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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2년에는 변발(辮髮)·호복(胡服) 등의 몽고풍속을 폐지하였다. 내정을 간섭하던 원나라의 정동행중서성이문소(征東行中書省理問所)를 폐지하고 원나라의 황실과 인척관계를 맺고 권세를 부리던 [[기철|기철(奇轍)]] 일파를 숙청하였다. 또한 100년간이나 존속해 온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폐지하여 원나라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하였다.<ref>민병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4295 공민왕]",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1352년에는 변발(辮髮)·호복(胡服) 등의 몽고풍속을 폐지하였다. 내정을 간섭하던 원나라의 정동행중서성이문소(征東行中書省理問所)를 폐지하고 원나라의 황실과 인척관계를 맺고 권세를 부리던 [[기철|기철(奇轍)]] 일파를 숙청하였다. 또한 100년간이나 존속해 온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폐지하여 원나라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하였다.<ref>민병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4295 공민왕]",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2017년 7월 25일 (화) 19:38 판
목차
정의
고려 제 31대 왕.
내용
개요
공민왕은 고려 제 31대 왕(1330-1374, 재위 1351-1374)으로, 호는 이재(怡齋)·익당(益堂)이며, 이름은 전(顓)이고, 몽골식 이름은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이다.[1]
아버지인 충숙왕과 어머니인 명덕태후(明德太后) 홍씨(洪氏)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2]
비(妃)는 원나라 위왕의 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이며, 그 밖에 혜비 이씨(惠妃 李氏)·익비 한씨(益妃 韓氏)·정비 안씨(定妃 安氏)·신비 염씨(愼妃 廉氏)가 있다.[3]
업적
몽골풍을 금지하고 친원파 일당을 숙청하다
1352년에는 변발(辮髮)·호복(胡服) 등의 몽고풍속을 폐지하였다. 내정을 간섭하던 원나라의 정동행중서성이문소(征東行中書省理問所)를 폐지하고 원나라의 황실과 인척관계를 맺고 권세를 부리던 기철(奇轍) 일파를 숙청하였다. 또한 100년간이나 존속해 온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폐지하여 원나라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하였다.[4]
1356년 원나라의 연호를 버리고, 각종 시호와 제도들을 다시 고쳤다. 즉 ‘충’자가 들어가는 왕의 시호를 바꾸었다.[5]
왕권을 강화하다
고려가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강한 왕권을 가지고 있어야만 했고, 그리고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권문세족들을 제거해야 하는 이러한 개혁을 함께 해 줄 사람으로 신돈(辛旽)을 찾아낸다. 신돈은 권문세족과 거리가 먼 스님이었기 때문에 개혁에 적합한 인물이었다.[6]
1352년 공민왕과 신돈은 폐단이 많았던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해 귀족들이 겸병한 토지를 원래의 소유자에게 환원시키는 한편,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해방시켰다.[7]
공민왕의 죽음
믿고 따랐던 신돈마저 잃자 공민왕은 오래전 죽은 노국대장공주를 더욱더 그리워하며 술독에 빠져 지냈어요. 원래 공민왕은 여색을 밝히지 않았는데 노국대장공주가 죽은 뒤 후궁들이 총애를 받으려 덤벼들자 오히려 여자를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대신 귀족의 자제 중 젊고 인물이 출중한 남자들을 뽑아 자제위를 만들었어요. 자제위는 왕의 침전에 기거하면서 시중을 들고 동성애의 상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공민왕은 준수한 외모의 홍륜을 사랑했어요. 하지만 왕에게는 왕위를 이을 아들을 낳아야 하는 의무가 있으니 언제까지고 남색만 밝힐 수는 없었죠.
