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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 =='''개요'''== |
− |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은 조선 후기 [[유재건|유재건(劉在建)]]이 저술한 중인층 이하 출신의 인물들에 대한 행적기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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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총10권 3책으로, 양반 신분이 아닌 향리에 묻혀 있는 인물로서 학문이나 서화, 예능 및 어떤 한 분야에 뛰어난 재주를 지녔던 혹은 충효와 절개 같은 유교적 덕목에 있어 사람들에게 널리 알릴 만한 행적을 남긴 인물 308명의 행적을 52종의 책에서 뽑아 수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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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 | | =='''내용'''== |
− | 저자 유재건은 1793년에 태어나 1880년까지 살았으며, 원래는 양반의 후손이나 가세가 기울어 서리(胥吏) 계급으로 전락한 인물이었다. 서리이면서도 시문에 능하고 명필이어서 규장각에 봉직하면서 국왕들의 어필을 모아 《열성어제(列聖御製)》를 편찬했고, 《이향견문록》보다 앞서 이미 철종 8년(1857년) 최경흠(崔景欽)과 더불어 위항시인(委巷詩人) 305명의 한시 작품을 모은 《풍요삼선(風謠三選)》을 편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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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찬 시기는 분명하게 밝혀져 있지 않으며, 《호산외기(壺山外記)》의 저자이기도 한 조희룡(趙熙龍)이 철종 13년(1862년)에 쓴 서문으로 미루어 대략 서문이 지어진 시기를 전후해 완성되었을 것으로만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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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권 3책. 권수에 ≪호산외기 壺山外記≫의 작자 조희룡(趙熙龍)이 1862년(철종 13)에 쓴 서문이 있어 그 이전에 저술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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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자는 옥천부원군 창(敞)의 후손이나, 중간에 가세가 몰락해 서리(胥吏) 계급으로 전락한 인물이다. 시문에 능하고 글씨도 명필이어서 서리로 규장각에 봉직하면서 열성어제(列聖御製)를 편찬했고, 개인적으로 법어(法語)와 풍요삼선(風謠三選)을 편술하였다. 뒤에 상호군의 벼슬이 특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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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희룡의 서문에 의하면 저자가 ‘금강산의 절경을 탐승하고, 그처럼 절경이 심산유곡에 파묻혀 있듯이 이항(里巷)에 묻혀 있는 유능한 인사들도 많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많은 책을 참고해 284항에 걸쳐 조선 초기 이래의 하층계급 출신으로 각 방면에 뛰어난 인물의 행적을 기록하였다.’ 한다. 이 책을 쓰기 위해 인용한 서책은 52종이고, 수록 인물은 모두 308명이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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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수에 조희룡의 서(序)가 있고, 다음에 저자의 <이향견문록의례 里鄕見聞錄義例>와 목차, 그리고 인용서목의 순으로 배열한 다음 권1∼3, 권4∼6, 그리고 권7 이하의 세 책으로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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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례에서 권1은 학행, 권2는 충효, 권3은 지모, 권4는 열녀, 권5·6·7은 문학, 권8은 서화, 권9는 잡예(雜藝 : 의학·바둑·음악·주술), 권10은 승려·도류(道流)의 순으로 분류해 인물의 행적을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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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 하층계급출신의 인물연구에 도움이 되는 귀중 자료이나 인용서 중 양반층의 기록이 많고, 하천한 인물이 특은을 입어 미관말직이라도 얻은 것을 칭송하는 등 양반 중심의 사회윤리가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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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성'''== | | =='''구성'''== |
− | '''이향견문록'''의 구성은 조희룡이 1862년에 쓴 서(序)와 편자의 의례(義例), 목차, 인용서목, 내용 순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1~3권이 상(上), 4~6권이 중(中), 7~10권이 하(下)책으로 총 10권 3책으로 되어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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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 하층 계급 출신으로 각 방면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인물의 행적을 모아 놓았는데, 권1에서는 학행, 권2는 충효, 권3은 지모(智謨), 권4는 열녀, 권5∼7은 문학, 권8은 서화, 권9는 잡예(雜藝, 의학ㆍ바둑ㆍ음악ㆍ주술), 권10은 승려ㆍ도류(道流) 인물들의 행적을 수록하였다. 그리고 52종의 인용서목이 있고, 모두 284항목에 308명의 인물을 수록하고 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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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성에서 눈여겨볼 점은 우선 각 덕목 중 문학(71명)과 서화(33명) 부문에서 가장 많은 인물을 수록하고 있다는 것으로, 이는 당시 벼슬길에 신분적 제약으로 한계가 있었던 중인들이 주로 종사했던 분야이기도 했다. 또한 학행을 충효나 지모 등 다른 항목을 제치고 가장 첫머리에 내세운 것에 대해서는, 여지껏 양반의 전유물로만 여겨져온 학문 분야에서의 성과와 업적을 중인들도 맡아 이루게 되었다는 자부심을 반영한 것이라는 지적이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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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한 같은 하류층 인물을 수록한 [[호산외기|≪호산외기 壺山外記≫]]가 하류층의 시각으로 기술한 반면에 이 책은 양반층의 시각으로 기술된 점이 특징이다. 이 점은 저자의 출신 성분에 기인한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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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및 의의'''== | | =='''평가 및 의의'''== |
− | 이 책은 많은 문헌을 섭렵한 유서(類書)의 일종으로서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 하층민 출신의 인물들의 행적을 수록했다는 의의가 있으며, 오늘날 조선의 하층민 출신들의 인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하지만 인용서 가운데 대부분은 주로 양반층의 기록이며, 신분이 낮은 인물이 특은을 입어 미관말직이나마 얻게 된 것을 칭송하는 등의 양반 중심의 사회 윤리는 한계로 지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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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록유산과의 연관성'''== | | =='''기록유산과의 연관성'''== |
