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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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즉위한지 4년 정축(丁丑)에 왕명을 내려 운문사(雲門寺)에 머무르게 하니 현풍(玄風)을 크게 천양(闡揚)하였다. 왕이 날로 깊이 마음을 기울이더니 시를 부쳐 이르기를, "비밀리에 전함에 어찌 반드시 구의(摳衣)를 고치리오. 금지(金地)에 만나 부름이 또한 기이하도다. 그대를  대궐 아래에 맞아 들이고자 하는데 대사는 어찌 백운(白雲)의 가지에 길이 애태우는가?"라고 하였다.  
 
|왕이 즉위한지 4년 정축(丁丑)에 왕명을 내려 운문사(雲門寺)에 머무르게 하니 현풍(玄風)을 크게 천양(闡揚)하였다. 왕이 날로 깊이 마음을 기울이더니 시를 부쳐 이르기를, "비밀리에 전함에 어찌 반드시 구의(摳衣)를 고치리오. 금지(金地)에 만나 부름이 또한 기이하도다. 그대를  대궐 아래에 맞아 들이고자 하는데 대사는 어찌 백운(白雲)의 가지에 길이 애태우는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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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년(辛巳年) 여름에 일본 정벌로 말미암아 경주로 행차하여 명을 내려 대사를 행재소(行在所)에 오게 하였다. 대사가 이르자 자리에 오르기를 청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배로 생겼다. 이로 말미암아 대사의 불일결사문(佛日結社文)을 취하여 운을 찍고 제압(題押)하여 불일사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신사년(辛巳年) 여름에 일본 정벌로 말미암아 경주로 행차하여 명을 내려 대사를 행재소(行在所)에 오게 하였다. 대사가 이르자 자리에 오르기를 청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배로 생겼다. 이로 말미암아 대사의 불일결사문(佛日結社文)을 취하여 운을 찍고 제압(題押)하여 불일사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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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해 가을 장작윤 김군(金頵)을 근시장(近侍將)으로 삼아 조서(詔書)를 보내어 맞으니 대궐에 이르렀다. 대전(大殿)으로 청하여 선(禪)을 설법하니 기쁨이 용안(龍顔)에 넘쳤으며, 유사(有司)에 칙명을 내려 광명사(廣明寺)에 머물게 하였다. 원(院)에 들어가던 날 밤에 어떤 사람이 방장(方丈) 밖에 서서 "잘 오셨습니다"라고 세 번 말하였는데 살펴보니 아무도 없었다. 겨울 12월에 왕이 몸소 찾아와 법요(法要)를 자문하였다.  
 
