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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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철|수철화상(秀澈和尙)]]은 893년(진성왕 7) 5월 4일 입적하였는데, 탑비의 뒷면에 새겨진 음기(陰記)에 따르면, 탑비는 905년(효공왕 9) 10월 15일에 세워지고, 1714년(숙종 40)에 중건<ref>1714년 탑비가 중건된 사실과 관련하여, 원래의 비신을 다시 세운 것이라고 보는 의견(정선종, 하일식, 최경선)과, 다시 비신을 세우는 과정에서 비문을 새롭게 복각했을 것이라는 의견(추만호, 정병삼)이 있다.</ref>되었다.
 
[[수철|수철화상(秀澈和尙)]]은 893년(진성왕 7) 5월 4일 입적하였는데, 탑비의 뒷면에 새겨진 음기(陰記)에 따르면, 탑비는 905년(효공왕 9) 10월 15일에 세워지고, 1714년(숙종 40)에 중건<ref>1714년 탑비가 중건된 사실과 관련하여, 원래의 비신을 다시 세운 것이라고 보는 의견(정선종, 하일식, 최경선)과, 다시 비신을 세우는 과정에서 비문을 새롭게 복각했을 것이라는 의견(추만호, 정병삼)이 있다.</ref>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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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의 찬자·서자·각자는 알 수 없으며, 비문에는 관직명만이 남아 있다. 일각에서는 비문의 찬자를 [[최치원|최치원(崔致遠)]]으로 추정하기도 한다.<ref>추만호. 그러나 세련되고 정제된 변려문의 진수를 보여주는 최치원의 글과 비교하여 수철화상탑비의 수준이 떨어진다는 반론이 있다. 또한 최치원은 898년 정월 해인사 중창과 관련된 글을 찬술한 시점에는 사실상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던 상태로 추정되기 때문에 904~905년 사이에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되고 또 비문을 작성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반론이 있다.(최경선, 220-221쪽.)</ref> 비문의 글씨는 당대를 전후하여 성행한 [[구양순체|구양순체(歐陽詢體)]]를 따랐다.<ref>문화재청,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00340000,35 </ref>
  
 
탑비의 형식은 당시의 일반적인 탑비 형식과 달리 [[귀부|귀부(龜趺)]]가 없고 대신 안상(眼象) 6구를 새긴 장방형의 대석 위에 비를 세웠으며, 비좌(碑座)에는 큼직한 복련(覆蓮)을 둘렀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3665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04월 12일.</ref> [[이수|이수]]에는 여의주를 중심으로 다투는 듯 두 마리의 용이 좌우 대칭으로 자리 잡고 그 사이를 운문(雲文)으로 채운 형태가 전후면에 거의 동일하게 나타난다. 전면에는 ⌂형으로 액(額)을 마련 후 '능가보월탑비(楞迦寶月塔碑)' 라는 전액(篆額)을 새겼다.<ref>"[http://portal.nrich.go.kr/kor/stoneUserView.do?menuIdx=738&stone_idx=156 건조물문화재(석조) 정기조사서]", <html><online style="color:purple">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sup>online</sup></online></html>, 국립문화재연구소. 최종확인:2017년 4월 12일.</ref>
 
탑비의 형식은 당시의 일반적인 탑비 형식과 달리 [[귀부|귀부(龜趺)]]가 없고 대신 안상(眼象) 6구를 새긴 장방형의 대석 위에 비를 세웠으며, 비좌(碑座)에는 큼직한 복련(覆蓮)을 둘렀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3665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04월 12일.</ref> [[이수|이수]]에는 여의주를 중심으로 다투는 듯 두 마리의 용이 좌우 대칭으로 자리 잡고 그 사이를 운문(雲文)으로 채운 형태가 전후면에 거의 동일하게 나타난다. 전면에는 ⌂형으로 액(額)을 마련 후 '능가보월탑비(楞迦寶月塔碑)' 라는 전액(篆額)을 새겼다.<ref>"[http://portal.nrich.go.kr/kor/stoneUserView.do?menuIdx=738&stone_idx=156 건조물문화재(석조) 정기조사서]", <html><online style="color:purple">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sup>online</sup></online></html>, 국립문화재연구소. 최종확인:2017년 4월 12일.</ref>
 
비문의 글씨는 당대를 전후하여 성행한 [[구양순체|구양순체(歐陽詢體)]]를 따랐다.<ref>문화재청,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00340000,35 </ref>
 
 
비문의 찬자·서자·각자는 알 수 없으며, 비문에는 관직명만이 남아 있다. 일각에서는 비문의 찬자를 [[최치원|최치원(崔致遠)]]으로 추정하기도 한다.<ref>추만호. 그러나 세련되고 정제된 변려문의 진수를 보여주는 최치원의 글과 비교하여 수철화상탑비의 수준이 떨어진다는 반론이 있다. 또한 최치원은 898년 정월 해인사 중창과 관련된 글을 찬술한 시점에는 사실상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던 상태로 추정되기 때문에 904~905년 사이에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되고 또 비문을 작성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반론이 있다.(최경선, 220-221쪽.)</ref>
 
