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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는 궁중에서 왕비의 의식용으로 [[대례복]]과 병용하던 머리 형태이기 때문에 크고 화려했다. 중앙에 고계(가발을 덧대어 만든 큰 상투)를 만들고 그 밑으로는 좌우 어깨까지 내려오면서 A자 형으로 펼쳐진다. 뒷부분은 중간에 머리를 땋아 그 위에 댕기를 묶었다.<ref>박영미, 「조선시대 가체유행에 관한 연구」,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3, 34-36쪽.</ref> | 대수는 궁중에서 왕비의 의식용으로 [[대례복]]과 병용하던 머리 형태이기 때문에 크고 화려했다. 중앙에 고계(가발을 덧대어 만든 큰 상투)를 만들고 그 밑으로는 좌우 어깨까지 내려오면서 A자 형으로 펼쳐진다. 뒷부분은 중간에 머리를 땋아 그 위에 댕기를 묶었다.<ref>박영미, 「조선시대 가체유행에 관한 연구」,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3, 34-36쪽.</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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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큰머리]]는 내명부의 여인 및 기녀가 사용하는 것이었다. 특히 내명부 중에서도 품계를 가진 빈, 귀인 등의 후궁이 사용하였다. 앞 가리마 위에 첩지를 매고 그 위에 | + | [[큰머리]]는 내명부의 여인 및 기녀가 사용하는 것이었다. 특히 내명부 중에서도 품계를 가진 빈, 귀인 등의 후궁이 사용하였다. 앞 가리마 위에 첩지를 매고 그 위에 [[어염족두리]]를 올려 놓고 다리 꼭지를 뒷머리에서 머리 형태로 좌우로 갈라서 어염족두리 위에 고정시켰다. 그 위에 가체로서 좌우에 둥글게 구부려 만든 거대한 아계(Y髻)를 덧붙였다. [[어염족두리]] 정상과 머리 측면 좌우에 있는 옥판에 어려 보석을 박거나 [[떨잠]]등을 꽂았다. 인모(人毛)로 된 거두미는 일생동안 그것만 만드는 전문 상궁이 있기도 했다. 가체 금지령이 내려진 이후 법적으로 인모로 하던 것을 나무로 대신하게 하였는데, 이 때문에 거두미 머리를 떠구지 머리라고도 부른다.<ref>박영미, 「조선시대 가체유행에 관한 연구」,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3, 34-36쪽.</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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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여머리]]는 왕비를 비롯하여 출가한 공주와 옹주, 양반가에서 이용하였고 상궁 중에선 오직 지밀상궁 만이 할 수 있었다. 형태는 가르마 위에 첩지를 매고 그 위에 [[어염족두리]]를 쓴 다음, 일곱 깍지의 가체를 묶어 두갈래로 땋아 [[어염족두리]] 위에 얹고 [[비녀]]와 매개[[댕기]]로 고정시키는 것이다. <ref>중앙대학교 산학협력단(인문컨텐츠연구소), "[https://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AGE&search_div_id=CP_AGE001&cp_code=cp0413&index_id=cp04130025&content_id=cp041300250001&search_left_menu=2 조선시대-어여머리]", 전통머리모양과 머리치레거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콘텐츠닷컴』<sup>online</sup></online></html>.</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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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25일 (화) 19:08 판
가체 (加髢) |
|
대표명칭 | 가체 |
---|---|
한자표기 | 加髢 |
이칭 | 다래, 다리, 다레, 체(髢), 월자(月子) |
유형 | 장신구 |
목차
정의
여자의 머리숱을 많아 보이게 하려고 덧넣는 딴 머리가발이다.
