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관련항목) |
(→내용) |
||
25번째 줄: | 25번째 줄: | ||
=='''내용'''== | =='''내용'''== | ||
===개요=== | ===개요=== | ||
+ | |||
===탑비=== | ===탑비=== | ||
31번째 줄: | 32번째 줄: | ||
===비문=== | ===비문=== | ||
+ | 비신높이 263㎝, 너비 155㎝, 두께 43㎝. 국보 제8호. 전체 높이 4.55m에 달하는 거대한 외형에 듬직하고 아름다운 조각수법을 구사하여 신라시대 석비를 대표할 만하다. | ||
+ | |||
+ | 귀부의 일부에 손상이 있을 뿐 거의 완전한 상태로, 귀부의 구름무늬나 이수(螭首), 4면의 운룡문(雲龍文)은 생동감이 넘친다. 이수 앞면 중앙에 마련한 제액(題額)은 마멸되어 판독이 어렵다. | ||
+ | |||
+ | 비문에는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행적이 모두 5천여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적혀 있는데, 찬자(撰者)는 최치원(崔致遠)이며 글씨는 그의 종제 집사시랑(執事侍郎) 인연(仁兗)이 썼다. | ||
+ | |||
+ | 비문에는 건립연대가 밝혀져 있지 않은데, 낭혜화상이 입적한 2년 뒤에 부도(浮屠)를 쌓았다는 비문으로 보아 이 때 비문이 작성되고 비가 건립되었다고 추정된다. | ||
+ | |||
+ | 한편, 그 밖의 비문내용을 참고하여 효공왕대 초기에 비문이 작성되고 서자(書者)인 최인연이 909년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집사시랑이 된 이후에 비문이 쓰였고 비가 건립되었다는 설도 있다. | ||
+ | |||
+ | 최치원이 지은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로 유명한 이 비문은 신라의 골품과 고어(古語)를 연구하는 자료로서도 귀중하다. 글씨는 자경 2.5㎝의 해서로 최치원의 필의(筆意)를 지닌 구양통(歐陽通)류에 속한다. | ||
+ | |||
+ | 짜임새의 어색한 점 등이 최치원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나 필획의 크기에 변화를 주어 행서의 필의를 해서에 가미시킨 점은 독특하다.-민백 | ||
+ | |||
+ | 성주사지에서 가장 도드라진 유적은 낭혜화상탑비(국보 8호)다. 성주산문을 일으킨 무염대사를 기리기 위해 최치원이 왕명에 따라 비문을 지었다. 10세기 초 세워진 거북 받침돌 위 비석에는 무염대사의 일생과 업적, 성주사를 일으키고 선종을 전파한 내용이 낱낱이 적혔다. 비석의 재료로 성주산 일대에서 채취되는 남포오석을 사용해, 글자 하나하나가 큰 훼손 없이 보존되었다. 성주면 일대에서 나는 검은 돌(오석)은 최근에도 귀한 조각상을 만드는 데 이용된다. -구석구석 | ||
+ | |||
+ |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8호로 지정되었다. 총높이 4.55m, 비신 높이 2.63m, 탑신 너비 1.5m, 두께 0.43m이다. 890년(진성여왕 4) 건립되었다. 무염은 일찍이 당(唐)나라에 갔다가 20여 년 후에 귀국한 후 성주사에 있다가 입적(入寂)하였고, 왕이 시호(諡號)를 낭혜, 탑명을 백월보광으로 내렸다. | ||
+ | |||
+ | 비석의 귀부(龜趺) 및 이수(螭 首)는 화강석으로, 비신(碑身)은 흑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귀두(龜頭)는 괴수형(怪獸形)으로 세밀히 조각되어 있으며 등에는 귀갑(龜甲)무늬가 있고, 비좌(碑座) 4면에는 곽(郭) 내에 구름무늬가 조각된 안상(眼象)을 두고 밑에는 큼직한 구름무늬가 있다. 비신은 사각의 모를 죽였고, 이수는 밑에 앙련(仰蓮:꽃부리가 위로 향한 연꽃)을 새기고 4면에 운룡(雲龍)을 조각하였다. | ||
+ | |||
+ | 앞면에는 제액(題額)이 있으나 문자는 마멸되었다. 비문은 최치원(崔致遠)이 찬(撰)하고 최인연(崔仁渷 )이 썼으며 자경(字徑)은 1.5cm이다. 신라의 비석 중 최대의 거작으로 혼려(渾麗)한 조각수법은 신라 석비의 대표작품이라 할 만하다. - 두산 | ||
+ | |||
+ | 성주사터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탑비이다. | ||
+ | |||
+ | 낭혜화상은 무열왕의 8세손으로 애장왕 2년(801)에 태어나 열세 살 되던 해에 출가, 헌덕왕 13년(821)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수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문성왕 7년(845)에 귀국하여 당시 웅천(지금의 보령)에 있던 오합사(烏合寺)의 주지가 되었다. | ||
+ | |||
+ | 이 절에서 선(禪)을 널리 알리고 점점 크게 번성하게 되자, 왕은 ‘성주사’라는 절 이름을 내려주었으며, 진성여왕 2년(888) 89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낭혜’라 하고, 탑 이름을 ‘백월보광’이라 내리었다. | ||
+ | |||
+ | 절터 서북쪽에 세워진 이 비는 거북 모습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받침돌이 심하게 부서진 채 흙에 묻혀 있던 것을 1974년에 해체·보수하였다. | ||
+ | |||
