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충주 억정사지 대지국사탑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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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는 비신 높이 267㎝, 너비 130㎝, 두께 24㎝ 이다. [[조선 태조]]의 명령으로 [[박의중|박의중(朴宜中)]]이 비문을 지었으며, [[선진|선진(旋軫)]]이 비문과 [[제액|전액(篆額)]]을 썼다. 1393년([[조선 태조|태조]] 2) 국사의 문인인 [[중윤|중윤(中允)]]이 비를 세우고, [[혜공|혜공(惠公)]]이 글씨를 새겼다.<ref>선주선,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6146 충주 억정사지 대지국사탑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이 비는 비신 높이 267㎝, 너비 130㎝, 두께 24㎝ 이다. [[조선 태조]]의 명령으로 [[박의중|박의중(朴宜中)]]이 비문을 지었으며, [[선진|선진(旋軫)]]이 비문과 [[제액|전액(篆額)]]을 썼다. 1393년([[조선 태조|태조]] 2) 국사의 문인인 [[중윤|중윤(中允)]]이 비를 세우고, [[혜공|혜공(惠公)]]이 글씨를 새겼다.<ref>선주선,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6146 충주 억정사지 대지국사탑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비의 덮개돌 없이 비신(碑身) 위쪽의 양 모서리를 길이 44㎝ 정도 잘라낸 귀접이(圭角) 모양을 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받침돌은 아무런 문양 없는 장방형(長方形)이다. 받침돌은 비공(碑空) 가까이에서 약간 높게 2단으로 괴임 장치를 만들어 비신을 잘 지탱하도록 했다.<ref>서동형,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dataType=99&contents_id=GC01902006 충주 억정사지 대지국사탑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향토문화전자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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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사각형의 비받침 위에, 비문을 새긴 몸돌이 올려진 단순한 형태로, 몸돌 윗쪽의 양 끝을 사선으로 잘라냈을 뿐 다른 꾸밈은 없다. 비몸돌의 네 면에는 [[해서|해서체(楷書體)]]로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 비는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걸친 과도기적 작품으로, 조형상으로는 간략한 형식이다.<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00160000,33 충주 억정사지 대지국사탑비],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
 
 
글씨는 당시 [[송설체|송설체(松雪體)]]가 유행할 때였으나, 그 영향은 전혀 보이지 않고 [[왕희지|왕희지(王羲之)]]의 법을 잘 체득한 것으로서 [[구양순|구양순(歐陽詢)]]과 [[우세남|우세남(虞世南)]]의 법을 겸수한 듯한 느낌이 든다. 필력이 굳세고 결구도 잘된 작품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송설체]]가 크게 유행하면서 점점 서격(書格)떨어지게 되는데, 이 비는 그 과도기의 것으로 고려시대의 여운이 남아 있는 마지막 글씨 중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ref>선주선,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6146 충주 억정사지 대지국사탑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font color="green">직사각형의 비받침 위에, 비문을 새긴 몸돌이 올려진 단순한 형태로, 몸돌 윗쪽의 양 끝을 사선으로 잘라냈을 뿐 다른 꾸밈은 없다. 비몸돌의 네 면에는 해서체로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 비는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걸친 과도기적 작품으로, 조형상으로는 간략한 형식이다. </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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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

2017년 6월 15일 (목) 15:25 판

충주 억정사지 대지국사탑비
(忠州 億政寺址 大智國師塔碑)
"충주 억정사지 대지국사탑비",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문화재청.
대표명칭 충주 억정사지 대지국사탑비
한자 忠州 億政寺址 大智國師塔碑
이칭 대지국사지감원명탑비(大智國師碑銘智鑑圓明塔碑)
주소 충북 충주시 엄정면 비석2길 35-21 (괴동리)
문화재 지정번호 보물 제16호
문화재 지정일 1963년 01월 21일
찬자 박의중(朴宜中)
서자 선진(旋軫)
각자 혜공(惠公)
서체 해서(楷書)
승려 찬영(粲英)
건립연대 1393년



정의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억정사(億政寺)에 있었던 고려시대의 승려 대지국사 찬영(大智國師 粲英, 1328-1390)의 탑비.

내용

개요

이 비는 비신 높이 267㎝, 너비 130㎝, 두께 24㎝ 이다. 조선 태조의 명령으로 박의중(朴宜中)이 비문을 지었으며, 선진(旋軫)이 비문과 전액(篆額)을 썼다. 1393년(태조 2) 국사의 문인인 중윤(中允)이 비를 세우고, 혜공(惠公)이 글씨를 새겼다.[1]

직사각형의 비받침 위에, 비문을 새긴 몸돌이 올려진 단순한 형태로, 몸돌 윗쪽의 양 끝을 사선으로 잘라냈을 뿐 다른 꾸밈은 없다. 비몸돌의 네 면에는 해서체(楷書體)로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 비는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걸친 과도기적 작품으로, 조형상으로는 간략한 형식이다.[2]

비문

비문은 대지국사(大智國師)의 생애를 기록하고 있다. 국사는 14세에 중흥사에서 출가하여 원증국사 보우(圓證國師 普愚)의 제자가 되었고, 22세 나이에 승과시험에 합격하였다. 우왕창왕대에 왕사(王師)로 책봉되었으며, 이후 1390년(공양왕 2년) 63세에 입적하였다. 비문의 처음에 원증국사 보우의 많은 제자 중 하나라는 점을 강조한 점이 특이하다.[3]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충주 억정사지 대지국사탑비 찬영 A는 B를 위한 비이다 1393년
충주 억정사지 대지국사탑비 박의중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충주 억정사지 대지국사탑비 선지 A는 B가 비문을 썼다
충주 억정사지 대지국사탑비 혜공 A는 B가 비문을 새겼다
충주 억정사지 대지국사탑비 충주 억정사지 A는 B에 있다
조선 태조 충주 억정사지 대지국사탑비 A는 B의 이름을 지었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 차후 있을 답사 후 보완..

갤러리

영상

주석

  1. 선주선, "충주 억정사지 대지국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충주 억정사지 대지국사탑비,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문화재청.
  3. 이지관, "충주 억정사 대지국사 지감원명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3, 2-27쪽.

참고문헌

  • 이지관, "충주 억정사 대지국사 지감원명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3, 2-27쪽.
  • 서동형, "충주 억정사지 대지국사탑비", 『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선주선, "충주 억정사지 대지국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