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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19일 (금) 02:18 판
학일(學一) | |
대표명칭 | 학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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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學一 |
생몰년 | 1052년(문종 6)-1144년(인종 22) |
시호 | 원응(圓應) |
자 | 봉거(逢渠) |
성씨 | 이씨(李氏) |
속명 | 학일(學一) |
출신지 | 충청북도 서원(西原) |
승탑비 |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 |
정의
고려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학일은 1052년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 지방인 서원(西原)에서 출생하였다. 속성은 이씨(李氏)이고, 아버지는 이응첨(李應瞻)으로 관직에 진출하지는 않았다. 어머니는 이씨(李氏)였으며, 용이 집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을 하였다고 한다.
출가수행
학일은 1062년 11세에 출가하여 진장(眞藏)의 제자가 되었고, 1064년 13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혜함(惠含)의 문하에서 선지(禪旨)에 통달하였고, 경률론(經律論)에 대하여 깊이 연구했으며, 특히 『대반야경(大般若經)』에 박통하여 반야(般若) 삼매(三昧)의 경지에 도달했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의 질병까지 고쳐주었으므로 크게 존경을 받았다.[1] 1084년에는 광명사(廣明寺)에서 승과(僧科)에 급제하였다.
활동
1086년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이 송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천태종(天台宗)을 개창하자, 선종(禪宗)의 승려들 가운데 10명 중 6~7명은 천태종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학일은 의천의 수차례 요청에도 불구하고 선종의 승려로 남았다. 특히 1098년에 의천은 홍원사(弘圓寺)에서 원각경(圓覺經) 법회(法會)를 개최하여 학일을 법회의 부강(副講)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학일은 이를 사양하고 단지 청강만하였다.
숙종의 네번째 아들이자 의천의 제자인 원명국사 징엄(圓明國師 澄儼)이 9살 때 병이 나자, 의천은 학일에게 도움을 청하였는데, 학일이 대반야(大般若)를 염(念)하자 왕자가 살아났고, 이에 의천은 더욱 존경하였으며, 숙종의 명에 의해 학일은 법주사(法住寺)의 주지가 되었다.[2]
학일은 1106년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어 가지사(迦智寺)에 주석하였고, 다시 귀산사(龜山寺)로 옮겨 갔다. 1108년 선사(禪師)가 되었으며, 1113년 내제석원(內帝釋院)에 주석하였다. 1114년 대선사(大禪師)가 되었으며, 1117년 안화사(安和寺)에 주석하였다.
1122년 예종이 학일을 왕사(王師)로 삼으려 하였으나 사양하였다. 예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한 뒤에야 명경전(明慶殿)에서 제자의 예를 행하고 왕사로 책봉되었다.[3]
1123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지속되었는데, 이때 학일이 기도하여 비를 내렸다는 신이(神異)한 행적이 전해진다.
5년 계묘(癸卯)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어 …(결락)… 국사가 옥촉정(玉燭亭)에서 대선사 득선(得善) 등과 함께 선지(禪旨)를 거양(擧揚)하였더니, 다음 날 큰 비가 내려 밭과 들이 해갈되었다. 그 후 홍수와 가뭄의 천재지변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면 효험이 없을
때가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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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7쪽 |
1126년 학일은 운문사(雲門寺)로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나, 인종은 이를 허락하는 대신 도성과 가까운 안남(安南) 경암사(瓊嵒寺)에 머물면서 왕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학일은 재차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며, 마침내 1129년 9월 19일 왕사(王師)의 직인(職印)을 반납하고 몰래 경암사를 출발하여 1129년 10월 19일 운문사로 들어갔다. 인종은 소식을 듣자마자 신하를 통해 친서(親書)를 전달하고, 왕사(王師)의 직인(職印)을 돌려보냈으며, 학일의 가는 길을 살피도록 명하였다.
대금 천회 4년 병오에 운문사로 물러날 것을 청했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고 이르기를 ..... 인보를 돌려보냈다. | ||
출처: 17-18쪽. |
학일이 운문사(雲門寺)에 머물자, 수많은 학자들이 찾아들었다. 학자들에게 학일은 '자기를 밝히는 일을 급무(急務)'로 삼도록 가르쳤다. 운문사에 주석하는 동안에 왕으로부터 갖가지 물품을 비롯하여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며, 운문사를 중흥시키는 데 큰 몫을 하였다.[4]
10월 19일 운문사에 들어가니 …(결락)… 중국 보리달마의 현신이라 찬탄하며, 사방의 배우는 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국사가 그 무리들을 가르쳐 자기를 밝게 하는 것을 급한 임무로 삼아 엄격하게 단련하니, 묘법을 비밀리에 전하였다고 이를 만하다. 선열 외에도 ... 산문의 융성함이 근고 이래로 없었다. | ||
출처: 18쪽. |
1142년 산불이 크게 나 대중들이 총동원되었으나 끄지 못했는데, 학일이 산을 향해 축원하자 갑자기 비가 내려 불이 꺼졌다는 일화도 전한다. [5]
황통 2년 임술 2월 8일에 산불이 크게 일어났는데, 대중이 끄려 하였으나 불길을 잡지 못하였다. 국사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산을 향하여 기원하니 비가 내려 불이 꺼졌다. 그 후에도 이와 같은 일이 …(결락)…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 ||
출처: |
입적
학일은 1144년 10월 발병하여 입적에 이르렀으나, 신이한 행적을 보이며 스스로 입적을 늦추었다. 이후 11월에 다시 한번 병세를 보여 왕에게 올리는 유언장을 작성하였고, 12월 9일 임종게(臨終偈)를 설하고, 가부좌(跏趺坐)하며 단정히 앉아 입적하였다. 세속의 나이는 93세이며, 승랍은 82세였다.
4년 갑자 10월 21일에 병이 들었다. 28일에 국사가 직접 진맥하고 ...... 비록 방온도 미칠 수 없을 것이다. | ||
출처: 18-19쪽. |
학일이 입적하자, 인종은 1145년 1월 24일에 학일을 국사(國師)로 책봉하고 시호를 원응(圓應)이라 추증하였다. 학일의 문인들은 그의 행적을 기리는 비의 건립을 왕에게 청하였고. 윤언이(尹彦頤)가 왕명에 의하여 비문을 지었다.
문인이 유언장, 인보와 입적할 때의 사정을 기록하여 역마를 타고 가서 아뢰엇다. 왕이 부고를 듣고 크게 애도하며 경탄하여 3일간 조회를 파하였다. ... 인종이 신 언이에게 비문을 지으라고 명하였다. | ||
출처: 19-2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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