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청도 운문사 작압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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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사 작압전(鵲鴨展)은 보량 국사가 초창하고 원응 국사가 제2 중창을 할 때 건립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그 후 재건되었다. 작압전에는 보물 제317호로 지정된 청도 운문사 석조 여래 좌상(淸道 雲門寺 石造 如來 坐像)이 모셔져 있는데, 조성 연대는 신라 후기로 추정하고 있다.
 
운문사 작압전(鵲鴨展)은 보량 국사가 초창하고 원응 국사가 제2 중창을 할 때 건립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그 후 재건되었다. 작압전에는 보물 제317호로 지정된 청도 운문사 석조 여래 좌상(淸道 雲門寺 石造 如來 坐像)이 모셔져 있는데, 조성 연대는 신라 후기로 추정하고 있다.
  
청도 운문사 석조 여래 좌상 옆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 신장으로 사천왕(四天王)인 동방 지국천왕(東方 持國天王), 남방 증장천왕(南方 增長天王), 서방 광목천왕(西方 廣目天王), 북방 다문천왕(北方 多聞天王)이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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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운문사 석조 여래 좌상 옆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 신장으로 [[사천왕|사천왕(四天王)]]이 모셔져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석조 여래 좌상)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석조 여래 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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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양스님이 절터를 잡기 위해 북쪽 산마루에 올랐을 때 보았다는 오층황탑은 무엇이었을까? 또 까치가 알려주어 찾아낸 벽돌로 쌓았다는 탑은 어떻게 된 걸까? 『삼국유사』 「보양이목」에는 “후삼국이 어지러울 때 대작갑·대비갑·소보갑·천문갑·가슬갑 등 오갑사가 모두 망하고 무너져 오갑사의 기둥을 대작갑에 모아두었다”는 구절이 있다. 이 사실을 바탕으로 앞뒤 사정을 추측해보면 대작갑사 시절 담황색 벽돌로 쌓았거나 아니면 탑의 윗부분을 금빛 또는 구릿빛 나는 무엇으로 장식한 오층전탑이나 모전석탑이 있었으나 이것이 어느 땐가 절과 함께 무너져버렸고, 보양스님이 그 터에 절을 지을 때 버려진 탑재를 수습하여 다시 쌓았으며, 남은 벽돌이 하나도 없었다는 말로 미루어 그 탑 또한 5층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운문사에는 오층전탑이나 모전석탑은커녕 이와 비슷한 유물도 없다. 그러면 이 탑은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모습은 전혀 엉뚱하지만 작압전이 바로 오층탑의 후신이다. 지금의 작압전은 1941년에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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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신라시대 이래로 청도군의 사원 작갑사(鵲岬寺) 이하 중소 사원은 삼한의 병란 중에 대작갑(大鵲岬), 소작갑(小鵲岬), 소보갑(所寶岬), 천문갑(天門岬), 가서갑(嘉西岬) 등 5갑이 모두 훼손되어 5갑의 기둥만 모아 대작갑사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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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삼국유사』 권 제4, 제5 의해, 「보양이목」.<ref>"[http://db.history.go.kr/item/level.do?setId=2&itemId=sy&synonym=off&chinessChar=on&position=1&levelId=sy_004r_0010_0020_0010 보양 관련 기록(0943년 01월 (음)]", 『삼국유사』 권 제4, 제5 의해, 「보양이목」,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데이터베이스』<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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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양스님이 복원하여 운문사의 뜰 가운데 서 있던 대작갑사의 오층전탑 혹은 모전석탑이 1718년 이전 일부는 무너지고 일부만 남아 환작대라고 불리다가, 그뒤 다시 목조건축과 탑의 혼합형 건축인 작압전으로 변하였고 1941년에는 그나마 남아 있던 탑의 자취마저 잃고 자리까지 바뀐 채 지금처럼 작고 보잘것없는 목조건물로 변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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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운문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8 - 팔공산 자락, 초판 1997., 11쇄 2009., 돌베개)
  
 
운문사 작압전 출토 사리 석탑 호명(雲門寺 鵲鴨殿 出土 舍利 石塔 壺銘)
 
운문사 작압전 출토 사리 석탑 호명(雲門寺 鵲鴨殿 出土 舍利 石塔 壺銘)

2017년 5월 25일 (목) 17:21 판

청도 운문사 작압전
(淸道 雲門寺 鵲鴨殿)
답사 이후 추가 예정
대표명칭 청도 운문사 작압전
영문명칭 Jagapjeon Hall of Unmunsa Temple, Cheongdo
한자 淸道 雲門寺 鵲鴨殿
주소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1789
소유자 청도 운문사
관리자 청도 운문사
건립시대 조선시대
관련승려 보양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에 위치한 운문사 안의 법당.