+ | 얼굴의 일부분이 깨져 있는 거북은 머리 위쪽에 둥근 뿔이 나 있고, 뒤로 째진 눈에는 눈썹이 휘말려 있으며, 입은 마치 불을 내뿜으려는 기세이다. 등에는 선명한 이중의 육각무늬를 새기고, 중앙에는 제법 굵직한 구름무늬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구름무늬 위로는 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을 높게 마련하여 각 면을 장식하였다. 길다란 비몸은 앞면에만 비문을 새기고, 위쪽 양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놓았다. 맨 위에 올려진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을 두르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이 서로 뒤엉킨 장면을 입체적으로 조각하였는데, 힘찬 용틀임과 웅장한 기상이 잘 나타나 있다. 앞면에는 받침돌의 거북머리와 같은 방향으로 용머리가 툭 불거져 나와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 ||
+ | |||
+ | 비문에는 낭혜화상의 업적이 자세히 적혀 있는데, 진골이던 낭혜화상의 가문이 아버지 대에 이르러 6두품의 신분으로 낮아지는 대목도 나타나 있어 당시 신라골품제도의 연구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최치원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인 최인곤이 글씨를 썼으며, 비를 세운 시기는 적혀 있지 않으나, 낭혜화상이 입적한 지 2년 후인 진성여왕 4년(890)에 그의 사리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이 때 비도 함께 세웠을 것으로 보고 있다. | ||
+ | |||
+ |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탑비 중에서 가장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며, 화려하고 아름다운 조각솜씨가 작품속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어 통일신라시대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문화재청 | ||
+ | |||
+ | <ref>김세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9587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 | |||
+ | <ref>"[http://korean.visitkorea.or.kr/kor/bz15/travel/theme/recom_content/cms_view_2370952.jsp 허물어진 절터에서 온기를 느끼다, | ||
+ | 보령 성주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대한민국 구석구석』<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관광공사.</ref> | ||
+ | |||
+ | <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1,00080000,34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 | ||
=='''지식관계망'''== | =='''지식관계망'''== |
2017년 6월 1일 (목) 10:38 판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保寧 聖住寺址 郎慧和尙塔碑) |
|
대표명칭 |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
---|---|
영문명칭 | Stele for Buddhist Monk Nanghye at Seongjusa Temple Site, Boryeong |
한자 | 保寧 聖住寺址 郎慧和尙塔碑 |
이칭 | 낭혜화상비,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
주소 |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80-5 |
문화재 지정번호 | 국보 제8호 |
문화재 지정일 | 1962년 12월 20일 |
찬자 | 최치원(崔致遠) |
서자 | 최인연(崔仁渷) |
승려 | 무염(無染) |
|
정의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에 있는 통일신라 말의 승려 무염(無染)의 탑비.[1]
내용
개요
탑비
비문
비신높이 263㎝, 너비 155㎝, 두께 43㎝. 국보 제8호. 전체 높이 4.55m에 달하는 거대한 외형에 듬직하고 아름다운 조각수법을 구사하여 신라시대 석비를 대표할 만하다.
귀부의 일부에 손상이 있을 뿐 거의 완전한 상태로, 귀부의 구름무늬나 이수(螭首), 4면의 운룡문(雲龍文)은 생동감이 넘친다. 이수 앞면 중앙에 마련한 제액(題額)은 마멸되어 판독이 어렵다.
비문에는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행적이 모두 5천여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적혀 있는데, 찬자(撰者)는 최치원(崔致遠)이며 글씨는 그의 종제 집사시랑(執事侍郎) 인연(仁兗)이 썼다.
비문에는 건립연대가 밝혀져 있지 않은데, 낭혜화상이 입적한 2년 뒤에 부도(浮屠)를 쌓았다는 비문으로 보아 이 때 비문이 작성되고 비가 건립되었다고 추정된다.
한편, 그 밖의 비문내용을 참고하여 효공왕대 초기에 비문이 작성되고 서자(書者)인 최인연이 909년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집사시랑이 된 이후에 비문이 쓰였고 비가 건립되었다는 설도 있다.
최치원이 지은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로 유명한 이 비문은 신라의 골품과 고어(古語)를 연구하는 자료로서도 귀중하다. 글씨는 자경 2.5㎝의 해서로 최치원의 필의(筆意)를 지닌 구양통(歐陽通)류에 속한다.