− | 이향견문록에 등장하고, 4가지 기록문화유산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노드로는 [[유정]], [[휴정]], [[허준]], [[김정호]]가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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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향견문록에 등장하나, 4가지 기록문화유산에 중간 매개 노드로 작용하는 노드로는 [[동해거사]], [[정지윤]], [[유정주]], [[유상]], [[이진화]], [[정언옹]], [[남사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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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드 및 관계'''== | | =='''노드 및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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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향견문록]]||isBasedOn ||인물||[[동해거사]] || [[동해거사]]는 [[이향견문록]]의 소재이다. | | ||[[이향견문록]]||isBasedOn ||인물||[[동해거사]] || [[동해거사]]는 [[이향견문록]]의 소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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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향견문록]]||isBasedOn ||인물||[[정지윤]] || [[정지윤]]은 [[이향견문록]]의 소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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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향견문록]]||isBasedOn ||인물||[[유정주]] || [[유정주]]는 [[이향견문록]]의 소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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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향견문록]]||isBasedOn ||인물||[[유상]] || [[유상]]은 [[이향견문록]]의 소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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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향견문록]]||isBasedOn ||인물||[[이진화]] || [[이진화]]는 [[이향견문록]]의 소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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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향견문록]]||isBasedOn ||인물||[[정언옹]] || [[정언옹]]은 [[이향견문록]]의 소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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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향견문록]]||isRelatedTo ||기록||[[청구야사]] || [[청구야사]]는 [[이향견문록]]과 관련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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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향견문록]]||isCreatedBy ||인물||[[유재건]] || [[유재건]]은 [[이향견문록]]의 저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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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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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은 1670년(현종 11년)경 정부인 안동 장씨(貞夫人 安東 張氏) [[장계향]]이 저술한 조리서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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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식디미방은 한글로 쓴 최초의 조리서이면서 동시에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여성이 쓴 조리서이이기도 하다.<ref>'''음식디미방.....하다''' : [https://ko.wikipedia.org/wiki/%EC%9D%8C%EC%8B%9D%EB%94%94%EB%AF%B8%EB%B0%A9 위키백과 "음식디미방"]참조</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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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식디미방의 글자 가운데 '디'자는 알 지(知)의 옛말이며, 그 이름을 풀이하면 '음식의 맛을 아는 방법'이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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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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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책의 표제는 '閨壼是議方(규곤시의방)'이라는 한자로 표기되어 있고<ref>'''표제는.....있고''' : 표지서명 '閨壼是議方'은 가로 5.1㎝, 세로 15.8㎝ 크기의 제첨에 묵서되어 있다.</ref>, 권두제는 '음식디미방'이라는 한글로 표기되어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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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의 크기는 26.5×18㎝이며, 백지에 붓으로 쓴 필사본의 일반적 특징 그대로 광곽과 계선이 없다. 반엽이 8~9행이며 한 행의 자수는 34~36자로 균일하지 않다. 지질은 황색 저지이며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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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앞 뒤 표지 2장을 빼면 총 28장이다. 6장의 백지가 포함되어 있으니, '어육뉴'가 끝난 부분에 3장의 백지가 있고, '쥬국방문'의 끝에도 백지 3장이 붙어 있다. 백지를 남겨 둔 것은 차후 추가적으로 기술해야할 조리법이 있을 때를 대비한 조치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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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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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표제와 권두제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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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pan style="color: red; text-decoration: line-throu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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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정리)'''<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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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책의 명칭은 두 가지이다. 본문의 첫머리에 나타난 권두서명은 '음식디미방'으로 되어 있고, 장정한 겉표지에 쓰인 표지 서명은 '閨壼是議方'으로 되어 있다. 김사엽(1960 : 671)은 전자가 필사자가 직접 쓴 원명이고, 표지서명은 장씨의 부군 또는 자손들이 격식을 갖추기 위해 새로 지어 붙인 것으로 추정하였다. '음식디미방'이라는 이름은 이 책의 내용에 썩 잘 어울리는 사실적 명명임에 비해, '閨壼是議方'이라는 이름은 윤색을 가하여 외형상의 격식을 갖추려 한 것이다. 이런 태도는 책을 저술한 당사자인 장씨 부인의 것이라기보다 그의 부군이나 자손이 이 책의 품격을 더 높이려고 한 조치라고 생각된다. 