다음해 가을 장작윤 김군(金頵)을 근시장(近侍將)으로 삼아 조서(詔書)를 보내어 맞으니 대궐에 이르렀다. 대전(大殿)으로 청하여 선(禪)을 설법하니 기쁨이 용안(龍顔)에 넘쳤으며, 유사(有司)에 칙명을 내려 광명사(廣明寺)에 머물게 하였다. 원(院)에 들어가던 날 밤에 어떤 사람이 방장(方丈) 밖에 서서 "잘 오셨습니다"라고 세 번 말하였는데 살펴보니 아무도 없었다. 겨울 12월에 왕이 몸소 찾아와 법요(法要)를 자문하였다.  
다음해 봄에 왕이 군신(群臣)에게 이르기를 "우리 선왕께서 모두 불교의 덕이 높은 이를 왕사로 삼으셨고 덕이 더욱 큰 이를 국사로 삼으셨는데, 과인만이 유독 없으면 옳겠는가? 지금 운문화상(雲門和尙)은 도가 높고 덕이 커서 사람들이 모두 추앙하니, 어찌 과인만이 홀로 인자한 은택을 입는 것이 옳겠는가? 마땅히 한 나라와 함께 누려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우승지(右承旨) 염승익(廉承益)을 보내어 왕명을 받들어 합국존사(闔國尊師)의 예를 행하기를 청하였으나 대사는 표문을 올려 굳게 사양하였다. 왕이 다시 사신을 보내어 세 번이나 간청하였다. 상장군(上將軍) 나유(羅裕) 등을 보내어 국존(國尊)으로 책봉하고, 호를 원경충조(圓徑冲照)라 하였다. 4월 신묘일(辛卯日)에 궁궐로 맞아들여 왕이 몸소 백관을 거느리고 구의(摳衣)의 예를 행하였다. 국사를 고쳐 국존이라 한 거은 원의 국사라는 칭호를 피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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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해 봄에 왕이 군신(群臣)에게 이르기를 "우리 선왕께서 모두 불교의 덕이 높은 이를 왕사로 삼으셨고 덕이 더욱 큰 이를 국사로 삼으셨는데, 과인만이 유독 없으면 옳겠는가? 지금 운문화상(雲門和尙)은 도가 높고 덕이 커서 사람들이 모두 추앙하니, 어찌 과인만이 홀로 인자한 은택을 입는 것이 옳겠는가? 마땅히 한 나라와 함께 누려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우승지(右承旨) 염승익(廉承益)을 보내어 왕명을 받들어 합국존사(闔國尊師)의 예를 행하기를 청하였으나 대사는 표문을 올려 굳게 사양하였다. 왕이 다시 사신을 보내어 세 번이나 간청하였다. 상장군(上將軍) 나유(羅裕) 등을 보내어 국존(國尊)으로 책봉하고, 호를 원경충조(圓徑冲照)라 하였다. 4월 신묘일(辛卯日)에 궁궐로 맞아들여 왕이 몸소 백관을 거느리고 구의(摳衣)의 예를 행하였다. 국사를 고쳐 국존이라 한 거은 원의 국사라는 칭호를 피하기 위한 것이다.  
 
|출처=조명제, "인각사 보각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5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8-19쪽.
 
|출처=조명제, "인각사 보각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5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8-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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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15일 (토) 17:24 판

일연(一然)
BHST Monk1.png
대표명칭 일연
한자 一然
생몰년 1206년(희종 2)-1289년(충렬왕 15)
시호 보각(普覺)
무극(無極), 목암(睦庵)
법호 견명(見明), 일연(一然)
탑호 정조(靜照)
회연(晦然), 일연(一然)
성씨 김씨
본관 경주(慶州)
출신지 경상북도 경산
승탑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탑
승탑비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비



정의

고려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일연은 1206년(희종 2) 경주의 속현이었던 장산군(章山郡)에서 아버지 김언필(金彦弼)과 어머니 이씨(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1]

Quote-left.png 국존의 이름은 견명(見明)이며, 자는 회연(晦然)이나 뒤에 이름을 일연(一然)으로 바꾸었다. 속성은 김씨이고, 경주 장산군 사람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언필(彦弼)인데, 벼슬하지 않았으나 국존으로 인해 좌복야()에 추증()되었다. 어머니 이씨(李氏)는 낙랑군부인()에 봉해졌다. 일찍이 어머니가 집에 해가 들어와 그 빛이 사흘 밤 동안 배를 비춘 꿈을 꾸고 이로 말미암아 임신하여 태화() 병인년() 6월 신유일()에 낳았다. 나면서부터 걸출하여 언행과 외모가 단정하고 엄숙하였으며, 넉넉한 몸매에 말수가 적었고 소와 같이 성실하고 호랑이와 같이 예리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조명제, "인각사 보각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5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6쪽.


