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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이 편찬한 사서(史書) | + | ≪삼국유사≫는 [[일연|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이 편찬한 사서(史書)로써 -국어국문학 |
+ | 1999년 11월 19일 부산유형문화재 31호로 지정되었다. -모발학 | ||
− | + | 본서는 활자본이고, 5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발학 | |
+ | 내용은「왕력(王歷)」, 「기이(紀異)」,「흥법(興法)」,「탑상(塔像)」,「의해(義解)」,「신주(神呪)」,「감통(感通)」,「피은(避隱)」,「효선(孝善)」등 9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화재청 | ||
− | + | 편찬 연대는 미상이나, 1281∼1283년(충렬왕 7∼9) 사이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모발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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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마찬가지로 신라·백제·고구려 세 나라의 역사뿐만 아니라 고조선과 기자 및 위만 조선을 비롯하여 가락 등의 사적, 신화·전설·시가(詩歌) 등이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다. -향토 | ||
+ | 차이점은(?)《삼국유사》는 여러 자료의 내용을 다듬어서 쓴 《삼국사기》와는 달리 전하는 이야기를 그대로 실은 것이 많다. 그래서 글이 세련되지 않고 때로는 허황되어 보이는 이야기도 나온다. 심지어 사실이나 자료들과 맞지 않는 내용도 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점 때문에 역사 자료로 가치가 높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를 비롯한 다른 역사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일이나 사건까지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어린이 | ||
− | + | 특히 《삼국유사》는 지금까지 보존된 책 중에서는 가장 먼저 단군 신화와 고조선의 역사를 쓰고 있다. 단군 신화를 우리 민족의 건국 신화로, 고조선을 최초의 국가로 인정하는 데 《삼국유사》가 큰 역할을 한 셈이다. 일연이 《삼국유사》에 단군 신화에 대해 쓴 까닭은 당시 고려가 원의 간섭을 받으면서 민족의식과 자주성을 표현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 |
+ | -[네이버 지식백과] 삼국유사 - 고려의 승려 일연이 쓴 삼국 시대의 역사책 (한국사 사전 2 - 역사 사건·문화와 사상, 2015. 2. 10., 책과함께어린이) | ||
− | + | 이러한 그의 인식은 삼국유사의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한국사콘텐츠, 김남윤 | |
− | + | (삼국유사 서문 넣기) | |
+ | 스스로 서술하여 말하기를 “대저 옛 성인(聖人)은 예악(禮樂)으로 나라를 일으키고 인의(仁義)로 가르침을 베푸는 데 있어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왕(帝王)이 장차 일어날 때 부명(符命)에 응하거나 도록(圖籙)을 받아 반드시 범인(凡人)과 다름이 있은 연후에야 능히 큰 변화를 타고 대기(大器)를 잡고 대업(大業)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 ||
+ | ···그런즉 삼국(三國)의 시조(始祖)가 모두 신이(神異)한 데서 나왔다는 것이 어찌 괴이하다 할 수 있겠는가! 이 기이(紀異)가 제편(諸篇)의 첫머리에 실린 것은 그 뜻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
+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
본서는 김부식(金富軾)이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더불어 현존하는 한국 고대 사적(史籍)의 쌍벽으로서, ≪삼국사기≫가 여러 사관(史官)에 의하여 이루어진 정사(正史)이므로 그 체재나 문장이 정제(整齊)된 데 비하여, ≪삼국유사≫는 일연 혼자의 손으로 씌어진 이른바 야사(野史)이므로 체재나 문사(文辭)가 ≪삼국사기≫에 못 미침은 사실이나, 거기서 볼 수 없는 많은 고대 사료(史料)들을 수록하고 있어 둘도 없이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문헌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삼국유사 [三國遺事] (모발학 사전, 2003. 5. 22., 광문각) | 본서는 김부식(金富軾)이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더불어 현존하는 한국 고대 사적(史籍)의 쌍벽으로서, ≪삼국사기≫가 여러 사관(史官)에 의하여 이루어진 정사(正史)이므로 그 체재나 문장이 정제(整齊)된 데 비하여, ≪삼국유사≫는 일연 혼자의 손으로 씌어진 이른바 야사(野史)이므로 체재나 문사(文辭)가 ≪삼국사기≫에 못 미침은 사실이나, 거기서 볼 수 없는 많은 고대 사료(史料)들을 수록하고 있어 둘도 없이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문헌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삼국유사 [三國遺事] (모발학 사전, 2003. 5. 22., 광문각) | ||
− | ≪삼국유사≫의 편찬자인 일연은 충렬왕의 명령에 따라 1277년부터 1281년까지 청도의 운문사에서 머물면서 불교를 일으키는 데 힘썼다. -어린이 | + | ≪삼국유사≫의 편찬자인 일연은 충렬왕의 명령에 따라 1277년부터 1281년까지 청도의 운문사에서 머물면서 불교를 일으키는 데 힘썼다.《삼국유사》는 바로 이 무렵에 쓰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어린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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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연은 승려였기 때문에 《삼국유사》에도 불교와 관련된 내용이 많이 담겨 있다. 특히 이름난 승려들이 한 일이나 불교에 관한 설화가 많이 실려 있으며 절이나 탑, 불상에 관한 중요한 자료도 싣고 있다. -어린이 | ||
군위 인각사에서 『삼국유사』를 완성하여 청도 지역의 삼국 시대에 대한 기록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이 서술되어 있다. -향토 | 군위 인각사에서 『삼국유사』를 완성하여 청도 지역의 삼국 시대에 대한 기록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이 서술되어 있다. -향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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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8년에는 그동안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 역대연표(歷代年表)』를 인흥사에서 간행하였다. 이것은 『 삼국유사(三國遺事)』 왕력(王歷) 편의 토대가 되었다. -콘텐츠 | 1278년에는 그동안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 역대연표(歷代年表)』를 인흥사에서 간행하였다. 이것은 『 삼국유사(三國遺事)』 왕력(王歷) 편의 토대가 되었다. -콘텐츠 | ||
