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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광사가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은 1334년([[고려 충숙왕]] 복위 3)에 원나라의 마지막 왕인 순제(順帝)가 그의 원찰(願刹)로 중건하면서부터이다.<ref>정병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674 신광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 신광사가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은 1334년([[고려 충숙왕]] 복위 3)에 원나라의 마지막 왕인 [[원 순제|순제(順帝)]]가 그의 원찰(願刹)로 중건하면서부터이다.<ref>정병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674 신광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원 순제|순제]]는 제위에 오르기 이전에 황해의 대청도(大靑島)에 귀양 오게 되어 신광사가 있는 북숭산을 지날 때에 풀 속에 한 부처가 있음을 보고, 그 부처에게 속히 귀국하여 왕이 되게 해주기를 빌었던 바, 그 후 귀국하여 왕이 되자 많은 재물을 내렸다.<ref>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주, 『북한의 전통사찰』, 양사재, 2011.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92532&cid=50763&categoryId=50782 신광사터]", 북한의 전통사찰,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이 역사에는 원나라의 대감(大監) 송골아(宋骨兒)가 이끄는 37인의 공장(工匠)이 참여하였고, 고려의 시중 김석견(金石堅)과 밀직부사 이수산(李壽山)이 송골아와 함께 감독하였다. 이 때 이루어졌던 건물은 법당인 보광명전(寶光明殿)을 중심으로 그 앞에 장랑(長廊), 동쪽에는 누(樓)와 재료(齋寮), 북쪽에는 1동의 전우(殿宇)와 그 앞에 석탑(石塔), 서쪽에는 나한전(羅漢殿) 등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밖에도 침실과 석경판(石經板)을 봉안한 해장전(海藏殿)·중문(中門)·종루(鐘樓)·양진당(養眞堂)·영마전(影磨殿) 등 많은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ref>정병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2674 신광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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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원(元)나라의 태자가 죄를 지어 옹현(瓮縣, 경기도 옹진군)의 대청도(大靑島)에 유배되었다. 신인(神人)이 있어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수양산의 숭봉(崇峰) 아래에 있는데 홀연히 너를 위해 한번 찾아준 것이다." 하였다. 깨어나서 이를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보냈으나 찾아내지 못하였다. 신인이 다시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반드시 네 스스로 오면 볼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태자가 직접 산 아래에 가서 숲 사이에 무너져내리는 암자가 있고 약사(藥師)라 칭하는 부처가 있는 것을 보았다. 이것이 꿈에 나타난 것인가 하고 생각하여 곧 절하며 "저를 본국에 돌려보내주시면 꼭 큰 절을 지어 보답하겠습니다." 하고 빌었다. 얼마 안 있어 태자가 본국에 돌아가 황제에 즉위하니 이가 순제(順帝, 1333~1367년)이다. 신이 또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전에 한 말을 어찌 있었느냐? 어찌 이리 오래도록 적적한가? " 하였다. 순제가 놀라 깨어 곧 대감(大監) 송골아(宋骨兒) 등을 보내 공장을 시켜 중국의 재료를 가져다가 도량을 짓도록 하였다. 