출가수행

1214년(고종 1) 해양(海陽)에 있던 무량사(無量寺)에서 학문을 익혔고, 1219년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출가하여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어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여러 곳의 선문(禪門)을 방문하면서 수행하였다.[2]

Quote-left.png 어릴 때부터 세속을 떠날 뜻이 있어 9세 때에 해양(海陽) 무량사(無量寺)로 가서 의탁하여 비로소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총명함이 비길 자가 없었다. 때로 밤이 새도록 정좌하니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흥정(興定) 기묘년(己卯年)에 진전사(陳田寺)의 대웅장로(大雄長老)에게 나아가 삭발하고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이로부터 선찰을 다녔는데 명성이 점점 높아져서 사람들이 추대하여 구산(九山) 사선(四選)의 우두머리로 삼았다. Quote-right.png
출처: 조명제, "인각사 보각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5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6-17쪽.


활동

일연은 1227년(고종 14) 승과(僧科)의 선불장(選佛場)에 응시하여 장원에 급제하였다. 그 뒤 비슬산(琵瑟山)의 보당암(寶幢庵)에서 수년 동안 참선에 몰두하였다.[3]

Quote-left.png 정해년(丁亥年) 겨울 선불장(選佛場)에 나아가 상상과(上上科)로 합격하였다. 그 후 포산(包山) 보당암(寶幢庵)에 주석하면서 마음을 선관(禪觀)에 두었다. Quote-right.png
출처: 조명제, "인각사 보각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5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7쪽.


일연은 1236년(고종 23) 몽고군의 침입을 피해 거처할 곳을 찾다가 무주암(無住庵)에 머물라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의 계시를 받고, 1237년 무주암으로 옮겼다. 거기서 '현상계(現象界)가 줄어들지도 않고 본체계(本體界)가 늘어나지도 않는다(生界不減 佛界不增)'는 말을 화두로 삼아 정진하다가 마침내 도를 깨달았다. 이 해에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고, 1246년(고종 33)에 선사(禪師)가 되었다.[4]

Quote-left.png 병신년(丙申年) 가을에 병란이 있어 스님께서 피할 곳을 찾고자 하여 문수(文殊)의 오자주(五字呪)를 염송하면서 감응을 기원하였더니, 홀연히 벽 사이에서 문수보살이 나타나 "무주(無住)에 머물러라"라고 하였다. 다음해 여름에 다시 이 포산 묘문암(妙門庵)에 머물렀다. 암자 북쪽에 무주(無住)라는 난야(蘭若)가 있었다. 대사가 곧 이전의 문수보살의 기별을 깨닫고 그 암자에 머물면서 항상 '중생계가 줄지 않고, 불계(佛界)가 늘지 않는다'라는 화두를 참구하다가 어느 날 홀연히 활짝 의문이 풀리면서 크게 깨달았다.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에야 비로소 삼계(三界)가 환몽(幻夢)과 같음을 알았고, 대지에 작은 터럭만큼의 장애도 없음을 보았다"라고 하였다. 이 해에 삼중대사(三重大師)를 제수받고, 병오년(丙午年)에 선사(禪師)를 더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조명제, "인각사 보각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5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7쪽.


일연은 1249년(고종 36) 정안(鄭晏)이 세운 남해 정림사(定林寺)의 주지로 취임하였는데, 그곳에 머물면서 남해의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 작업에 약 3년 동안 참여하였다. 1256년(고종 43) 윤산(輪山) 길상암(吉祥庵)에서 『중편조동오위(重編曺洞五位)』를 편찬하였고, 1259년(고종 46)에는 대선사(大禪師)가 되었으며, 1260년(원종 1)에는 『중편조동오위』의 서문을 썼다. 1261년(원종 2)에 왕명을 받고 당시 수도였던 강화도의 선월사(禪月社)에 주석하면서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의 법통을 계승하였다.[5][6]

Quote-left.png 기유년(己酉年)에 상국(相國)인 정안(鄭晏)이 남해(南海)의 사제(私第)를 희사하여 정림사(定林寺)라는 절을 만들고 대사를 주지로 모셨다. 기미년(己未年)에 대선사(大禪師)의 법계를 받았다. 중통(中統) 신유년(辛酉年)에 왕명을 받들어 서울로 가서 선월사(禪月社)에 머물면서 개당(開堂)하고 목우화상(牧牛和尙)을 계승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조명제, "인각사 보각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5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7쪽.


