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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양스님이 절터를 잡기 위해 북쪽 산마루에 올랐을 때 보았다는 오층황탑은 무엇이었을까? 또 까치가 알려주어 찾아낸 벽돌로 쌓았다는 탑은 어떻게 된 걸까? 『삼국유사』 「보양이목」에는 “후삼국이 어지러울 때 대작갑·대비갑·소보갑·천문갑·가슬갑 등 오갑사가 모두 망하고 무너져 오갑사의 기둥을 대작갑에 모아두었다”는 구절이 있다. 이 사실을 바탕으로 앞뒤 사정을 추측해보면 대작갑사 시절 담황색 벽돌로 쌓았거나 아니면 탑의 윗부분을 금빛 또는 구릿빛 나는 무엇으로 장식한 오층전탑이나 모전석탑이 있었으나 이것이 어느 땐가 절과 함께 무너져버렸고, 보양스님이 그 터에 절을 지을 때 버려진 탑재를 수습하여 다시 쌓았으며, 남은 벽돌이 하나도 없었다는 말로 미루어 그 탑 또한 5층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운문사에는 오층전탑이나 모전석탑은커녕 이와 비슷한 유물도 없다. 그러면 이 탑은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모습은 전혀 엉뚱하지만 작압전이 바로 오층탑의 후신이다. 지금의 작압전은 1941년에 지어졌다. | 보양스님이 절터를 잡기 위해 북쪽 산마루에 올랐을 때 보았다는 오층황탑은 무엇이었을까? 또 까치가 알려주어 찾아낸 벽돌로 쌓았다는 탑은 어떻게 된 걸까? 『삼국유사』 「보양이목」에는 “후삼국이 어지러울 때 대작갑·대비갑·소보갑·천문갑·가슬갑 등 오갑사가 모두 망하고 무너져 오갑사의 기둥을 대작갑에 모아두었다”는 구절이 있다. 이 사실을 바탕으로 앞뒤 사정을 추측해보면 대작갑사 시절 담황색 벽돌로 쌓았거나 아니면 탑의 윗부분을 금빛 또는 구릿빛 나는 무엇으로 장식한 오층전탑이나 모전석탑이 있었으나 이것이 어느 땐가 절과 함께 무너져버렸고, 보양스님이 그 터에 절을 지을 때 버려진 탑재를 수습하여 다시 쌓았으며, 남은 벽돌이 하나도 없었다는 말로 미루어 그 탑 또한 5층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운문사에는 오층전탑이나 모전석탑은커녕 이와 비슷한 유물도 없다. 그러면 이 탑은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모습은 전혀 엉뚱하지만 작압전이 바로 오층탑의 후신이다. 지금의 작압전은 1941년에 지어졌다. | ||
2017년 5월 25일 (목) 17:50 판
| 청도 운문사 작압전 (淸道 雲門寺 鵲鴨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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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사 이후 추가 예정 | |
| 대표명칭 | 청도 운문사 작압전 |
|---|---|
| 영문명칭 | Jagapjeon Hall of Unmunsa Temple, Cheongdo |
| 한자 | 淸道 雲門寺 鵲鴨殿 |
| 주소 |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1789 |
| 소유자 | 청도 운문사 |
| 관리자 | 청도 운문사 |
| 건립시대 | 조선시대 |
| 관련승려 | 보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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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에 위치한 운문사 안의 법당.
내용
작압전(鵲鴨展)은 보양(寶壤)이 초창하고 학일(學一)이 제2 중창을 할 때 건립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그 후 재건되었다. 작압전에는 보물 제317호로 지정된 청도 운문사 석조 여래 좌상(淸道 雲門寺 石造 如來 坐像)이 모셔져 있는데, 조성 연대는 신라 후기로 추정하고 있다. 청도 운문사 석조 여래 좌상 옆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護法神)[1]으로 사천왕(四天王)이 모셔져 있다.[2]
보양스님이 절터를 잡기 위해 북쪽 산마루에 올랐을 때 보았다는 오층황탑은 무엇이었을까? 또 까치가 알려주어 찾아낸 벽돌로 쌓았다는 탑은 어떻게 된 걸까? 『삼국유사』 「보양이목」에는 “후삼국이 어지러울 때 대작갑·대비갑·소보갑·천문갑·가슬갑 등 오갑사가 모두 망하고 무너져 오갑사의 기둥을 대작갑에 모아두었다”는 구절이 있다. 이 사실을 바탕으로 앞뒤 사정을 추측해보면 대작갑사 시절 담황색 벽돌로 쌓았거나 아니면 탑의 윗부분을 금빛 또는 구릿빛 나는 무엇으로 장식한 오층전탑이나 모전석탑이 있었으나 이것이 어느 땐가 절과 함께 무너져버렸고, 보양스님이 그 터에 절을 지을 때 버려진 탑재를 수습하여 다시 쌓았으며, 남은 벽돌이 하나도 없었다는 말로 미루어 그 탑 또한 5층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운문사에는 오층전탑이나 모전석탑은커녕 이와 비슷한 유물도 없다. 그러면 이 탑은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모습은 전혀 엉뚱하지만 작압전이 바로 오층탑의 후신이다. 지금의 작압전은 1941년에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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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이래로 청도군의 사원 작갑사(鵲岬寺) 이하 중소 사원은 삼한의 병란 중에 대작갑(大鵲岬), 소작갑(小鵲岬), 소보갑(所寶岬), 천문갑(天門岬), 가서갑(嘉西岬) 등 5갑이 모두 훼손되어 5갑의 기둥만 모아 대작갑사에 두었다. | |
| 출처: 『삼국유사』 권 제4, 제5 의해, 「보양이목」.[3] | ||
보양스님이 복원하여 운문사의 뜰 가운데 서 있던 대작갑사의 오층전탑 혹은 모전석탑이 1718년 이전 일부는 무너지고 일부만 남아 환작대라고 불리다가, 그뒤 다시 목조건축과 탑의 혼합형 건축인 작압전으로 변하였고 1941년에는 그나마 남아 있던 탑의 자취마저 잃고 자리까지 바뀐 채 지금처럼 작고 보잘것없는 목조건물로 변해버린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운문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8 - 팔공산 자락, 초판 1997., 11쇄 2009., 돌베개)
운문사 작압전 출토 사리 석탑 호명(雲門寺 鵲鴨殿 出土 舍利 石塔 壺銘)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소재 운문사 작압전 해체 복원 시 발견된 사리 석함과 사리구.(정의) 1941년 지금의 종무소 중앙에 위치했던 작압전을 해체 복원 이건할 당시 그곳에 봉안되어 있던 석불 좌상의 대좌 밑에서 수습된 사리 석함과 사리구로 함통 6년명(咸通 6年銘)[865]이 새겨져 있었다. 이를 통해 작압전이 건립되기 전 이곳에 위치했던 전탑의 건립 연대를 9세기로 편년할 수 있게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운문사 작압전 출토 사리 석탑 호명)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 청도 운문사 작압전 | 청도 운문사 | A는 B에 있다 | |
| 청도 운문사 석조여래좌상 | 청도 운문사 작압전 | A는 B에 있다 | |
| 청도 운문사 사천왕 석주 | 청도 운문사 작압전 | A는 B에 있다 | |
| 보양 | 청도 운문사 작압전 | A는 B를 창건하였다 | 930년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불교를 수호하는 선신(善神). "호법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진관스님, "청도 운문사 석조 여래 좌상",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보양 관련 기록(0943년 01월 (음)", 『삼국유사』 권 제4, 제5 의해, 「보양이목」,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