내용
조선 이전의 가체 사용
『당서(唐書)』 에서 신라 사람들이 아름다운 두발(頭髮)을 머리에 두르고 장식하였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머리 모양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서는 오래 전부터 가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성덕왕조에 ‘미체(美髢)’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다리이며, 신라의 명물로 외국에 수출도 하였다. 또한 『당서』에서 신라의 남자가 머리를 깎아 팔았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가난한 자가 머리를 깎아 다리로 판 것으로 보인다.[1] 고구려의 경우 안악 3호분 동수부인 벽화에서 동수부인과 시녀들이 가체를 이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백제는 남아있는 자료가 없어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삼국의 복식이 비슷했고,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비용 금제 머리 장식을 보아 가체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2] 따라서 가체의 풍습은 통일신라시대에 이미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도 가체의 풍습은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으나, 고려 말기에는 원나라의 영향도 받아 더욱 크게 성행하였다. [3]
조선 시대 가체의 유행과 금지령
조선시대 초기 여인들의 머리 모양은 고려시대의 모습이 그대로 이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시대 중엽부터 가체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후기로 갈수록 크기가 커지고, 왕비부터 천민까지 모두 가체를 얹게 되었다. 가체의 유향은 다양한 머리 모양의 출현과 더불어 비녀, 뒤꽂이, 떨잠과 같은 머리 장신구의 발달을 가져왔다. 그러나 정도가 극심하여 조정에서는 수십년 동안 가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결국 1788년 조선 정조는 가체를 금지하는 「가체신금사목」을 반포한다. [4]
가체의 종류
대수(大首)
대수는 궁중에서 왕비의 의식용으로 대례복과 병용하던 머리 형태이기 때문에 크고 화려했다. 중앙에 고계(가발을 덧대어 만든 큰 상투)를 만들고 그 밑으로는 좌우 어깨까지 내려오면서 A자 형으로 펼쳐진다. 뒷부분은 중간에 머리를 땋아 그 위에 댕기를 묶었다.[5]
큰머리(巨頭味, 擧頭美, 거두미)
큰머리는 내명부의 여인 및 기녀가 사용하는 것이었다. 특히 내명부 중에서도 품계를 가진 빈, 귀인 등의 후궁이 사용하였다. 앞 가리마 위에 첩지를 매고 그 위에 어염족두리를 올려 놓고 다리 꼭지를 뒷머리에서 머리 형태로 좌우로 갈라서 어염족두리 위에 고정시켰다. 그 위에 가체로서 좌우에 둥글게 구부려 만든 거대한 아계(Y髻)를 덧붙였다. 어염족두리 정상과 머리 측면 좌우에 있는 옥판에 어려 보석을 박거나 떨잠등을 꽂았다. 인모(人毛)로 된 거두미는 일생동안 그것만 만드는 전문 상궁이 있기도 했다. 가체 금지령이 내려진 이후 법적으로 인모로 하던 것을 나무로 대신하게 하였는데, 이 때문에 거두미 머리를 떠구지 머리라고도 부른다.[6]
어여머리
어여머리는 왕비를 비롯하여 출가한 공주와 옹주, 양반가에서 이용하였고 상궁 중에선 오직 지밀상궁 만이 할 수 있었다. 형태는 가르마 위에 첩지를 매고 그 위에 어염족두리를 쓴 다음, 일곱 깍지의 가체를 묶어 두갈래로 땋아 어염족두리 위에 얹고 비녀와 매개댕기로 고정시키는 것이다. [7]
얹은머리
얹은머리는 트레머리라고도 하며 큰머리 모양을 축소시킨 머리형태이다.얹은머리의 양식은 앞가리마를 해주고 뒤에서 묶어준 다음 첩지를 매어주고 머리뒤에서 본발을 붙인 밑에 다리를 대어준다. 귀 앞으로 다리를 대어 귀를 가려주고 첩지위로 올라가서 엇갈려 머리를 돌려 처음 돌린 머리위로얹어주며 내려오고 이렇게 세 바퀴 돌려 준 후 우측 머리끝을 다리속으로 넣어주고 좌측 머리끝도 보이지 않게 머릿속으로 넣어 마무리 해준다. 뒷머리 부분에 매개댕기를 달아주고 그 위에 떨잠을 수식해 준다. [8]
첩지머리
예장(禮裝)할 때의 머리로서, 제도에 따르는 계급표시이기도 하였다. 첩지머리의 양식은 가는 다리 중간에 천을 대고 그 위에 첩지를 얹어 양쪽 끝과 중간 세 곳을 적색실로 떠서 고정시키며 가리마 위에 올려놓고 느슷느슷하게 양쪽으로 땋아 뒤에서 머리와 함께 묶어 쪽을 찐 머리모양이다. 첩지의 장식은 화관이나 족두리 같은 것을 쓸 때에 이를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므로 궁중에서는 평상시에도 첩지머리를 하고 있었고, 그것은 신분의 상하를 구별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왕비용은 도금한 봉황 모양의 봉첩지였으며, 내명부는 도금이나 은 또는 흑각(黑角)으로 개구리를 만들어 사용했다. 궁중에서는 평상시에, 일반에서는 계급이 높은 사람이 예를 갖출 때에 사용했다.[9]
조짐머리