일연은 1264년(원종 5) 경상북도 영일군 운제산(雲梯山)에 있던 오어사(吾魚寺)로 옮겨갔으며, 비슬산 인홍사(仁弘寺)의 주지가 되어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1268년(원종 9)에는 조정에서 베푼 대장경(大藏經) 조조(彫造) 낙성법회(落成法會)를 주관하였다.[7] 1274년(원종 15) 비슬산에 있는 인홍사(仁弘社)를 확대 중건하고 조정에 보고하자, 원종은 절 이름을 인흥사(仁興寺)로 바꾸고 친필 현판을 하사했다. 또한 일연은 비슬산 동쪽 기슭의 용천사(湧泉寺)를 중수하고 불일사(佛日寺)로 이름을 바꾼 뒤, 「불일결사문(佛日結社文)」을 썼다.[8]

Quote-left.png 지원(至元) 원년(元年) 가을에 이르러 남쪽으로 돌아가기를 여러 번 청하여 오어사(吾魚社)에 머물렀다. 얼마 후에 인홍사(仁弘社) 주지인 만회(萬恢)가 대사에게 주지의 자리를 사양하니 배우고자 하는 무리가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무진년(戊辰年) 여름에 왕명에 따라 선종과 교종의 명망있는 승려 100명을 모아 대장낙성회(大藏落成法會)를 운해사(雲海寺)에 개설하고, 대사를 주맹(主盟)으로 모셨다. 낮에는 불경을 읽고 밤에는 종취(宗趣)를 담론하니, 제가(諸家)들이 의심하던 바를 대사가 모두 물 프르듯이 자세히 풀어주고 정미로운 뜻이 신통한 경지에 들어, 공경하고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대사가 인홍사에 11년간 머물렀는데, 절을 지은 것이 이미 오래되어 전각이 모두 낡고, 또 지대가 낮고 좁았으므로 중수(重修)하거나 새로 지었다. 이에 조정에 아뢰니 인흥(仁興)으로 이름을 고치고, 어필(御筆)로 제액(題額)을 써서 하사하였다. 또 포산의 동쪽 기슭에 있는 용천사(涌泉寺)를 중수하여 불일사(佛日社)로 이름을 고쳤다. Quote-right.png
출처: 조명제, "인각사 보각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5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7-18쪽.


1277년(충렬왕 3)부터 1281년까지 운문사(雲門寺)에서 살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다. 이 때 『삼국유사』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281년 경주에 행차한 충렬왕에게로 가서, 불교계의 타락상과 몽고의 병화로 불타 버린 황룡사의 모습을 목격하였다. 1282년 충렬왕에게 선(禪)을 설하고 개경의 광명사(廣明寺)에 머물렀다. 다음 해, 국존(國尊)으로 책봉되어 원경충조(圓經冲照)라는 호를 받았으며, 왕의 거처인 대내(大內)에서 문무백관을 거느린 왕의 구의례(摳衣禮:옷의 뒷자락을 걷어 올리고 절하는 예)를 받았다.[9]

Quote-left.png 왕이 즉위한지 4년 정축(丁丑)에 왕명을 내려 운문사(雲門寺)에 머무르게 하니 현풍(玄風)을 크게 천양(闡揚)하였다. 왕이 날로 깊이 마음을 기울이더니 시를 부쳐 이르기를, "비밀리에 전함에 어찌 반드시 구의(摳衣)를 고치리오. 금지(金地)에 만나 부름이 또한 기이하도다. 그대를 대궐 아래에 맞아 들이고자 하는데 대사는 어찌 백운(白雲)의 가지에 길이 애태우는가?"라고 하였다.

