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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신 성종 및 연산군대의 역관이다. 특히 시문에 능통하여 외국의 사절을 따라 연경 및 일본에 여러차례 왕래하였다.<ref>『소문쇄록』 온라인 참조: '[http://db.itkc.or.kr/dir/pop/heje?dataId=ITKC_BT_1310A 소문쇄록 해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문집총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ref> | ||
+ | 은 1454년(단종 2)에 김천에서 태어났다. [[점필제 | 점필재(佔畢齋)]]에게 훈도를 받았으며 어릴 때부터 문장에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세종대에 서얼금과법(庶孼禁科法 : 서출의 과거 응시를 금하는 법)때문에 과거에 응시하지 못했다가 1479년(성종 10) 신숙주 일행이 일본으로 사행을 떠날 때 홍귀달(洪貴達)과 채수(蔡壽)의 추천을 받아 성종의 어전 시험을 받고 군의(軍議)를 받아 수행하게 됨으로써 관리로 임용될 수 있었다. 사행에서 돌아온 후로는 내시교관의 직책을 맡고 있었는데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성종이 자주 조신을 불러 시를 짓게 했다. <ref>정경주, 「적암 조신의 문학관과 일상적 체험의 문학세계」, 『동양한문학연구』 vol.6, 동양한문학회, 1991, 186-7쪽</ref> | ||
+ | 한편 조신은 중국으로 가는 사신을 수행하여 중국에 가기도 하였다. 중국 사행 당시 북경에서 안남국(현 베트남) 사신 레티꺼(Le Thi Cu, 黎時擧)와 시문을 주고받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외교적 공적이 인정되어 종3품의 사역원 정(司譯院正)에 특진되었다. | ||
+ | 1485년(성종 16)에는 의사(醫司)에 속하여 음양의 이치와 약리(藥理)를 가르쳤으며, 1489년(성종 20)에는 내의원(內醫院)에 출사하였다. 1492년(성종 23)에 조신이 학식이 깊고 음률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안 유자광(柳子光)과 성현(成俔)은 성종에게 체아직의 녹봉을 줄 것을 요청하였다. | ||
+ |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고 조위가 전라도 순천으로 유배를 가게 되자, 조신도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 김천으로 낙향하였다. 그는 1529년(중종 24)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인의리 봉계마을에 있다. | ||
+ | 1518년(중종 13) 왕의 명을 받아 김안국(金安國)과 더불어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를 편찬하였고, 이외의 저서로『적암시고(適庵詩稿)』, 『백년록(百年錄)』, 『소문쇄록(謏聞瑣錄)』등이 있다. | ||
+ | [상훈과 추모] | ||
+ | 1543년(중종 38)에 성종은 ‘문장에 능한 사람을 우대하는 뜻’으로 서출이자 역관인 그에게 공조판서를 추증하였고, 효강(孝康)이라는 시호를 내렸다.<ref>『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 조신],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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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석'''== | ||
+ | <reference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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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 : 한글고문서]] | ||
+ | [[분류 : 인물]] |
2017년 7월 19일 (수) 19:51 판
정의
조선 전기의 역관이자 문신으로,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와 『적암시고(適庵詩稿)』를 저술하였다.
조신의 생애
조신 성종 및 연산군대의 역관이다. 특히 시문에 능통하여 외국의 사절을 따라 연경 및 일본에 여러차례 왕래하였다.[1]
은 1454년(단종 2)에 김천에서 태어났다. 점필재(佔畢齋)에게 훈도를 받았으며 어릴 때부터 문장에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세종대에 서얼금과법(庶孼禁科法 : 서출의 과거 응시를 금하는 법)때문에 과거에 응시하지 못했다가 1479년(성종 10) 신숙주 일행이 일본으로 사행을 떠날 때 홍귀달(洪貴達)과 채수(蔡壽)의 추천을 받아 성종의 어전 시험을 받고 군의(軍議)를 받아 수행하게 됨으로써 관리로 임용될 수 있었다. 사행에서 돌아온 후로는 내시교관의 직책을 맡고 있었는데 그의 재능을 눈여겨본 성종이 자주 조신을 불러 시를 짓게 했다. [2]
한편 조신은 중국으로 가는 사신을 수행하여 중국에 가기도 하였다. 중국 사행 당시 북경에서 안남국(현 베트남) 사신 레티꺼(Le Thi Cu, 黎時擧)와 시문을 주고받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외교적 공적이 인정되어 종3품의 사역원 정(司譯院正)에 특진되었다. 1485년(성종 16)에는 의사(醫司)에 속하여 음양의 이치와 약리(藥理)를 가르쳤으며, 1489년(성종 20)에는 내의원(內醫院)에 출사하였다. 1492년(성종 23)에 조신이 학식이 깊고 음률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안 유자광(柳子光)과 성현(成俔)은 성종에게 체아직의 녹봉을 줄 것을 요청하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고 조위가 전라도 순천으로 유배를 가게 되자, 조신도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 김천으로 낙향하였다. 그는 1529년(중종 24)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인의리 봉계마을에 있다. 1518년(중종 13) 왕의 명을 받아 김안국(金安國)과 더불어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를 편찬하였고, 이외의 저서로『적암시고(適庵詩稿)』, 『백년록(百年錄)』, 『소문쇄록(謏聞瑣錄)』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1543년(중종 38)에 성종은 ‘문장에 능한 사람을 우대하는 뜻’으로 서출이자 역관인 그에게 공조판서를 추증하였고, 효강(孝康)이라는 시호를 내렸다.[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