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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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글씨는 북위의 묘지명과 [[왕희지|왕희지(王羲之)]], 그리고 [[우세남|우세남(虞世南)]] 등의 서풍들을 잘 융합하여 썼는데 필력이 뛰어나고, 결체가 조밀하여 빈틈이 없다. 또한 고박(古朴: 옛 풍미가 있어 질박함)과 신운(神韻: 신비롭고 고상한 운치)이 함께 어우러진 것으로서, 중국의 어느 명품에도 뒤지지 않을 만한 서격(書格)을 지니고 있다.<ref>선주선,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6419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1979년 보물 제658호로 지정되었다.</ins>
 
<ins>글씨는 북위의 묘지명과 [[왕희지|왕희지(王羲之)]], 그리고 [[우세남|우세남(虞世南)]] 등의 서풍들을 잘 융합하여 썼는데 필력이 뛰어나고, 결체가 조밀하여 빈틈이 없다. 또한 고박(古朴: 옛 풍미가 있어 질박함)과 신운(神韻: 신비롭고 고상한 운치)이 함께 어우러진 것으로서, 중국의 어느 명품에도 뒤지지 않을 만한 서격(書格)을 지니고 있다.<ref>선주선,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6419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1979년 보물 제658호로 지정되었다.</ins>
  
글씨에서는 힘이 느껴지고, 예스러운 순박함과 신비스러움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 중국의 어느 명품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품격을 지니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 이후까지 대적할 만한 것이 없을 만큼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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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에서는 힘이 느껴지고, 예스러운 순박함과 신비스러움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 중국의 어느 명품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품격을 지니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 이후까지 대적할 만한 것이 없을 만큼 돋보인다.<ref>서동형,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dataType=99&contents_id=GC01902004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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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
 
===비문===

2017년 6월 15일 (목) 17:14 판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忠州 靑龍寺址 普覺國師塔碑)
BHST Cheongnyongsaji Bogak stele.jpg
대표명칭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한자 忠州 靑龍寺址 普覺國師塔碑
이칭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융탑비(靑龍寺普覺國師定慧圓融塔碑)
주소 충북 충주시 소태면 오량리 산32-2번지
문화재 지정번호 보물 제658호
문화재 지정일 1979년 05월 22일
찬자 권근(權近)
서자 천택(天澤)[1]
각자 미상
서체 해서(楷書)
승려 혼수(混修)
건립연대 1394년
승탑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청룡사지(靑龍寺址)에 있는 고려 말 조선 초의 승려 보각국사 혼수(普覺國師 混修, 1320-1392)의 탑비.

내용

개요

이 비는 전체 높이 265.4cm, 비신 높이 232.2cm, 너비 115.5cm, 두께 19.6cm 이다.[2] 1394년(조선 태조 3) 문인선사 희달(希達)[3]조선 태조의 명을 받아 세운 것으로, 권근(權近)이 비문을 짓고 천택(天澤)이 글씨를 썼으며,[4] '보각국사지비(普覺國師之碑)'라는 제액(題額)이 새겨져있다.[5]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받침돌은 아무런 문양 없이 윗면에 2단각형의 괴임을 만들어 탑신을 받치고 있는 간결한 양식이다. 덮개돌 없이 비의 윗면 좌우 양측을 잘라낸 귀접이 형태의 비로서 한국 전통 양식의 석비 틀에서 벗어난 극히 간결한 수법의 석비이다.[6]

글씨는 북위의 묘지명과 왕희지(王羲之), 그리고 우세남(虞世南) 등의 서풍들을 잘 융합하여 썼는데 필력이 뛰어나고, 결체가 조밀하여 빈틈이 없다. 또한 고박(古朴: 옛 풍미가 있어 질박함)과 신운(神韻: 신비롭고 고상한 운치)이 함께 어우러진 것으로서, 중국의 어느 명품에도 뒤지지 않을 만한 서격(書格)을 지니고 있다.[7] 1979년 보물 제658호로 지정되었다.

글씨에서는 힘이 느껴지고, 예스러운 순박함과 신비스러움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 중국의 어느 명품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품격을 지니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 이후까지 대적할 만한 것이 없을 만큼 돋보인다.[8]

비문

비문은 보각국사의 생애와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보각국사는 어머니의 권유로 출가하여 22세에 승과에 급제한 후 금강산 등의 여러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수도하였다. 1370년(공민왕 19) 공부선장(工夫選長)에 뽑혔으나 거절하였고, 그 뒤 왕의 청으로 내불당(內佛堂)에서 왕에게 법을 가르쳤다. 1383년(우왕 9)에 국사(國師)가 되었으며, 1392년 73세로 청룡사(靑龍寺)에서 입적하였다.[9][10]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혼수 A는 B를 위한 비이다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충주 청룡사지 A는 B에 있다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충주 청룡사 A는 B에 있었다
충주 청룡사지 충주 청룡사 A는 B의 터이다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권근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천택 A는 B가 비문을 썼다
조선 태조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A는 B의 이름을 지었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1. 서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비문을 판독 번역한 이지관은 서자 이름 부분이 결락되어 알 수 없다고 하였으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문화재청 문화재검색의 설명에는 승려 천택이라 기술하고 있다.
  2.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융탑비", 금석문세부정보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3.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 탑비를 세운 문인 선사가 희진(希進)인지 희달(希達)인지에 대해서 이견이 있다. 비의 한자를 다르게 판독한 결과로 보인다. 조선 금석문 총람에서는 進으로 판독 하였으나,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online,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등의 문화재 설명에서는 達로 판독하고 있다.
  4.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문화재 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문화재청.
  5.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륭탑비",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6. 서동형,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7. 선주선,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8. 서동형,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9.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융탑비", 금석문세부정보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10. 선주선,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