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운문사 동서 삼층석탑"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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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웅보전 앞에 동·서로 서 있는 이 두 탑은 2단의 기단위에 3층의 탑의 몸통을 올린 모습으로 규모와 양식이 서로 같다.<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06780000,37 청도 운문사 동ㆍ서 삼층석탑]",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재검색』<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 | + | 운문사 대웅보전 앞에 동·서로 서 있는 이 두 탑은 2단의 기단위에 3층의 탑의 몸통을 올린 모습으로 규모와 양식이 서로 같다.<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06780000,37 청도 운문사 동ㆍ서 삼층석탑]",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재검색』<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 탑의 몸통에는 부처를 보호하는 사천왕(四天王), 인왕(仁王), 팔부중(八部衆), 십이지신장(十二支神將) 등의 신장들을 표현한 9세기경의 시대적인 흐름을 담아내고 있다.<ref>진관스님,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dataType=99&contents_id=GC05500782 청도 운문사 동·서 삼층 석탑]",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기단부가 몹시 부서져 무너지기 직전이던 것을 일제시대에 보수하였는데 이 때에 팔부중상(八部衆像) 등 일부를 새로운 돌로 보충하였다.<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06780000,37 청도 운문사 동ㆍ서 삼층석탑]",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재검색』<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 한편 대웅보전이 위치한 자리의 지세가 전복하기 쉬운 작은 배 같다고 하여 지세를 누르기 위해 고려 때 비로전 앞에 쌍탑을 세워졌다고 전해지기도 한다.<ref>진관스님,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dataType=99&contents_id=GC05500782 청도 운문사 동·서 삼층 석탑]",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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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립경위는 930년 보양국사(寶壤國師)가 중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서해 용왕이 보양국사를 용궁으로 맞아들여 금빛 비단 가사 한 벌을 주면서 용왕의 아들 이목에게 보양 국사를 모시고 가 작갑(鵲岬)에 절을 짓도록 부탁하였다. 이에 보양국사가 폐사를 일으키고 호고산 금수동에서 내려다보니 까치가 땅을 쪼고 있었다. 보양국사는 용왕이 작갑이라고 한 말이 생각나서 그 곳을 파보니 예전의 전돌이 나왔다. 이것을 모아 오층탑을 조성하고 절을 세워 작갑사라 했는데 지금은 작갑사(鵲岬寺) 전탑은 거의 없어졌다.<ref>진관스님,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dataType=99&contents_id=GC05500782 청도 운문사 동·서 삼층 석탑]",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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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17일 (수) 16:51 판
정의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운문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1]
내용
운문사 대웅보전 앞에 동·서로 서 있는 이 두 탑은 2단의 기단위에 3층의 탑의 몸통을 올린 모습으로 규모와 양식이 서로 같다.[2] 탑의 몸통에는 부처를 보호하는 사천왕(四天王), 인왕(仁王), 팔부중(八部衆), 십이지신장(十二支神將) 등의 신장들을 표현한 9세기경의 시대적인 흐름을 담아내고 있다.[3] 기단부가 몹시 부서져 무너지기 직전이던 것을 일제시대에 보수하였는데 이 때에 팔부중상(八部衆像) 등 일부를 새로운 돌로 보충하였다.[4] 한편 대웅보전이 위치한 자리의 지세가 전복하기 쉬운 작은 배 같다고 하여 지세를 누르기 위해 고려 때 비로전 앞에 쌍탑을 세워졌다고 전해지기도 한다.[5]
건립경위는 930년 보양국사(寶壤國師)가 중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서해 용왕이 보양국사를 용궁으로 맞아들여 금빛 비단 가사 한 벌을 주면서 용왕의 아들 이목에게 보양 국사를 모시고 가 작갑(鵲岬)에 절을 짓도록 부탁하였다. 이에 보양국사가 폐사를 일으키고 호고산 금수동에서 내려다보니 까치가 땅을 쪼고 있었다. 보양국사는 용왕이 작갑이라고 한 말이 생각나서 그 곳을 파보니 예전의 전돌이 나왔다. 이것을 모아 오층탑을 조성하고 절을 세워 작갑사라 했는데 지금은 작갑사(鵲岬寺) 전탑은 거의 없어졌다.[6]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청도 운문사 동서 삼층석탑 | 청도 운문사 | A는 B에 있다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진홍섭, "청도 운문사 동·서 삼층석탑",
『한국민족문화대백과』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청도 운문사 동ㆍ서 삼층석탑",
『문화재검색』online , 문화재청. - ↑ 진관스님, "청도 운문사 동·서 삼층 석탑",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청도 운문사 동ㆍ서 삼층석탑",
『문화재검색』online , 문화재청. - ↑ 진관스님, "청도 운문사 동·서 삼층 석탑",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진관스님, "청도 운문사 동·서 삼층 석탑",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청도의 지정 문화재』 (청도군, 2005) 윤기영·심효섭, 『호거산 운문사』-한국의 명찰 10(대한 불교 진흥원,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