짜임새의 어색한 점 등이 최치원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나 필획의 크기에 변화를 주어 행서의 필의를 해서에 가미시킨 점은 독특하다.-민백
성주사지에서 가장 도드라진 유적은 낭혜화상탑비(국보 8호)다. 성주산문을 일으킨 무염대사를 기리기 위해 최치원이 왕명에 따라 비문을 지었다. 10세기 초 세워진 거북 받침돌 위 비석에는 무염대사의 일생과 업적, 성주사를 일으키고 선종을 전파한 내용이 낱낱이 적혔다. 비석의 재료로 성주산 일대에서 채취되는 남포오석을 사용해, 글자 하나하나가 큰 훼손 없이 보존되었다. 성주면 일대에서 나는 검은 돌(오석)은 최근에도 귀한 조각상을 만드는 데 이용된다. -구석구석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8호로 지정되었다. 총높이 4.55m, 비신 높이 2.63m, 탑신 너비 1.5m, 두께 0.43m이다. 890년(진성여왕 4) 건립되었다. 무염은 일찍이 당(唐)나라에 갔다가 20여 년 후에 귀국한 후 성주사에 있다가 입적(入寂)하였고, 왕이 시호(諡號)를 낭혜, 탑명을 백월보광으로 내렸다.
비석의 귀부(龜趺) 및 이수(螭 首)는 화강석으로, 비신(碑身)은 흑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귀두(龜頭)는 괴수형(怪獸形)으로 세밀히 조각되어 있으며 등에는 귀갑(龜甲)무늬가 있고, 비좌(碑座) 4면에는 곽(郭) 내에 구름무늬가 조각된 안상(眼象)을 두고 밑에는 큼직한 구름무늬가 있다. 비신은 사각의 모를 죽였고, 이수는 밑에 앙련(仰蓮:꽃부리가 위로 향한 연꽃)을 새기고 4면에 운룡(雲龍)을 조각하였다.
앞면에는 제액(題額)이 있으나 문자는 마멸되었다. 비문은 최치원(崔致遠)이 찬(撰)하고 최인연(崔仁渷 )이 썼으며 자경(字徑)은 1.5cm이다. 신라의 비석 중 최대의 거작으로 혼려(渾麗)한 조각수법은 신라 석비의 대표작품이라 할 만하다. - 두산
성주사터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낭혜화상 무염(無染)의 탑비이다.
낭혜화상은 무열왕의 8세손으로 애장왕 2년(801)에 태어나 열세 살 되던 해에 출가, 헌덕왕 13년(821)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수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문성왕 7년(845)에 귀국하여 당시 웅천(지금의 보령)에 있던 오합사(烏合寺)의 주지가 되었다.
이 절에서 선(禪)을 널리 알리고 점점 크게 번성하게 되자, 왕은 ‘성주사’라는 절 이름을 내려주었으며, 진성여왕 2년(888) 89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낭혜’라 하고, 탑 이름을 ‘백월보광’이라 내리었다.
절터 서북쪽에 세워진 이 비는 거북 모습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받침돌이 심하게 부서진 채 흙에 묻혀 있던 것을 1974년에 해체·보수하였다.
얼굴의 일부분이 깨져 있는 거북은 머리 위쪽에 둥근 뿔이 나 있고, 뒤로 째진 눈에는 눈썹이 휘말려 있으며, 입은 마치 불을 내뿜으려는 기세이다. 등에는 선명한 이중의 육각무늬를 새기고, 중앙에는 제법 굵직한 구름무늬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구름무늬 위로는 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을 높게 마련하여 각 면을 장식하였다. 길다란 비몸은 앞면에만 비문을 새기고, 위쪽 양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놓았다. 맨 위에 올려진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을 두르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이 서로 뒤엉킨 장면을 입체적으로 조각하였는데, 힘찬 용틀임과 웅장한 기상이 잘 나타나 있다. 앞면에는 받침돌의 거북머리와 같은 방향으로 용머리가 툭 불거져 나와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비문에는 낭혜화상의 업적이 자세히 적혀 있는데, 진골이던 낭혜화상의 가문이 아버지 대에 이르러 6두품의 신분으로 낮아지는 대목도 나타나 있어 당시 신라골품제도의 연구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최치원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인 최인곤이 글씨를 썼으며, 비를 세운 시기는 적혀 있지 않으나, 낭혜화상이 입적한 지 2년 후인 진성여왕 4년(890)에 그의 사리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이 때 비도 함께 세웠을 것으로 보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탑비 중에서 가장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며, 화려하고 아름다운 조각솜씨가 작품속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어 통일신라시대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문화재청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 보령 성주사지 | A는 B에 있다 | |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 무염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 최치원 |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 |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 최인연 | A는 B가 비문을 썼다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두산백과』online . - ↑ 김세호,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http://korean.visitkorea.or.kr/kor/bz15/travel/theme/recom_content/cms_view_2370952.jsp 허물어진 절터에서 온기를 느끼다,
보령 성주사지]",
『대한민국 구석구석』online , 한국관광공사. - ↑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