신사년(辛巳年) 여름에 일본 정벌로 말미암아 경주로 행차하여 명을 내려 대사를 행재소(行在所)에 오게 하였다. 대사가 이르자 자리에 오르기를 청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배로 생겼다. 이로 말미암아 대사의 불일결사문(佛日結社文)을 취하여 운을 찍고 제압(題押)하여 불일사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다음해 가을 장작윤 김군(金頵)을 근시장(近侍將)으로 삼아 조서(詔書)를 보내어 맞으니 대궐에 이르렀다. 대전(大殿)으로 청하여 선(禪)을 설법하니 기쁨이 용안(龍顔)에 넘쳤으며, 유사(有司)에 칙명을 내려 광명사(廣明寺)에 머물게 하였다. 원(院)에 들어가던 날 밤에 어떤 사람이 방장(方丈) 밖에 서서 "잘 오셨습니다"라고 세 번 말하였는데 살펴보니 아무도 없었다. 겨울 12월에 왕이 몸소 찾아와 법요(法要)를 자문하였다.

다음해 봄에 왕이 군신(群臣)에게 이르기를 "우리 선왕께서 모두 불교의 덕이 높은 이를 왕사로 삼으셨고 덕이 더욱 큰 이를 국사로 삼으셨는데, 과인만이 유독 없으면 옳겠는가? 지금 운문화상(雲門和尙)은 도가 높고 덕이 커서 사람들이 모두 추앙하니, 어찌 과인만이 홀로 인자한 은택을 입는 것이 옳겠는가? 마땅히 한 나라와 함께 누려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우승지(右承旨) 염승익(廉承益)을 보내어 왕명을 받들어 합국존사(闔國尊師)의 예를 행하기를 청하였으나 대사는 표문을 올려 굳게 사양하였다. 왕이 다시 사신을 보내어 세 번이나 간청하였다. 상장군(上將軍) 나유(羅裕) 등을 보내어 국존(國尊)으로 책봉하고, 호를 원경충조(圓徑冲照)라 하였다. 4월 신묘일(辛卯日)에 궁궐로 맞아들여 왕이 몸소 백관을 거느리고 구의(摳衣)의 예를 행하였다. 국사를 고쳐 국존이라 한 거은 원의 국사라는 칭호를 피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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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명제, "인각사 보각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5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18-19쪽.


1283년(충렬왕 9) 일연은 늙으신 어머니를 봉양해야 한다는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자 왕이 허락하고 근시(近侍) 좌랑(佐郞) 황수명(黃守命)에게 명령을 내려 호위하게 했다. 1284년(충렬왕 10) 어머니가 96세의 나이로 별세하자, 조정에서는 인각사를 일연이 머무를 곳으로 삼게 하고 100여 경(頃)의 토지를 하사했다. 인각사에 머물렀던 5년 동안 일연은 두 번에 걸쳐서 구산선문(九山禪門) 전체 모임을 열었는데, 사찰의 성대함이 근래에 없었던 일이었다 한다.[10]

입적

1289년(충렬왕 15) 7월 제자들과 선문답을 하며 담소를 나누다가 금강인(金剛印)을 맺고 입적하였으며, 향년은 84세, 법랍은 71세였다. 입적하던 해에 인각사 동쪽 언덕에 탑을 세웠으며, 시호는 보각(普覺)이고 탑호(塔號)는 정조(靜照)이다.[11]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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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1. 이종문, "일연", 『디지털청도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김상현, "일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1년 12월 21일.
  3. 김상현, "일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1년 12월 21일.
  4. 이종문, "일연", 『디지털청도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이종문, "일연", 『디지털청도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김상현, "일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1년 12월 21일.
  7. 김상현, "일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1년 12월 21일.
  8. 이종문, "일연", 『디지털청도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9. 김상현, "일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1년 12월 21일.
  10. 이종문, "일연", 『디지털청도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1. 김상현, "일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1년 12월 21일.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