  
 
===비문===
 
===비문===

2017년 6월 11일 (일) 15:58 판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
(南原 實相寺 秀澈和尙塔碑)
BHST Stele.png
대표명칭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
한자 南原 實相寺 秀澈和尙塔碑
이칭 실상사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
주소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길 94-129(입석리) 실상사
문화재 지정번호 보물 제34호
문화재 지정일 1963년 1월 21일
서체 해서(楷書)
승려 수철
건립연대 905년
승탑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


정의

전라남도 남원시 산내면 실상사(實相寺)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수철(秀澈, 817-893)의 탑비.

내용

개요

탑비는 대석(臺石), 비신(碑身), 이수(螭首)로 구성되어 있다.

수철화상(秀澈和尙)은 893년(진성왕 7) 5월 4일 입적하였는데, 탑비의 뒷면에 새겨진 음기(陰記)에 따르면, 탑비는 905년(효공왕 9) 10월 15일에 세워지고, 1714년(숙종 40)에 중건[1]되었다.

비문의 찬자·서자·각자는 알 수 없으며, 비문에는 관직명만이 남아 있다. 일각에서는 비문의 찬자를 최치원(崔致遠)으로 추정하기도 한다.[2] 비문의 글씨는 당대를 전후하여 성행한 구양순체(歐陽詢體)를 따랐다.[3]

탑비의 형식은 당시의 일반적인 탑비 형식과 달리 귀부(龜趺)가 없고 대신 안상(眼象) 6구를 새긴 장방형의 대석 위에 비를 세웠으며, 비좌(碑座)에는 큼직한 복련(覆蓮)을 둘렀다.[4] 이수에는 여의주를 중심으로 다투는 듯 두 마리의 용이 좌우 대칭으로 자리 잡고 그 사이를 운문(雲文)으로 채운 형태가 전후면에 거의 동일하게 나타난다. 전면에는 ⌂형으로 액(額)을 마련 후 '능가보월탑비(楞迦寶月塔碑)' 라는 전액(篆額)을 새겼다.[5]

비문

비문에는 수철의 출생에서 입적 및 조탑(造塔) 경위까지 기록되어 있는데, 실상사에서 수철이 입적하였으나, 원래는 심원사(深源寺)의 승려이었기 때문에 비문에는 '심원사□□□국사수철화상(深源寺□□□國師秀澈和尙)'으로 쓰여 있다.[6]

비문은 마멸과 결락이 심하여 판독에 어려움이 많으며, 그로 인해 연구자마다 각기 다른 판독문을 제시하고 있다.[7] 비문은 비신 앞부분의 제목부터 찬자·서자·각자를 기록한 몇 행들이 흐트러져 있으며, 제목을 새긴 첫 행을 독립시키지 않고 그 아래에 서자 또는 각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관직명이 새겨져 있고, 행 머리와 중간에 여백을 둔 곳들이 많다.[8] 또한 이우(李俁)가 편찬한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는 수철화상탑비의 탁본이 남아 있는데, 그 중에는 현재 비석에서는 볼 수 없는 글자 20자가 포함되어 있다.[9]

또한 비문에는 수철의 문하제자인 음광(飮光)이 비석 건립을 위한 자료를 모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Quote-left.png 문하제자 비구 음광(飮光)이 글을 모으고…(門下弟子比丘飮光咠十)[10] Quote-right.png
출처: 하일식, 21쪽.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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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1. 1714년 탑비가 중건된 사실과 관련하여, 원래의 비신을 다시 세운 것이라고 보는 의견(정선종, 하일식, 최경선)과, 다시 비신을 세우는 과정에서 비문을 새롭게 복각했을 것이라는 의견(추만호, 정병삼)이 있다.
  2. 추만호. 그러나 세련되고 정제된 변려문의 진수를 보여주는 최치원의 글과 비교하여 수철화상탑비의 수준이 떨어진다는 반론이 있다. 또한 최치원은 898년 정월 해인사 중창과 관련된 글을 찬술한 시점에는 사실상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던 상태로 추정되기 때문에 904~905년 사이에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되고 또 비문을 작성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반론이 있다.(최경선, 220-221쪽.)
  3. 문화재청,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00340000,35
  4.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04월 12일.
  5. "건조물문화재(석조) 정기조사서",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최종확인:2017년 4월 12일.
  6. 민백,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
  7. 논문목록
  8. 하일식
  9. 최경선
  10. 종래의 연구에서는 "飮光" 다음에 오는 글자를 누락된 것으로 판단하여, 음광을 각자승(刻字僧)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서 "飮光" 다음에 오는 글자를 "咠十"로 판독할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음광이 자료를 모은 역할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정선종, 176쪽.)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