서지학 혹은 목록학에서 어떤 문헌의 정식 명칭을 정할 때 표지 서명보다 권두서명을 취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 이유는 표지 서명이 대체로 권두서명을 줄인 것이 많은데 비해 권두서명은 온이름(full name)1)을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의 경우 표지 서명 '閨壼是議方'과 권두서명 '음식디미방'이 서로 판이한 것이어서 문제가 된다. 그런데 본문의 첫머리 즉 권두서명 '음식디미방'은 이 책을 저술한 당사자가 붙인 이름임이 분명하므로 저술자의 의도를 존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저술자의 의도를 존중하고 책의 내용이 명칭에 직접 반영될 수 있도록 함에는 '음식디미방'이 더 적합하다. 그러므로 권두서명을 목록에 올리는 정식 서명으로 간주하는 일반적 관례를 따르고, 위에서 지적한 취지를 살려 이 책의 이름은 '음식디미방'이라고 확정하려 한다. 그러나 표지 서명으로 번듯하게 쓰인 '閨壼是議方'이라는 이름을 아주 무시할 수는 없는 형편이다. 이 점을 고려하여 필자는 '음식디미방'을 이 책의 원명(또는 1차적 명칭)으로 삼고, '閨壼是議方'을 별칭(또는 2차적 명칭)으로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한다. 권두서명인 '음식디미방'의 '디미'가 어떤 한자어의 음을 적은 것인지에도 문제가 있다. 김사엽(1960 : 671)은 '음식지미방(飮食地味方)'으로 적어 '디미'가 '지미(地味)'를 표기한 것으로 보았으나, 황혜성(1980 : 5)은 '飮食知味方'으로 적어 '디미'가 '知味'를 표기한 것으로 보았다. 책의 내용으로 보아 '디미'가 '地味'를 표기한 것일 가능성은 없다. '디미'가 '至味'(아주 좋은 맛 또는 그런 음식), 또는 '至美'(아주 아름답다), 혹은 '旨美'(맛이 좋다)와 같은 한자어를 표기한 것일 가능성도 고려해 볼 수 있다. 그러나 '至'와 '旨'의 고음은 '디'가 아닌 '지'이므로2) 문제가 있다. '知'는 그 고음이 '디'여서3) 음상으로 보면 '디미'에는 '知味'가 가장 적합하다. '知味'의 뜻은 다음 두 가지로 쓰인다(한글학회, 우리말 큰사전 참고). ① 미각이 예민하여 맛을 잘 앎. ② '음식 맛을 봄'의 궁중말. 결국 이 책의 내용과 저술 취지로 보아 '음식디미방'은 '좋은 음식 맛을 내는 방문(方文)'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閨壼是議方'의 '閨壼'은 여성들이 거처하는 공간인 '안방과 안뜰'을 뜻하고, '是議方'은 '올바르게 풀이한 방문'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閨壼是議方'에 함축된 의미는 '부녀자에게 필요한 것을 올바르게 풀이한 방문'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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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사기의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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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pan style="color: red; text-decoration: line-throu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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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정리)'''<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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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식디미방의 권말에는 다음과 같은 필사기가 적혀 있다. 몸이 불편한 가운데 어두운 눈으로 간신히 이 책을 쓴 뜻을 잘 알아 이대로 시행하고 책은 본가에 간수하여 오래 전하라고 당부한 내용이다. 이 당부가 후손들에 의해 그대로 시행되어 오늘날까지 온전한 모습 그대로 이 책이 전해져 학술적 가치를 빛내고 있으니, 후손을 위한 장씨 부인의 원려(遠慮)와 선조의 유훈을 받들어 지켜온 후손들의 정성스러운 마음이 서로 수응한 결과라 아니할 수 없다. 이 필사기는 장씨 부인이 직접 쓴 것이 분명하다. 이 필사기를 쓴 해가 이 책의 저술 연대가 되겠는데 정확하게 몇 년인지 알 수 없다. '이리 눈 어두온 간신히 써시니'라는 문구로 보아 장씨가 말년에 쓴 것으로 보인다.4) 장씨의 생몰년(1598~1680)을 고려할 때 이 '말년'은 1670년경에서 1680년 사이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1670년경과 1680년 사이에 『음식디미방』이 이루어졌다고 본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해 둘 것은 위의 인용문 중 "식들은 각각 벗겨 가오 이 가뎌 갈 각을안 심 말며"라는 대목을 음식사 연구자들이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구절에 대해 이성우(1982:19)는 "「음식디미방」에서 장씨 부인은 이 책을 시집갈 때 가지고 가지 말라 하여 자기집의 조리 비결을 독점․보존하려고 애쓰고 있는데 비하여, 「규합총서」에서 빙허각(憑虛閣) 이씨는 서문을 통하여 오히려 널리 읽혀지기를 바라고 있으니, 이러한 조리서의 편찬 의식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고 있을 뿐 아니라……"라고 풀이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풀이는 올바른 것이라 할 수 없다. 딸자식들에게 이 책을 베껴 가되 책을 가져갈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말라고 한 것은 '조리법의 독점'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원본을 종가에 잘 보존함으로써 조리법을 대대손손 길이 전수하고자 함에 있는 것이다. 딸자식들이 베껴 간 책을 남에게는 절대로 보여주지 말라고 하였다면 이성우 교수의 풀이가 맞겠지만 그러한 뜻은 문면 어디에도 나타나 있지 않다. 연구자의 잘못된 해석이 본의 아니게 저술자의 뜻을 왜곡시킬 우려가 있다고 여겨지는 까닭에 굳이 지적해 두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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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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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식디미방에는 조선시대 반가에서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그리고 음식을 어떻게 조리하였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전통 요리를 재현하려는 의도로 조선시대 조리서에 접근하고자 한다면 필수적으로 참고해야 할 문헌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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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체계와 조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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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리법 항목에 나타나는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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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술된 음식의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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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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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수 - 면, 난면, 메밀국수, 녹말국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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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두류 - 만두, 메밀만두, 어만두, 숭어만두, 수교의, 석류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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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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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 - 족탕, 