고려 왕이 또한 시중(侍中) 김석견(金石堅)과 한림(翰林) 이수산(李壽山) 등에 명하여 국력으로 돕도록 하여 거찰을 창건하니 곧 원통(元統) 원년(고려 충숙왕 복위 2, 1333년)이었고 지정(至正) 신사년(고려 충혜왕 복위 2, 1341년)에 이르러 일이 모두 끝났다. | |옛날에 원(元)나라의 태자가 죄를 지어 옹현(瓮縣, 경기도 옹진군)의 대청도(大靑島)에 유배되었다. 신인(神人)이 있어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수양산의 숭봉(崇峰) 아래에 있는데 홀연히 너를 위해 한번 찾아준 것이다." 하였다. 깨어나서 이를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보냈으나 찾아내지 못하였다. 신인이 다시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반드시 네 스스로 오면 볼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태자가 직접 산 아래에 가서 숲 사이에 무너져내리는 암자가 있고 약사(藥師)라 칭하는 부처가 있는 것을 보았다. 이것이 꿈에 나타난 것인가 하고 생각하여 곧 절하며 "저를 본국에 돌려보내주시면 꼭 큰 절을 지어 보답하겠습니다." 하고 빌었다. 얼마 안 있어 태자가 본국에 돌아가 황제에 즉위하니 이가 순제(順帝, 1333~1367년)이다. 신이 또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전에 한 말을 어찌 있었느냐? 어찌 이리 오래도록 적적한가? " 하였다. 순제가 놀라 깨어 곧 대감(大監) 송골아(宋骨兒) 등을 보내 공장을 시켜 중국의 재료를 가져다가 도량을 짓도록 하였다. 고려 왕이 또한 시중(侍中) 김석견(金石堅)과 한림(翰林) 이수산(李壽山) 등에 명하여 국력으로 돕도록 하여 거찰을 창건하니 곧 원통(元統) 원년(고려 충숙왕 복위 2, 1333년)이었고 지정(至正) 신사년(고려 충혜왕 복위 2, 1341년)에 이르러 일이 모두 끝났다. |
2017년 7월 26일 (수) 15:35 판
해주 신광사 (海州 神光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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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해주 신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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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海州 神光寺 |
건립시기 | 신라 문무왕(661~681) 때 |
경내문화재 | 신광사오층탑, 신광사무자비 |
정의
황해남도 해주시 신광리에 있었던 절.
내용
창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3 「탑상(塔像)」의 '전후소장사리(前後所藏舍利)'조에 따르면, 923년(태조 6) 입조사(入朝使) 윤질(尹質)이 중국에서 오백나한상(五百羅漢像)을 가져왔는데, 그것을 이 절에 모셨다고 한 것으로 보아 창건연대 또한 그 이전으로 추정된다.[1]
당(唐)나라 대중(大中) 5년 신미(辛未)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원홍(元弘)이 부처님 어금니와 후당(後唐) 동광(同光) 원년 계미(923), (곧) 본조 태조(太祖) 즉위 6년 양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윤질(尹質)이 가져 온 5백나한상(五百羅漢像: 석가의 제자로서 공양을 받을 자격을 지닌 5백 명의 고명한 제자)은 지금 북숭산(北崇山) 신광사(神光寺)에 있다. | ||
출처: "진당대 원홍이 가져온 불아와 윤질이 가져온 5백나한상은 신광사에 있다", 삼국유사, |
신광사가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은 1334년(고려 충숙왕 복위 3)에 원나라의 마지막 왕인 순제(順帝)가 그의 원찰(願刹)로 중건하면서부터이다.[2] 순제는 제위에 오르기 이전에 황해의 대청도(大靑島)에 귀양 오게 되어 신광사가 있는 북숭산을 지날 때에 풀 속에 한 부처가 있음을 보고, 그 부처에게 속히 귀국하여 왕이 되게 해주기를 빌었던 바, 그 후 귀국하여 왕이 되자 많은 재물을 내렸다.[3] 이 역사에는 원나라의 대감(大監) 송골아(宋骨兒)가 이끄는 37인의 공장(工匠)이 참여하였고, 고려의 시중 김석견(金石堅)과 밀직부사 이수산(李壽山)이 송골아와 함께 감독하였다. 이 때 이루어졌던 건물은 법당인 보광명전(寶光明殿)을 중심으로 그 앞에 장랑(長廊), 동쪽에는 누(樓)와 재료(齋寮), 북쪽에는 1동의 전우(殿宇)와 그 앞에 석탑(石塔), 서쪽에는 나한전(羅漢殿) 등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밖에도 침실과 석경판(石經板)을 봉안한 해장전(海藏殿)·중문(中門)·종루(鐘樓)·양진당(養眞堂)·영마전(影磨殿) 등 많은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4]