조선시대 반가(班家)에서 의식이나 외명부가 궁중 출입시에 하던 머리 형식이다. 조짐머리의 양식은 머리정상에 가는 다리에 첩지를 매고 나머지 머리는 좌우로 갈라 밑에서 묶고 다리를 넣어 땋아 가지고 비비 틀어 소라껍질같은 쪽을 찐 후 비녀를 꽂고 잠으로 장식하는 머리형태이다. 이 머리모양은 정조때 머리에 관한 가체신금절목을 반포한 이후 얹은머리 대신 쪽진머리를 하게 하였는데 이 쪽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쪽의 크기는 젊은이들은 크고, 노인들은 작았다고 한다. 잠 또한 계절에 따라 달랐는데, 10월-1월에는 도금용잠(鍍金龍簪)을, 2월-4월에는 매죽잠(梅竹簪)・은목단잠(銀牧丹簪)을, 5월부터는 민옥잠, 둥근옥판에 진주를 박은 홍난장옥반자를 꽂았다. [10]
쪽머리
쪽머리는 일명 북계(北綽), 후계(後綽), 낭자머리 등으로 불리운다. 쪽머리는 삼국시대부터 있었으나 조선중기이후 특히 후기에 오면서 궁중과 반가부녀들이 즐겨 치장하던 머리형태로 정조대에 이르러 가체금지령으로 널리 보급되어 보편화 되었다. 쪽머리의 양식은 앞머리 중간에 반듯하게 가리마를 타고 머리칼의 흩어짐이 없이 좌우로 곱게 빗어 뇌후에서 묶고 한줄로 땋아서 끝은 댕기로 묶는다. 땋은 머리는 왼손에다 둥글게 말고 나머지는 땋기 시작한 머리 끝에 댕기로써 감는다. 그 다음 왼손에 둥글게 감고 있던 머리를 오른쪽으로 잡 아 당겨 타원형이 되게 하면 가운데는 매개 댕기가 보이게 되며 비녀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매개댕기 밑을 질러 꽂아서 쪽머리를 고정시킨다. 이때 매개댕기는 남편이 있는 부녀는 자색 또는 적색댕기를 매고 상중에는 흰 댕기를 맸다. 궁중 및 반가의 상류부녀들은 각종 보석과 주패로 된 뒤꽂이를 꽂아 더욱 아름답게 꾸몄다. [11]
땋은머리
미혼녀의 머리모양[그림3-28]으로, 양쪽 귀위의 귀밑머리를 땋아 뒤에서 모아 다시 변발하여 늘이고 끝에 댕기를 들였는데, 머리채가 긴 것을 자랑으로 삼아 이에도 가체를 하였으며, 이러한 가운데 반가의 규수들은 귀밑머리로 귀를 가리 고 일반 처녀들은 귀를 가리지 않았다.[12]
지식 관계망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유희경, "가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영주, 「조선시대 가체 변화에 관한 연구」, 동덕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0, 14-15쪽.
- ↑ 유희경, "가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이영주, 「조선시대 가체 변화에 관한 연구」, 동덕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0, 17-18쪽.
- ↑ 박영미, 「조선시대 가체유행에 관한 연구」,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3, 34-36쪽.
- ↑ 박영미, 「조선시대 가체유행에 관한 연구」,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3, 34-36쪽.
- ↑ 중앙대학교 산학협력단(인문컨텐츠연구소), "조선시대-어여머리", 전통머리모양과 머리치레거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 - ↑ 박영미, 「조선시대 가체유행에 관한 연구」,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3, 36-37쪽.
- ↑ 박영미, 「조선시대 가체유행에 관한 연구」,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3, 36-37쪽.
- ↑ 박영미, 「조선시대 가체유행에 관한 연구」,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3, 38쪽.
- ↑ 박영미, 「조선시대 가체유행에 관한 연구」,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3, 38-39쪽.
- ↑ 박영미, 「조선시대 가체유행에 관한 연구」,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3, 39쪽.
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 논문
- 송승희, 「가체를 중심으로 한 조선후기 여성의 머리장식 연구, 신윤복의 풍속화를 중심으로」, 충남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4.
- 김성아·박명주, 「가체금지령 이후 가체를 이용한 머리모양에 관한 연구 : 가체머리, 얹은머리, 트레머리와 비교 분석」, 『미용산업연구』4, 한국미용산업학회, 2003.
- 박수향, 「조선시대 여인의 머리모양과 화장에 관한 연구 - 가체머리를 중심으로 - 」, 『코리아뷰티디자인학회지』4, 코리아뷰티디자인학회, 2008.
- 김민정·이상은, 「미용학적 관점에서 본 조선시대 가체 문화사」, 『역사민속학』31, 한국역사민속학회, 2009.
- 단행본
- 이민주, 『조선 사대부가의 살림살이』, 한국학중앙연구원, 2017.
- 반주원, 『조선시대 살아보기: 우리가 미처 몰랐던 조선생활사』, 미래의 창, 2017.
유용한 정보
- 박윤미, "머리가 무거울수록 멋쟁이",
『문화유산채널』online , 한국문화재재단, 2012년 4월 4일.
웹자원
- 중앙대학교 산학협력단(인문컨텐츠연구소), "전통머리모양과 머리치레거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