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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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는 높이 151㎝, 너비 21㎝ 이다. [[고려 우왕|우왕]]의 명령으로 [[이색|이색(李穡)]]이 비문을 짓고, 승려인 [[혜잠|혜잠(惠岑)]]이 각자하였으며, 글씨를 쓴 사람은 마멸로 알 수 없다.<ref>민백</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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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는 높이 151㎝, 너비 21㎝ 이다. [[고려 우왕|우왕]]의 명령으로 [[이색|이색(李穡)]]이 비문을 짓고, 승려인 [[혜잠|혜잠(惠岑)]]이 각자하였으며, 글씨를 쓴 사람은 마멸로 알 수 없다. 1386년(우왕 16)에 건립되었다.<ref>민백</ref>
  
 
직사각형의 비받침 위에 비몸돌을 세운 다음 지붕돌을 올려놓았다. 비문을 새긴 비몸돌은 마멸이 심하고 오른쪽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으며, 지붕돌은 경사면이 완만하다. 간략화된 고려 후기 석비의 형식을 보이고 있으며,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비(보물 제251호)와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 등과 비교할 만 하다.<ref>문화재청</ref> 글씨는 앞면의 자경은 2.2㎝, 후면은 1.5㎝이다. [[구양순체|구양순(歐陽詢) 서체]]에 근거를 두고 있으나 고려 초기·중기의 주경(遒勁: 붓의 힘이 굳셈)하고 금석기 있는 풍모가 거의 사라진 투박한 것으로서 고려 말의 글씨가 퇴보하였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전액]]의 자경은 6㎝이다.<ref>민백</ref>  1963년 보물 제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직사각형의 비받침 위에 비몸돌을 세운 다음 지붕돌을 올려놓았다. 비문을 새긴 비몸돌은 마멸이 심하고 오른쪽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으며, 지붕돌은 경사면이 완만하다. 간략화된 고려 후기 석비의 형식을 보이고 있으며,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비(보물 제251호)와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 등과 비교할 만 하다.<ref>문화재청</ref> 글씨는 앞면의 자경은 2.2㎝, 후면은 1.5㎝이다. [[구양순체|구양순(歐陽詢) 서체]]에 근거를 두고 있으나 고려 초기·중기의 주경(遒勁: 붓의 힘이 굳셈)하고 금석기 있는 풍모가 거의 사라진 투박한 것으로서 고려 말의 글씨가 퇴보하였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전액]]의 자경은 6㎝이다.<ref>민백</ref>  1963년 보물 제14호로 지정되어 있다.

2017년 6월 12일 (월) 23:44 판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
(水原 彰聖寺址 眞覺國師塔碑)
BHST Stele.png
대표명칭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
한자 水原 彰聖寺址 眞覺國師塔碑
이칭 창성사진각국사대각원조탑비(彰聖寺眞覺國師大覺圓照塔碑)
주소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수원천로392번길 372(매향동)
문화재 지정번호 보물 제14호
문화재 지정일 1963년 01월 21일
찬자 이색(李穡)
서자 미상
각자 혜잠(惠岑)
서체 해서(楷書)
승려 천희(千熙)
건립연대 1386년



정의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에 있는 고려시대의 승려 진각국사 천희(眞覺國師 千熙, 1307-1382)의 탑비.

내용

개요

이 비는 높이 151㎝, 너비 21㎝ 이다. 우왕의 명령으로 이색(李穡)이 비문을 짓고, 승려인 혜잠(惠岑)이 각자하였으며, 글씨를 쓴 사람은 마멸로 알 수 없다. 1386년(우왕 16)에 건립되었다.[1]

직사각형의 비받침 위에 비몸돌을 세운 다음 지붕돌을 올려놓았다. 비문을 새긴 비몸돌은 마멸이 심하고 오른쪽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으며, 지붕돌은 경사면이 완만하다. 간략화된 고려 후기 석비의 형식을 보이고 있으며,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비(보물 제251호)와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 등과 비교할 만 하다.[2] 글씨는 앞면의 자경은 2.2㎝, 후면은 1.5㎝이다. 구양순(歐陽詢) 서체에 근거를 두고 있으나 고려 초기·중기의 주경(遒勁: 붓의 힘이 굳셈)하고 금석기 있는 풍모가 거의 사라진 투박한 것으로서 고려 말의 글씨가 퇴보하였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전액의 자경은 6㎝이다.[3] 1963년 보물 제14호로 지정되어 있다.

비문

비문에는 진각국사가 13세(1320년)에 화엄종 반룡사(盤龍社) 주지인 일비대사(一非大師)에게 출가하여 76세(1382년)에 창성사(彰聖社)에서 입적하기까지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4] 진각국사의 휘는 천희(千熙), 호는 설산(雪山)으로 흥해(興海) 사람이다. 13세에 화엄반룡사(華嚴盤龍寺)일비(一非)를 사사하고, 여러 절을 다니며 수행하였으며, 원나라에 갔다가 귀국하여 치악산에 은거하였고, 부석사를 중수하였다. 그리고 공민왕은 사신을 보내 진각국사를 국사대화엄종사선교도총섭(國師大華嚴宗師禪敎都總攝)에 봉하고 이후 인장과 법의를 내렸다는 내용도 있다.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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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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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가상현실

  • 차후 있을 답사 후 보완..

갤러리

영상

주석

  1. 민백
  2. 문화재청
  3. 민백
  4. 이지관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