말린 고기탕, 쑥탕, 천어순어탕, 붕어순갱, 와각탕, 난탕법, 계란탕법, 양숙편, 전복탕, 자라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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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찜 - 붕어찜, 해삼찜, 개장찜, 수증계, 가지찜, 외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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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편육(片肉), 또는 숙편(熟片) - 양숙, 별미 닭대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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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 - 동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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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채 - 연근채, 동아돈채, 잡채, 대구껍질채, 외화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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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르미 - 가지누르미, 개장고지누르미, 동아누르미, 대구누르미, 개장누르미, 해삼누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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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이 - 닭구이, 가제육, 웅장, 대합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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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볶이 - 양볶이, 꿩지히, 꿩짠지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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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적 - 동아적, 연근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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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 - 어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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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 - 회, 대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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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침채 - 꿩침채, 산갓침채, 마늘 담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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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대 - 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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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젓 - 게젓, 약게젓, 청어 염해법, 방어 염장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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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는 법 - 질긴 고기 삶는 법, 누른개, 웅창 손질법, 개장 고는 법, 해삼 다루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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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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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식초 - 2가지 초법, 매자초, 국에 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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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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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떡 - 상화, 상화편, 증편, 석이편, 잡과편, 밤설기, 전화법, 빈자법, 인절미 굽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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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잡과 - 연약과, 약과, 박산, 중박계, 빙사과, 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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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타 - 앵도편, 순정과, 죽순정과, 섭산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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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채 - 토장법 녹두나화, 챠ㄱ면(오미자), 벽챠ㄱ면, 차면, 스ㅣㅡㆀ면(오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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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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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채소 - 수박, 동화 간수법, 동화 담는 법, 가지 간수법, 고사리 담는 법, 비시나물 쓰는 법, 건강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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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일 - 북숭아 간수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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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기 - 고기 말리는 법, 고기 말려 오래 두는 법, 참새 말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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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선 - 생선 말리는 법, 전복 말리기, 해삼 말리기, 생복 간수법, 연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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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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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양주 - 정감청주, 점감주, 2가지 하절 삼일주, 일일주, 하절주, 4가지 이화주, 사급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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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양주 - 감향주, 하향주, 벽향주, 유화주, 향온주, 소곡주, 황금주, 하시주, 칠일주, 백화주, 동양주, 점주, 적주, 남성주, 녹화주, 칠일주, 죽엽주, 별주, 행화춘주
| |
