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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17일 (화) 01:01 판
체징(體澄)() | |
대표명칭 | 체징(體澄) |
---|---|
영문명칭 | Chejing |
생몰년 | 804(애장왕 5)-880(헌강왕 6) |
시호 | 보조선사(普照禪師) |
휘 | 체징(體澄) |
탑호 | 창성(彰聖) |
성씨 | 김씨(金氏) |
출신지 | 웅진(熊津) |
승탑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 |
승탑비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
정의
신라시대의 승려
생애
웅진(공주 지역) 출신의 체징(體澄, 804~880)은 설악산에서 도의(道義)의 제자인 염거(廉居)에게 수학한 후 희강왕 2년(837)에 동료들과 함께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자신이 배웠던 선법이 중국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곧바로 귀국하여 장흥의 가지산 보림사에서 도의의 선풍을 선양하였는데, 이를 가지산문이라 불렀다. 왕실의 후원을 받았던 그의 문도는 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후 가지산문의 선맥은 고려말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에게도 이어졌다.[1]
출생
804년 웅진에서 출생하였다. 성씨는 김씨이며 이름은 체징이다.
유년시기
체징 선사는 체모가 크고 치아가 고르고, 금발이 특이하였다. 7, 8세가 되어서는 세속을 버리려고 하는 의지가 강해 양친이 부귀로 붙잡아 두기 어렵고 재색으로써도 얽맬 수 없음을 알아 출가하여 유학할 것을 허락하였다.
구족계를 받다
태화 정미년(827, 흥덕왕 2년)에 가양 협산 보원사에 이르러 구족계를 받다.
선(禪)을 배우다
도의선사가
순번 | 연 | 월 | 일 | 나이 | 사건내용 |
---|---|---|---|---|---|
1 | 804 | 1 | 웅진(熊津)에서 태어나다. | ||
2 | 827 | 24 | 가양 협산 보원사에서 구족계를 받다. | ||
3 | 837 | 34 | 정육(貞育), 허회(虛懷) 등과 함께 바닷길로 서쪽 중국에 들어갔다. | ||
4 | 840 | 37 | 평노사(平盧使)와 함께 신라에 돌아오다. | ||
5 | 858 | 2 | 55 | 무주(武州) 의 황학(黃壑)의 난약(蘭若)에 머무르다. | |
6 | 858 | 6 | 55 | 헌안대왕이 장사현(長沙縣) 부수(守副) 김언경을 보내 맞이하게 하였으나 사양했다. | |
7 | 858 | 10 | 55 | 헌안대왕이 승려, 속인 영암군 승정(僧正) 연훈법사(連訓法師), 풍선(馮瑄) 등을 보내 가지산사(迦智山寺)로 옮겨 거처할 것을 청하였다. | |
8 | 860 | 2 | 57 | 김언경이 제자의 예를 표하며 선사의 문하에 들어감. 개인의 재산을 내어 철근 2500근으로 노사나불 1구를 주조하여 가지산사에 장엄함. | |
9 | 880 | 4 | 13 | 77 | 누운채로 임종하다 |
관련항목
node | relation | node |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 는 -를 위한 비이다 | 체징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 | 는 -의 승탑이다 | 체징 |
체징 | 은 -로부터 수학했다 | 염거(廉居) |
형미(逈微) | 은 -로부터 수학했다 | 체징 |
체징 | 은 -을 중창하였다 | 장흥 보림사(長興 寶林寺) |
장흥 보림사(長興 寶林寺) | 는_-와_관련있다 | 가지산문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 는_-가_비문을_지었다 | 김영(金穎) |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長興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 는_-가_비문을_썼다 | 김원(金薳), 김언경(金彦卿) |
참고문헌
각주
- ↑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포교연구실, 불교사의 이해, (주)조계종출판사, 2014, 17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