옛날에 원(元)나라의 태자가 죄를 지어 옹현(瓮縣, 경기도 옹진군)의 대청도(大靑島)에 유배되었다. 신인(神人)이 있어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수양산의 숭봉(崇峰) 아래에 있는데 홀연히 너를 위해 한번 찾아준 것이다." 하였다. 깨어나서 이를 이상하게 여겨 사람을 보냈으나 찾아내지 못하였다. 신인이 다시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반드시 네 스스로 오면 볼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태자가 직접 산 아래에 가서 숲 사이에 무너져내리는 암자가 있고 약사(藥師)라 칭하는 부처가 있는 것을 보았다. 이것이 꿈에 나타난 것인가 하고 생각하여 곧 절하며 "저를 본국에 돌려보내주시면 꼭 큰 절을 지어 보답하겠습니다." 하고 빌었다. 얼마 안 있어 태자가 본국에 돌아가 황제에 즉위하니 이가 순제(順帝, 1333~1367년)이다. 신이 또 꿈에 나타나 말하기를, "전에 한 말을 어찌 있었느냐? 어찌 이리 오래도록 적적한가? " 하였다. 순제가 놀라 깨어 곧 대감(大監) 송골아(宋骨兒) 등을 보내 공장을 시켜 중국의 재료를 가져다가 도량을 짓도록 하였다. 고려 왕이 또한 시중(侍中) 김석견(金石堅)과 한림(翰林) 이수산(李壽山) 등에 명하여 국력으로 돕도록 하여 거찰을 창건하니 곧 원통(元統) 원년(고려 충숙왕 복위 2, 1333년)이었고 지정(至正) 신사년(고려 충혜왕 복위 2, 1341년)에 이르러 일이 모두 끝났다. | ||
출처: 정병삼, "신광사사적비(神光寺事跡碑)", 금석문 세부정보, |
신광사는 조선 세종 대 국가에서 공인한 36사(寺) 가운데 하나로 지정되었다. 이에 신광사는 원래 보유한 전지(田地) 200결(結)에 50결이 추가로 지급되어 250결을 가지게 되었고 거주하는 승려는 120명으로 정해졌는데, 이는 교종도회소(敎宗都會所)인 흥덕사(興德寺)와 같은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후 명종대에는 신광사 주지 도정(道正)이 방장(方丈)실에 들어와 있던 유생 2명을 구타하고 달아매었다가 풀어준 일이 발생하여 문제가 되었다.[5] 1677년(숙종 3) 절에 화재가 일어나 전각 요사채 천여가구가 전소하였으며, 다음 해인 1678년(숙종 4) 보광전(普光殿)을 중건하고 설법전(說法殿)·약사전(藥師殿)·시왕전(十王殿)·만세루(萬歲樓)·요사 등을 세웠다.[6]
현재는 폐사되었으며, 문화재로는 1324년(충숙왕 12)에 세워진 북한 보물급 문화재 제22호인 신광사오층탑(神光寺五層塔)과, 북한 보물급 문화재 제23호인 신광사무자비(神光寺無字碑)가 있다.[7]
관련문화유산
- 신광사오층탑(神光寺五層塔) - 북한 보물급 문화재 제22호
- 신광사무자비(神光寺無字碑) - 북한 보물급 문화재 제23호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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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 신광사 | 원 순제 | A는 B의 원찰이다 | |
해주 신광사 | 삼십육사 | A는 B에 포함된다 |
시각자료
주석
- ↑ 정병조, "신광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정병조, "신광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대한불교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주, 『북한의 전통사찰』, 양사재, 2011. 온라인 참조: "신광사터", 북한의 전통사찰,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정병조, "신광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용태, "신광사(新光寺)",
『조선왕조실록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1998_북한문화재해설집2(사찰건축편)_북한.pdf", 원문정보,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소. - ↑ 정병조, "신광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