− | *삼양주 - 2가지 삼해주, 2가지 삼해주, 삼오주 (삼양주), 순향주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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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양주 - 삼오주 (사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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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약용주 - 차주법, 송화주, 오가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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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혼향주 - 과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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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주 - 2가지 수주, 밀소주, 찹쌀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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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룩 - 주국방법, 이화주 누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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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 장서각 특별전: 한글고문헌 전시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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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ttp://digerati.aks.ac.kr/dhlab/2016/202/han_book/han_Page_071.htm 전시자료068 "음식디미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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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미와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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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른 조리서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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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pan style="color: red; text-decoration: line-throu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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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정리)'''<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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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식디미방은 연대가 명확한 한글조리서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음식디미방과 비슷한 시기의 한글 조리서로 [[주방문(酒方文)]]이 있다. 이 책에는 각종 술을 빚는 법이 설명되어 있는데 『음식디미방』의 서술 내용과 다른 부분이 많다. 연대가 뚜렷하지 않은 [[음식보(飮食譜)]]라는 한글 조리서에도 위의 두 책과 비슷한 점이 적지 않게 나타난다고 하는 바(이성우 1982 : 13), 이러한 점은 음식디미방이 후대 한글 조리서 연구의 중심 자리에 놓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책들은 17세기를 전후로 하여 우리 조상들이 먹었던 음식과 그 조리법을 연구하는 데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다. 18세기에는 홍만선(洪萬選)이 1715년경에 이룩한 [[산림경제[[와, 유중임(柳重臨)이 1766년에 이 책을 증보한 [[증보산림경제]]에 각종 음식과 조리법에 대한 설명이 나타나나 이들은 중국에서 나온 『거가필용(居家必用)』의 영향을 많이 입은 것이다(이성우 1982 : 13-15).2) 19세기의 한글 조리서로는 고려대본 『규곤요람』(1800년대 초중엽, 필사본), 『음식뉴취』(1858년, 필사본), 『김승지댁 주방문』(1860년, 필사본), 『규합총서』(1869년, 刊本)3), 『술빚는법』(1800년대 말엽, 필사본), 『술만드는법』(1800년대 말엽, 필사본), 『시의전서』(1800년대 말엽, 필사본), 연세대본 『규곤요람』(1896년, 필사본) 등 여러 가지가 있다. 20세기의 한글 조리서들 중에는 신활자로 刊印된 것이 몇몇 있다. 『조선요리제법』(1913년, 방신영 찬), 『부인필지』(1915년, 빙허각 이씨 원찬) 등 새로운 체재와 문장(국한문 혼용)으로 저술된 조리서가 나왔다.4) 이와 같이 한글 조리서가 수백 년에 걸쳐 여러 종이 나오지만 『음식디미방』이 한글조리서의 으뜸이며, 후대의 조리서의 근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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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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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pan style="color: red; text-decoration: line-throu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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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정리)'''</span><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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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pan style="color: red; text-decoration: line-through;">*이 책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우리나라 음식사 연구의 기본 자료가 된다는 점이다. 인간에게 먹는 일보다 더 기본적인 것은 없고, 인간이 이룩한 문화 중 음식 문화는 그것을 향유하는 공동체의 특성을 잘 보여 준다. 우리 한민족 공동체는 지역에 따라, 시대에 따라 공통성과 고유성을 겸비한 음식 문화를 이룩해 왔다. 『음식디미방』에 서술된 146개 항목의 음식 조리법은 17세기의 조선 사람이 먹고 마신 음식과 술에 대한 많은 정보를 알려 준다. 특히 경상도 북부 일대(안동, 영양, 예천 등지)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음식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또한 후대의 조리서에 영향을 미치면서 한국인의 식생활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span><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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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pan style="color: red; text-decoration: line-through;">*국어학적 관점에서 이 책은 17세기 국어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어서 당시 한국어 특히 경상북도 북부 방언의 음운·문법·어휘 등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 자료이다. 특히 이 책은 한문을 한글로 번역한 대부분의 당시 자료와 달리 우리말을 바로 문장화한 자료이다. 따라서 다른 언해서와 비교할 때 이 책의 언어는 한문의 제약에서 벗어나 우리말의 실상을 잘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에 반영된 언어 요소 중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음식 재료와 관련된 각종 명사류와 조리와 관련된 동사, 형용사 등이다. 이런 부류의 낱말들은 국어 어휘사 연구에 매우 요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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