내용

운문사 작압전(鵲鴨展)은 보량 국사가 초창하고 원응 국사가 제2 중창을 할 때 건립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그 후 재건되었다. 작압전에는 보물 제317호로 지정된 청도 운문사 석조 여래 좌상(淸道 雲門寺 石造 如來 坐像)이 모셔져 있는데, 조성 연대는 신라 후기로 추정하고 있다.

청도 운문사 석조 여래 좌상 옆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 신장으로 사천왕(四天王)이 모셔져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석조 여래 좌상)

보양스님이 절터를 잡기 위해 북쪽 산마루에 올랐을 때 보았다는 오층황탑은 무엇이었을까? 또 까치가 알려주어 찾아낸 벽돌로 쌓았다는 탑은 어떻게 된 걸까? 『삼국유사』 「보양이목」에는 “후삼국이 어지러울 때 대작갑·대비갑·소보갑·천문갑·가슬갑 등 오갑사가 모두 망하고 무너져 오갑사의 기둥을 대작갑에 모아두었다”는 구절이 있다. 이 사실을 바탕으로 앞뒤 사정을 추측해보면 대작갑사 시절 담황색 벽돌로 쌓았거나 아니면 탑의 윗부분을 금빛 또는 구릿빛 나는 무엇으로 장식한 오층전탑이나 모전석탑이 있었으나 이것이 어느 땐가 절과 함께 무너져버렸고, 보양스님이 그 터에 절을 지을 때 버려진 탑재를 수습하여 다시 쌓았으며, 남은 벽돌이 하나도 없었다는 말로 미루어 그 탑 또한 5층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운문사에는 오층전탑이나 모전석탑은커녕 이와 비슷한 유물도 없다. 그러면 이 탑은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모습은 전혀 엉뚱하지만 작압전이 바로 오층탑의 후신이다. 지금의 작압전은 1941년에 지어졌다.


Quote-left.png 신라시대 이래로 청도군의 사원 작갑사(鵲岬寺) 이하 중소 사원은 삼한의 병란 중에 대작갑(大鵲岬), 소작갑(小鵲岬), 소보갑(所寶岬), 천문갑(天門岬), 가서갑(嘉西岬) 등 5갑이 모두 훼손되어 5갑의 기둥만 모아 대작갑사에 두었다. Quote-right.png
출처: 『삼국유사』 권 제4, 제5 의해, 「보양이목」.[1]



보양스님이 복원하여 운문사의 뜰 가운데 서 있던 대작갑사의 오층전탑 혹은 모전석탑이 1718년 이전 일부는 무너지고 일부만 남아 환작대라고 불리다가, 그뒤 다시 목조건축과 탑의 혼합형 건축인 작압전으로 변하였고 1941년에는 그나마 남아 있던 탑의 자취마저 잃고 자리까지 바뀐 채 지금처럼 작고 보잘것없는 목조건물로 변해버린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운문사 (답사여행의 길잡이 8 - 팔공산 자락, 초판 1997., 11쇄 2009., 돌베개)

운문사 작압전 출토 사리 석탑 호명(雲門寺 鵲鴨殿 出土 舍利 石塔 壺銘)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소재 운문사 작압전 해체 복원 시 발견된 사리 석함과 사리구.(정의) 1941년 지금의 종무소 중앙에 위치했던 작압전을 해체 복원 이건할 당시 그곳에 봉안되어 있던 석불 좌상의 대좌 밑에서 수습된 사리 석함과 사리구로 함통 6년명(咸通 6年銘)[865]이 새겨져 있었다. 이를 통해 작압전이 건립되기 전 이곳에 위치했던 전탑의 건립 연대를 9세기로 편년할 수 있게 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운문사 작압전 출토 사리 석탑 호명)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청도 운문사 작압전 청도 운문사 A는 B에 있다
청도 운문사 석조여래좌상 청도 운문사 작압전 A는 B에 있다
청도 운문사 사천왕 석주 청도 운문사 작압전 A는 B에 있다
보양 청도 운문사 작압전 A는 B를 창건하였다 930년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보양 관련 기록(0943년 01월 (음)", 『삼국유사』 권 제4, 제5 의해, 「보양이목」,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국사편찬위원회.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