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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사(大祀: 宗廟, 社稷, 永寧殿), 중사(中祀: 風, 雲, 雷, 雨, 嶽, 海, 瀆, 先農, 先蠶, 雩祀, 文宣王, 歷代始祖), 소사(小祀: 靈星, 老人星, 馬祖, 名山, 大川, 司寒, 先牧, 馬社, 馬步, 禡祭, 禜祭, 酺祭, 七祀, 纛祭, 厲祭), 기고제(祈告祭: 社稷壇, 宗廟, 風雲雷雨壇, 嶽海瀆, 山川, 雩祀壇), 속제(俗祭), 주현제(州縣祭) 등 국가 제사에 [[제복|제복(祭服)]]의 일습으로 착용한다.<br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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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의 전면의 머리둘레 부분인 무(武)와 관의 중앙 전면으로부터 정수리에 이르는 검정색 몸판에 금색의 세로줄이 높여져 있고, 뒷면은 여러 가지 무늬를 투조로 장식하여 관의 뒤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ref>장정윤, 『朝鮮時代 文武百官 朝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96쪽.</ref> | + | 관의 전면의 머리둘레 부분인 무(武)와 관의 중앙 전면으로부터 정수리에 이르는 검정색 몸판에 금색의 세로줄이 높여져 있고, 뒷면은 여러 가지 무늬를 투조로 장식하여 관의 뒤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ref>장정윤, 『朝鮮時代 文武百官 朝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96쪽.</ref> 금칠을 한 금관(조관) 안에 흑칠을 한 제관을 넣어 [[조복|조복(朝服)]]의 [[금관]]과 [[제복|제복(祭服)]]의 [[제관]]이 동시에 같이 있어 특이한 형태를 나타내고 있어 [[조복|조복(朝服)]] 착용시에는 양관을 쓰고 [[제복|제복(祭服)]] 착용시에는 금관을 벗고 흑칠을 한 제관을 착용할 수 있게 한 유물도 있다.<ref>최영신, 『朝鮮時代 文武百官 祭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 92쪽.</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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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말 공민왕 19년(1370, 洪武 3년) 때에 중국에 관복을 청하여 명 태조로부터 신하의 관복(1품은 5량관, 2품은 4량관, 3품은 3량관, 4·5품은 2량관, 6·7품은 1량관)을 사여 받았다. 조선조에 들어와 태종은 백관복 제정에 심혈을 기울였고, 세종 8년에 약간의 수정을 거쳐 성종 때에 백관의 [[백관의 조복|조복]]·[[백관의 제복|제복]]·[[백관의 공복|공복]]·[[백관의 상복|상복]]제도가 [[경국대전|『경국대전(經國大典)』]]에 기록되면서 제도화되었다. | + | '''<표> 법전에 실린 양관 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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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관의 형태는 한나라의 [http://dic-costumekorea.org/meta/?act=detail&meta_uid=891 진현관(進賢冠)]에서 유래되었다. | + | 양관의 형태는 한나라의 [http://dic-costumekorea.org/meta/?act=detail&meta_uid=891 진현관(進賢冠)]에서 유래되었다.<br /> |
+ | 영조 19년 백관의 제복은 [[제조복 상의]]와 [[제조복 하상]] 이외에는 [[양관]] 및 구성품목을 조복과 통용할 것을 명하였고, [[정조]] 18년(1794)에는 [[제관]]에 흑칠을 하고 금(金)으로 새겨서 만드는 것을 금하였다. [[영조]]와 [[정조]]대의 [[조복]]의 양관(금관)과 [[제복]]의 양관(제관)이 분리되어 사용되었으며, 국말까지 실제 전하는 유물에서도 [[조복]]의 관과 [[제복]]의 관은 구별되어 있다.<ref>최영신, 『朝鮮時代 文武百官 祭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 92쪽.</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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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관을 쓴 관리", 문화원형백과 전통머리모양과 머리치레거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콘텐츠닷컴』<sup>online</sup></online></html>, 한국콘텐츠진흥원, 2004. 온라인 참조: "[https://tv.naver.com/v/331114 남성용/양관]", 문화원형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TV』<sup>online</sup></online></html>. 최종확인: 2017년 04월 18일. | *"양관을 쓴 관리", 문화원형백과 전통머리모양과 머리치레거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콘텐츠닷컴』<sup>online</sup></online></html>, 한국콘텐츠진흥원, 2004. 온라인 참조: "[https://tv.naver.com/v/331114 남성용/양관]", 문화원형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TV』<sup>online</sup></online></html>. 최종확인: 2017년 04월 18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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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姜淳弟 「冠帽 硏究(Ⅲ)」, 『생활과학연구논집』 Vol.16 No.1, 가톨릭대학교 생활과학연구소, 1996. | * 姜淳弟 「冠帽 硏究(Ⅲ)」, 『생활과학연구논집』 Vol.16 No.1, 가톨릭대학교 생활과학연구소, 199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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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복식]] |
2017년 5월 26일 (금) 20:31 판
양관 (梁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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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360px|thumb|center|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 |
대표명칭 | 양관 |
---|---|
한자표기 | 梁冠 |
이칭별칭 | 금관(金冠), 조관(朝冠), 제관(祭冠) |
착용신분 | 문무백관 |
착용성별 | 남성 |
목차
정의
양(梁, 관의 아래에서 위로 나 있는 세로줄)의 수를 달리한 관모로, 조복(朝服)에 착용하는 관은 금관(金冠) 또는 조관(朝冠)이라 하고 제복(祭服)에 착용하는 관은 제관이라고 한다.
