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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세의 호는 우복이며 진주정씨 정여관의 아들이다. 정경세는 [[유성룡]]의 고제로서 이황-유성룡-정경세로 이어지는 영남학통의 적전이었다. 그는 주자학 전반에 조예가 깊었지만 특히 예학에 정통하였으며 영남남인으로서는 드물게 인조조에 이조판서에 올라 일국의 전형을 담당하고 양관대제학으로서 한 시대의 문병을잡았던 매우 현달한 인물이었다. <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尙州 晉州鄭氏 愚伏宗宅 山水軒 所藏 典籍類의 내용과 성격」,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273쪽. </ref> | 정경세의 호는 우복이며 진주정씨 정여관의 아들이다. 정경세는 [[유성룡]]의 고제로서 이황-유성룡-정경세로 이어지는 영남학통의 적전이었다. 그는 주자학 전반에 조예가 깊었지만 특히 예학에 정통하였으며 영남남인으로서는 드물게 인조조에 이조판서에 올라 일국의 전형을 담당하고 양관대제학으로서 한 시대의 문병을잡았던 매우 현달한 인물이었다. <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尙州 晉州鄭氏 愚伏宗宅 山水軒 所藏 典籍類의 내용과 성격」,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273쪽. </ref> | ||
정경세는 사회적, 학문적 지위에 반해 경제적으로는 그다지 안정적이지 못했으며 만년에는 각종 옥사에 연루된 나머지 제반 여건이 불안정했ㅇ며 거처도 일정하지 않았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尙州 晉州鄭氏 愚伏宗宅 山水軒 所藏 典籍類의 내용과 성격」,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274쪽. </ref> | 정경세는 사회적, 학문적 지위에 반해 경제적으로는 그다지 안정적이지 못했으며 만년에는 각종 옥사에 연루된 나머지 제반 여건이 불안정했ㅇ며 거처도 일정하지 않았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尙州 晉州鄭氏 愚伏宗宅 山水軒 所藏 典籍類의 내용과 성격」,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274쪽. </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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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초반 중앙 정계와 영남학파에 미친 우복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그는 학식, 문장과 풍부한 정치적 경험을 바탕으로 유성룡의 사후에는 영남남인의 구심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학문적으로는 이황-유성룡으로 이어지는 학통의 정맥으로서 흔히 이황의 3고제로 불리는 [[유성룡]], [[김성일]], [[정구]] 3인이 모두 사망하는 1620년 이후에는 [[장현광]]과 더불어 영남학파의 대들보 역할을 하였다. .<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尙州 晉州鄭氏 愚伏宗宅 山水軒 所藏 典籍類의 내용과 성격」,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274쪽. </ref> | 17세기 초반 중앙 정계와 영남학파에 미친 우복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그는 학식, 문장과 풍부한 정치적 경험을 바탕으로 유성룡의 사후에는 영남남인의 구심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학문적으로는 이황-유성룡으로 이어지는 학통의 정맥으로서 흔히 이황의 3고제로 불리는 [[유성룡]], [[김성일]], [[정구]] 3인이 모두 사망하는 1620년 이후에는 [[장현광]]과 더불어 영남학파의 대들보 역할을 하였다. .<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尙州 晉州鄭氏 愚伏宗宅 山水軒 所藏 典籍類의 내용과 성격」,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274쪽. </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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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18일 (화) 04:50 판
정경세와 영남학파
정경세의 호는 우복이며 진주정씨 정여관의 아들이다. 정경세는 유성룡의 고제로서 이황-유성룡-정경세로 이어지는 영남학통의 적전이었다. 그는 주자학 전반에 조예가 깊었지만 특히 예학에 정통하였으며 영남남인으로서는 드물게 인조조에 이조판서에 올라 일국의 전형을 담당하고 양관대제학으로서 한 시대의 문병을잡았던 매우 현달한 인물이었다. [1] 정경세는 사회적, 학문적 지위에 반해 경제적으로는 그다지 안정적이지 못했으며 만년에는 각종 옥사에 연루된 나머지 제반 여건이 불안정했ㅇ며 거처도 일정하지 않았다.[2]
평가
17세기 초반 중앙 정계와 영남학파에 미친 우복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그는 학식, 문장과 풍부한 정치적 경험을 바탕으로 유성룡의 사후에는 영남남인의 구심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학문적으로는 이황-유성룡으로 이어지는 학통의 정맥으로서 흔히 이황의 3고제로 불리는 유성룡, 김성일, 정구 3인이 모두 사망하는 1620년 이후에는 장현광과 더불어 영남학파의 대들보 역할을 하였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