당시 공민왕에게 아들이 한 명 있기는 했습니다. 노국대장공주가 죽은 뒤 후궁에게서 얻은 아들 ‘우’였어요. 하지만 공민왕은 ‘우’가 신돈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고 있었거든요. 왜냐 우를 낳은 여자가 바로 신돈의 여종이었기 때문이었어요. 결국 공민왕은 새로운 아들을 얻고자 해괴망측한 짓을 꾸밉니다. 자제위 중에서 홍륜, 한안 등에게 후궁과 동침하라고 시킨거예요. 그렇게 해서 아이를 낳으면 자신의 아들로 위장해서 왕위를 잇게 하려고 한 거죠.
마침내 후궁이 홍륜의 아이를 잉태하자 공민왕은 홍륜 일파를 제거하도록 시킵니다. 이 엄청난 음모의 비밀이 유지되려면 사건 당사자들은 모두 죽어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누군가가 이를 홍륜에게 알려줘 홍륜은 왕의 침소에서 철퇴를 휘두르게 되죠. 방은 온통 피바다가 되었습니다. 위대한 고려 말 개혁 군주 공민왕은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공민왕의 개혁 - 고려의 개혁을 추진하고 왕권을 강화하다 (이다지 한국사 : 전근대 편, 2015. 12. 11., 브레인스토어)
공민왕은 익비를 임신시킨 홍윤과 이 사실을아는 최만생을 없애고자 했다. 1374년(공민왕 23년) 9월 21일 밤, 침전에 들어간 최만생과 홍윤 등은 술에 취해 정신없이 자는 공민왕의 온몸을 칼로 마구 찔러댔다. 이들이 휘두른 칼에 공민왕은 뇌수가 벽에 튀어 붙을 정도로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때 공민왕의 나이 45세였다. 그 뒤 최만생·홍윤·한안·권진 등은 왕을 시해한 죄로 능지처참을 당하고 그들의 나머지 친족도 모두 잡혀 유배되거나 노비가 되었다.
고려의 등불 같은 존재였던 공민왕이었지만, 그의 죽음은 이처럼 처참하고 허무했다. 고려의 역대 제왕은 태조 이후로 원종까지 본국에서 시호와 묘호를 지었으나, 원나라 간섭을 받게 된 충렬왕대부터는 원나라로부터 시호를 받았을 뿐 묘호는 붙이지 못했다. 공민왕대에 명나라가 강성해지자 고려의 대외관계도 크게 바뀌어 공민왕의 시호인 ‘공민(恭愍)’은 명나라에서 받은 것이었다. 본국에서는 공민왕에게 ‘경효(慶孝)’라는 시호를 추증했다. 그 뒤의 우왕과 창왕은 모두 폐시(廢弑)되어 시호가 없고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새 왕조 조선에서 추증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공민왕 [恭愍王] - 고려 재건을 위해, 개혁을 단행하다 (인물한국사)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고려 공민왕 | 고려 우왕 | A는 B의 아버지다 | |
고려 충숙왕 | 고려 공민왕 | A는 B의 어버이이다 | |
명덕태후 | 고려 공민왕 | A는 B의 어버이이다 | |
노국대장공주 | 고려 공민왕 | A는 B의 아내이다 | |
고려 공민왕 | 신돈 | A는 B와 관련있다 | |
고려 공민왕 | 천산대렵도 | A는 B를 저술하였다 | |
고려 공민왕 | 노국대장공주진 | A는 B를 저술하였다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330년 | 고려 공민왕이 출생하였다. |
1351년 | 고려 제 31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
1374년 | 고려 공민왕이 사망하였다. |
시각자료
영상
- 김경호, "공민왕의 개혁정치", YouTube, 게시일: 2015년 12월 28일.
주석
- ↑ "공민왕",
『위키백과』online . - ↑ 민병하, "공민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민병하, "공민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민병하, "공민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공미라, 『한국사 개념사전』, (주)북이십일 아울북, 2010. 온라인 참조: "공민왕", 어린이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공미라, 『한국사 개념사전』, (주)북이십일 아울북, 2010. 온라인 참조: "공민왕", 어린이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민병하, "공민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