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호우총 출토 청동 ‘광개토대왕’명 호우"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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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11일 (화) 18:04 판

틀:문화유산 유물정보

정의

1946년 5월 해방후 처음 국내학자들이 발굴조사 한 경주 노서동 호우총(140호 고분)에서 출토된 고구려의 청동 그릇으로 주물로 만들었으며 보물 제1878호이다.

내용

그릇의 몸체는 높이 10.3㎝, 입지름 22.9㎝, 바닥 지름 15㎝이며 몸체의 최대 지름은 23.8㎝이다. 뚜껑은 높이 9.1㎝, 입지름 22.8㎝, 꼭지 높이 3㎝로, 합(盒) 모양 청동 용기 중에서 비교적 큰 편에 속한다. 전체적으로는 옆으로 벌어진 납작한 모양이며 윗부분에서 안으로 약간 오므라든 형태이다.[1]
바닥에는 4행 4자씩 16자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이 명문으로 '3년전 승하한 광개토대왕을 추모하기 위해 을묘년 415년에 만든 열 번째 그릇' 임을 알 수 있다. 명문 상단에 보이는 '井'의 표시는 다른 고구려 유물에서 간혹 등장하는 기호로서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아직까지 명확히 규명되지 않고 있다.
호우총은 출토 토기로 보아 6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호우는 광개토대왕을 기념하는 의례행위에 사용하기 위해 고구려에서 만든 것으로, 만들어진지 약 백년이 지난 어느 시점에 비로소 무덤 속에 부장된 것이다. 호우가 만들어질 때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었던 신라내물왕의 왕자 복호(卜好)와 같은 인물이 가지고 들어 왔을 것으로 보고, 호우총의 피장자를 복호나 그 후손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 명문을 통해 삼국시대 고구려와 신라의 대외 교류나 정치적 관계를 살펴 볼 수 있는 중요한 유물로 평가받아 왔다. 또한 역사적 중요성과 함께 청동호우는 희소한 고구려 금속공예품이라는 점과 명문이 있어 정확한 제작연대를 유추할 수 있는 편년자료라는 점에서 그 가치는 높다.

시각자료

사진

영상


KBS역사추적, "역사추적-광개토대왕 호우 왜경주에 묻혔나',(방송일: 2009.01.10), YouTube, 작성일: 2017년 02월 21일.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고구려 경주 호우총 출토 청동 ‘광개토대왕’명 호우 A는 B을 제작하였다 415년
경주 호우총 출토 청동 ‘광개토대왕’명 호우 광개토대왕 A는 B과 관련이 있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415년 고구려가 경주 호우총 출토 청동 ‘광개토대왕’명 호우를 제작하였다
1946년 경주 호우총 출토 청동 ‘광개토대왕’명 호우가 발견되었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524131 126.980470 국립중앙박물관은 경주 호우총 출토 청동 ‘광개토대왕’명 호우을 소장하고 있다
35.840541 129.208748 경주 호우총 출토 청동 ‘광개토대왕’명 호우은 호우총에서 출토되었다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자원
  • "경주 호우총 출토 청동 광개토대왕명 호우", 『두피디아』online,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