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국문 유서"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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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중 [[선조]]가 의주에 피신해 있을 당시 백성들에게 내린 한글 교서이다. 장지에 10행 429자로 작성했으며,‘[[유서지보|유서지보諭書之寶]]’가 세 군데 찍혀 있다. 임진왜란 당시 많은 조선인이 포로가 되어 왜군에 협력했는데, 선조는 이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한글 교서를 반포함으로써 포로가 된 백성을 회유해 돌아오게 하였다. 이 유서는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오기 한 달 전에 내려진 것인데, 당시 김해성을 지키던 장수 [[권탁|권탁權卓]], 1544~1593은 이 문서를 가지고 적진에 침투해 적병 수십 명을 죽이고 포로 100여 명을 구출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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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중 [[선조]]가 의주에 피신해 있을 당시 백성들에게 내린 한글 교서이다. 장지에 10행 429자로 작성했으며,‘[[유서지보|유서지보(諭書之寶)]]’가 세 군데 찍혀 있다. 임진왜란 당시 많은 조선인이 포로가 되어 왜군에 협력했는데, 선조는 이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한글 교서를 반포함으로써 포로가 된 백성을 회유해 돌아오게 하였다. 이 유서는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오기 한 달 전에 내려진 것인데, 당시 김해성을 지키던 장수 [[권탁|권탁(權卓)]], 1544~1593은 이 문서를 가지고 적진에 침투해 적병 수십 명을 죽이고 포로 100여 명을 구출해 돌아왔다.
이 교서는 권탁의 후손이 보관하다가 1854년철종5 김해시 흥동에 [[어서각|어서각御書閣]]이 건립되면서 이곳에 보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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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서는 권탁의 후손이 보관하다가 1854년철종5 김해시 흥동에 [[어서각|어서각(御書閣)]]이 건립되면서 이곳에 보관되었다.  
 
유서의 내용은 강제로 왜인에게 붙들려 간 백성은 죄를 묻지 않는다는 것과 왜군을 잡아오거나 왜군의 정보를 알아오는 사람, 또는 포로로 잡힌 우리 백성들을 설득해 데려오는 사람에게는 천민, 양민을 가리지 않고 벼슬을 내린다는 것이었다. 이 자료를 통해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으며, 당시 사용된 한글의 용례를 확인할 수 있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92-93쪽.</REF>
 
유서의 내용은 강제로 왜인에게 붙들려 간 백성은 죄를 묻지 않는다는 것과 왜군을 잡아오거나 왜군의 정보를 알아오는 사람, 또는 포로로 잡힌 우리 백성들을 설득해 데려오는 사람에게는 천민, 양민을 가리지 않고 벼슬을 내린다는 것이었다. 이 자료를 통해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으며, 당시 사용된 한글의 용례를 확인할 수 있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92-93쪽.</REF>
  

2017년 5월 23일 (화) 16:23 판

선조 국문 유서
한글팀 선조국문유서 01 표지.jpg
한자명칭 宣祖 國文 諭書
영문명칭 King Seonjo’s writing to his people written in Korean while he was in retreat at Uiju during the Imjin Wars
작자 선조
작성시기 1593년
간행시기 조선후기
기탁처 권이도 기탁
소장처 부산시립박물관, 보물 제951호
유형 고문서
크기(세로×가로) 80×40㎝
판본 필사본
수량 1章
표기문자 한글, 한자



정의

임진왜란선조가 의주에 피신해 있을 당시 백성들에게 내린 한글 교서

내용

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임진왜란선조가 의주에 피신해 있을 당시 백성들에게 내린 한글 교서이다. 장지에 10행 429자로 작성했으며,‘유서지보(諭書之寶)’가 세 군데 찍혀 있다. 임진왜란 당시 많은 조선인이 포로가 되어 왜군에 협력했는데, 선조는 이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한글 교서를 반포함으로써 포로가 된 백성을 회유해 돌아오게 하였다. 이 유서는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오기 한 달 전에 내려진 것인데, 당시 김해성을 지키던 장수 권탁(權卓), 1544~1593은 이 문서를 가지고 적진에 침투해 적병 수십 명을 죽이고 포로 100여 명을 구출해 돌아왔다. 이 교서는 권탁의 후손이 보관하다가 1854년철종5 김해시 흥동에 어서각(御書閣)이 건립되면서 이곳에 보관되었다. 유서의 내용은 강제로 왜인에게 붙들려 간 백성은 죄를 묻지 않는다는 것과 왜군을 잡아오거나 왜군의 정보를 알아오는 사람, 또는 포로로 잡힌 우리 백성들을 설득해 데려오는 사람에게는 천민, 양민을 가리지 않고 벼슬을 내린다는 것이었다. 이 자료를 통해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으며, 당시 사용된 한글의 용례를 확인할 수 있다.[1]

『선조 국문 유서』의 소장과정

『선조 국문 유서』는 당시 김해수성장(金海守城將)이었던 권탁(權卓)이 지니고 있던 것을 집안 대대로 전해 오다가 철종 6년(1855)에 김해시 흥동(興洞)에 권탁을 기리는 현충사(顯忠祠)를 지으면서 곁에 세워진 어서각(御書閣)에 봉안되었다. 1975년 7월에 이 문서를 도난당했다가 1년 반 뒤에 다시 찾았다. 1975년에 지방 문화재로, 1988년 6월 16일에는 보물 제951호로 지정되었다. 2002년 5월부터 부산시립박물관(현 부산광역시 부산박물관)에 대여 전시되고 있다.[2]

언어학적 연구로 보았을 때 『선조 국문 유서』는 당시 만력 21년(1593)시기의 쓰여진 한글 문서로 16세기와 17세기 명청교체기 시기의 국어 현실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3]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선조 선조 국문 유서 A는 B를 저술하였다 1593
임진왜란 선조 A는 B와 관련이 있다
임진왜란 선조 국문 유서 A는 B와 관련이 있다
권탁 선조 국문 유서 A는 B와 관련이 있다
권탁 안동 권씨 A는 B에 포함된다
안동 권씨 선조 국문 유서 A는 B를 소장한다 1593년~1855년
어서각 선조 국문 유서 A는 B를 소장한다 1855년~2002년
부산시립박물관 선조 국문 유서 A는 B를 소장한다 2002년~현재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855년~2002년 선조 국문 유서는 어서각에 봉안되었다
2002년~현재 선조 국문 유서는 부산시립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5.129623 129.092841 선조 국문 유서는 부산시립박물관에서 보관되고 있다

겔러리

주석

  1.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92-93쪽.
  2. 김유범, 「한글 고문서 <宣祖國文諭書>에 대하여」, 『국어사연구』, Vol 18, 2014, 194-195쪽.
  3. 이병근, 「<선조 국문 유서>의 국어학적 의의」, 『冠嶽語文硏究』,, Vol 21, 1996, 16-17쪽.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이병근, 「<선조 국문 유서>의 국어학적 의의」, 『冠嶽語文硏究』,, Vol 21, 1996, 1-18쪽.
    • 김유범, 「한글 고문서 <宣祖國文諭書>에 대하여」, 『국어사연구』, Vol 18, 2014, 193-218쪽.

유용한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