내용
복식구성
양(梁), 무(武), 배면(背面), 목잠(木簪)
심동신(沈東臣, 1824~미상) 양관[1]
착용신분
문무백관이 착용한다.
착용상황
금관(金冠)은 대사(大祀), 경축일(慶祝日), 원단(元旦), 동지(冬至), 조칙 반포, 진표(進表) 등의 국가 행사에 조복(朝服)의 일습으로 착용된다.
대사(大祀: 宗廟, 社稷, 永寧殿), 중사(中祀: 風, 雲, 雷, 雨, 嶽, 海, 瀆, 先農, 先蠶, 雩祀, 文宣王, 歷代始祖), 소사(小祀: 靈星, 老人星, 馬祖, 名山, 大川, 司寒, 先牧, 馬社, 馬步, 禡祭, 禜祭, 酺祭, 七祀, 纛祭, 厲祭), 기고제(祈告祭: 社稷壇, 宗廟, 風雲雷雨壇, 嶽海瀆, 山川, 雩祀壇), 속제(俗祭), 주현제(州縣祭) 등 국가 제사에 제복(祭服)의 일습으로 착용한다.
형태
관의 전면의 머리둘레 부분인 무(武)와 관의 중앙 전면으로부터 정수리에 이르는 검정색 몸판에 금색의 세로줄이 높여져 있고, 뒷면은 여러 가지 무늬를 투조로 장식하여 관의 뒤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2] 금칠을 한 금관(조관) 안에 흑칠을 한 제관을 넣어 조복(朝服)의 금관과 제복(祭服)의 제관이 동시에 같이 있어 특이한 형태를 나타내고 있어 조복(朝服) 착용시에는 양관을 쓰고 제복(祭服) 착용시에는 금관을 벗고 흑칠을 한 제관을 착용할 수 있게 한 유물도 있다.[3]
신분별 형태
고려 말 공민왕 19년(1370, 洪武 3년) 때에 중국에 관복을 청하여 명 태조로부터 신하의 관복(1품은 5량관, 2품은 4량관, 3품은 3량관, 4·5품은 2량관, 6·7품은 1량관)을 사여 받았다. 조선조에 들어와 태종은 백관복 제정에 심혈을 기울였고, 세종 8년에 약간의 수정을 거쳐 성종 때에 백관의 조복·제복·공복·상복제도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기록되면서 제도화되었다.
<표> 법전에 실린 양관 제도
책명/품계 | 1품 | 2품 | 3품 | 4품 | 5품 | 6품 | 7품 | 8품 | 9품 |
---|---|---|---|---|---|---|---|---|---|
『국조오례의서례』, 『경국대전』 | 5량 | 4량 | 3량 | 2량 | 2량 | 2량 | 1량 | 1량 | 1량 |
『대한예전』 | 7량 | 5량 | 5량 | 4량 | 3량 | 2량 | 2량 | 1량 | 1량 |
기타
양관의 형태는 한나라의 진현관(進賢冠)에서 유래되었다.
영조 19년 백관의 제복은 제조복 상의와 제조복 하상 이외에는 양관 및 구성품목을 조복과 통용할 것을 명하였고, 정조 18년(1794)에는 제관에 흑칠을 하고 금(金)으로 새겨서 만드는 것을 금하였다. 영조와 정조대의 조복의 양관(금관)과 제복의 양관(제관)이 분리되어 사용되었으며, 국말까지 실제 전하는 유물에서도 조복의 관과 제복의 관은 구별되어 있다.[4]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
양관 | 경국대전 | A는 B에 기록되어 있다 |
양관 | 국조오례의서례 | A는 B에 기록되어 있다 |
양관 | 대한예전 | A는 B에 기록되어 있다 |
양관 | 속대전 | A는 B에 기록되어 있다 |
양관 | 시경 | A는 B에 기록되어 있다 |
양관 | 백관의 조복 | A는 B의 일습이 된다 |
양관 | 문무백관 | A는 B가 착용하였다 |
시간정보
공간정보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 "양관을 쓴 관리", 문화원형백과 전통머리모양과 머리치레거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2004. 온라인 참조: "남성용/양관", 문화원형백과,『네이버TV』online . 최종확인: 2017년 04월 18일.
주석
- ↑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 ↑ 장정윤, 『朝鮮時代 文武百官 朝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96쪽.
- ↑ 최영신, 『朝鮮時代 文武百官 祭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 92쪽.
- ↑ 최영신, 『朝鮮時代 文武百官 祭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 92쪽.
- ↑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 ↑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 ↑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시경(詩經)』
-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
- 『대한예전(大韓禮典)』
- 『경국대전(經國大典)』
- 석주선 『한국복식사』(보진재, 1971).
- 周錫保, 『中國古代服飾史』(中國戱劇出版社, 1983).
- 장정윤, 「朝鮮時代 文武百官 朝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 최영선 「朝鮮時代 文武百官 祭服에 關한 硏究」,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
- 姜淳弟 「冠帽 硏究(Ⅲ)」, 『생활과학연구논집』 Vol.16 No.1, 가톨릭대학교 생활과학연구소,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