
왕희지체 해서 A는 B와 관련있다
왕희지체 행서 A는 B와 관련있다
왕희지체 초서 A는 B와 관련있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왕희지", 『두산백과』online.
  2. "왕희지체", 『두산백과』online.
  3. "왕희지", 『두산백과』online.
  4. "인각사 보현(각)국사비 탁본", 문자자료,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online, 국립중앙박물관.
  5.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문화재청
  6.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 탁본", 문자자료,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online, 국립중앙박물관.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