− | + | 이 역대 연표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향토, 강래업 | |
− | 이 역대 연표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향토 | + | 제자 무극(無極)이 1310년대에 《삼국유사》를 간행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삼국유사 [三國遺事] (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한국사전연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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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23일 (화) 22:49 판
정의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의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이 신라·고구려·백제 3국의 유사(遺事)를 모아서 지은 역사서.[1]
내용
≪삼국유사≫는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이 편찬한 사서(史書)로써 -국어국문학 1999년 11월 19일 부산유형문화재 31호로 지정되었다. -모발학
본서는 활자본이고, 5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발학 내용은「왕력(王歷)」, 「기이(紀異)」,「흥법(興法)」,「탑상(塔像)」,「의해(義解)」,「신주(神呪)」,「감통(感通)」,「피은(避隱)」,「효선(孝善)」등 9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화재청
편찬 연대는 미상이나, 1281∼1283년(충렬왕 7∼9) 사이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모발학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마찬가지로 신라·백제·고구려 세 나라의 역사뿐만 아니라 고조선과 기자 및 위만 조선을 비롯하여 가락 등의 사적, 신화·전설·시가(詩歌) 등이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다. -향토 차이점은(?)《삼국유사》는 여러 자료의 내용을 다듬어서 쓴 《삼국사기》와는 달리 전하는 이야기를 그대로 실은 것이 많다. 그래서 글이 세련되지 않고 때로는 허황되어 보이는 이야기도 나온다. 심지어 사실이나 자료들과 맞지 않는 내용도 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점 때문에 역사 자료로 가치가 높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를 비롯한 다른 역사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일이나 사건까지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어린이
특히 《삼국유사》는 지금까지 보존된 책 중에서는 가장 먼저 단군 신화와 고조선의 역사를 쓰고 있다. 단군 신화를 우리 민족의 건국 신화로, 고조선을 최초의 국가로 인정하는 데 《삼국유사》가 큰 역할을 한 셈이다. 일연이 《삼국유사》에 단군 신화에 대해 쓴 까닭은 당시 고려가 원의 간섭을 받으면서 민족의식과 자주성을 표현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네이버 지식백과] 삼국유사 - 고려의 승려 일연이 쓴 삼국 시대의 역사책 (한국사 사전 2 - 역사 사건·문화와 사상, 2015. 2. 10., 책과함께어린이)
이러한 그의 인식은 삼국유사의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한국사콘텐츠, 김남윤
(삼국유사 서문 넣기) 스스로 서술하여 말하기를 “대저 옛 성인(聖人)은 예악(禮樂)으로 나라를 일으키고 인의(仁義)로 가르침을 베푸는 데 있어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왕(帝王)이 장차 일어날 때 부명(符命)에 응하거나 도록(圖籙)을 받아 반드시 범인(凡人)과 다름이 있은 연후에야 능히 큰 변화를 타고 대기(大器)를 잡고 대업(大業)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런즉 삼국(三國)의 시조(始祖)가 모두 신이(神異)한 데서 나왔다는 것이 어찌 괴이하다 할 수 있겠는가! 이 기이(紀異)가 제편(諸篇)의 첫머리에 실린 것은 그 뜻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본서는 김부식(金富軾)이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더불어 현존하는 한국 고대 사적(史籍)의 쌍벽으로서, ≪삼국사기≫가 여러 사관(史官)에 의하여 이루어진 정사(正史)이므로 그 체재나 문장이 정제(整齊)된 데 비하여, ≪삼국유사≫는 일연 혼자의 손으로 씌어진 이른바 야사(野史)이므로 체재나 문사(文辭)가 ≪삼국사기≫에 못 미침은 사실이나, 거기서 볼 수 없는 많은 고대 사료(史料)들을 수록하고 있어 둘도 없이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문헌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삼국유사 [三國遺事] (모발학 사전, 2003. 5. 22., 광문각)
≪삼국유사≫의 편찬자인 일연은 충렬왕의 명령에 따라 1277년부터 1281년까지 청도의 운문사에서 머물면서 불교를 일으키는 데 힘썼다.《삼국유사》는 바로 이 무렵에 쓰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어린이
일연은 승려였기 때문에 《삼국유사》에도 불교와 관련된 내용이 많이 담겨 있다. 특히 이름난 승려들이 한 일이나 불교에 관한 설화가 많이 실려 있으며 절이나 탑, 불상에 관한 중요한 자료도 싣고 있다. -어린이
군위 인각사에서 『삼국유사』를 완성하여 청도 지역의 삼국 시대에 대한 기록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이 서술되어 있다. -향토
1278년에는 그동안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 역대연표(歷代年表)』를 인흥사에서 간행하였다. 이것은 『 삼국유사(三國遺事)』 왕력(王歷) 편의 토대가 되었다. -콘텐츠
이 역대 연표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향토, 강래업
제자 무극(無極)이 1310년대에 《삼국유사》를 간행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삼국유사 [三國遺事] (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한국사전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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