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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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징은 880년에 입적(入寂)<ref>승려(僧侶)의 죽음을 뜻한다. 생사의 번뇌를 벗어나 열반에 들어간다는 의미이다</ref> 세속의 나이는 77세, 승랍은 52세였고 제자는 800여 명에 달했다. 이후 3년 뒤인 883년에 제자들이 행장(行狀)<ref>죽은 사람이 평생 살아온 일을 적은 글</ref>을 지어 올리며 선사를 기리는 탑비를 건립할 것을 왕에게 청하니, 왕이 그 마음을 갸륵히 여겨 시호를 보조(普照), 탑호를 창성(彰聖), 절 이름을 [[장흥 보림사|보림(寶林)]]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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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광명(廣明) 원년(880, 헌강왕 6년) 3월 9일 여러 제자에게 "나는 현생의 보업(報業)이 다하여 나무가 재가 되듯 사라지려니, 너희들은 마땅히 불법을 잘 지키고 게으르지 말라"고 일렀다. 4월 12일 유시(酉時)부터 술시(戌時)까지 천둥, 번개가 온 산을 울렸다. 13일 한밤중에 상방(上房)의 땅이 진동하더니 날이 샐 무렵 오른쪽으로 누운 채로 임종했다. 향년 77세로 승랍 52세였다. 이에 제자 영혜(英惠), 청환(淸奐) 등 800여 인은 의리가 어버이를 잃은 듯 깊었고 정이 하늘과 땅에 사무쳐 추모하여 울부짖으니 그 소리가 계곡을 울렸다.
 
{{Blockquote|광명(廣明) 원년(880, 헌강왕 6년) 3월 9일 여러 제자에게 "나는 현생의 보업(報業)이 다하여 나무가 재가 되듯 사라지려니, 너희들은 마땅히 불법을 잘 지키고 게으르지 말라"고 일렀다. 4월 12일 유시(酉時)부터 술시(戌時)까지 천둥, 번개가 온 산을 울렸다. 13일 한밤중에 상방(上房)의 땅이 진동하더니 날이 샐 무렵 오른쪽으로 누운 채로 임종했다. 향년 77세로 승랍 52세였다. 이에 제자 영혜(英惠), 청환(淸奐) 등 800여 인은 의리가 어버이를 잃은 듯 깊었고 정이 하늘과 땅에 사무쳐 추모하여 울부짖으니 그 소리가 계곡을 울렸다.
 
|출처=이지관,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라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10-111쪽.}}
 
|출처=이지관,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라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10-111쪽.}}
체징은 880년에 입적하였으며, 세속의 나이는 77세, 승랍은 52세였고 제자는 800여 명에 달했다. 이후 3년 뒤인 883년에 제자들이 행장(行狀)을 지어 올리며 선사를 기리는 탑비를 건립할 것을 왕에게 청하니, 왕이 그 마음을 갸륵히 여겨 시호를 보조(普照), 탑호를 창성(彰聖), 절 이름을 [[장흥 보림사|보림(寶林)]]이라 하였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2017년 4월 19일 (수) 22:19 판


체징(體澄)
파일:Bojoseonsa.JPG
장흥 보림사 조사전(長興 寶林寺 祖師殿) 내 진영
대표명칭 체징
영문명칭 Chejing
한자 體澄
생몰년 804(애장왕 5)-880(헌강왕 6)
시호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
탑호 창성(彰聖)
성씨 김씨(金氏)
출신지 웅진(熊津)
승탑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
승탑비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


정의

신라시대 후기 선종(禪宗)의 승려이다.

생애

가계와 탄생

체징(體澄)은 804년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 지방인 웅진(熊津)에서 출생하였다. 속성은 신라 왕성(王姓)인 김씨이고, 집안은 대대로 명망과 어진 가풍을 이어왔다. 물을 관장하는 전설 속의 신(神)인 하백(河伯)과 같이 건장한 체격을 가진 금발 머리의 아이였으며, 어려서부터 세속을 떠나고자 하는 뜻이 뚜렷했다.

Quote-left.png 선사를 잉태하던 해 어머니의 꿈에, 둥근해가 공중에 떠서 빛을 내려 배를 뚫고 지나갔다. 이 때문에 놀라 깨어 문득 임신하였음을 깨달았다. 1년이 지나도록 태어나지 않으니, 어머니가 상서로운 꿈을 미루어 살펴 좋은 인연이 이루어지도록 빌고, 식사에 고기를 멀리하며 술을 금하고 계율로써 태교하면서 복전(三寶)을 섬겼다. 이로 말미암아 해산의 괴로움을 이기고 아들을 낳는 경사를 맞았다. 선사는 체모가 커서 산이 우뚝 선 듯하고 기색이 윤택하여 하백(河伯)과 같았으며, 치아가 고르고 금발이 특이하여 마을 사람들이 찬탄하고 친척들이 모두 놀라와 했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라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04-105쪽.


출가수행

체징은 화산(花山) 권법사(勸法師)에게 출가한 후, 827년 24세의 나이로 가량협산(加良峽山) 보원사(普願寺)[1]에서 구족계(具足戒)[2]를 받았다. 이후 그는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 주석하고 있던 염거(廉居)를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다. 염거는 신라에 처음으로 선종(禪綜)을 도입한 승려인 도의(道義)의 제자로, 이러한 사실을 통해 체징은 도의부터 이어지는 법맥을 전해 받고자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3]

Quote-left.png 태화(太和) 정미년(827, 흥덕왕 2년)에 가량협산 보원사[4]에 이르러 구족계를 받을 때 한번은 계단장(戒壇場)에 들어가 7일동안 도를 닦는데, 문득 어떤 이상한 꿩이 갑자기 순하게 날아들었다. 어떤 옛일을 잘 아는 사람이 "옛날에는 진창(陳倉)에서 패왕(覇王)의 도(道)를 드러냈는데, 오늘은 절에 날아드니 장차 불법을 일으킬 큰스님이 나타날 징조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라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05-106쪽.


입당유학

837년 34세의 체징은 동료들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이는 조사(祖師)[5]도의선사와 같이 중국 선종(禪宗)의 인가를 받아오기 위해서였으나,[6] 자신이 배웠던 선법(禪法)[7]이 중국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만 3년만에 귀국하였다.

Quote-left.png 개성(開成) 2년(837, 희강왕 2년) 정사(丁巳)에 동학인 정육(貞育), 허회(虛懷) 등과 함께 바닷길로 서쪽 중국에 들어갔다. 선지식을 찾아 15주를 편력하면서 온누리가 좋아하고 하고자 함이 같으며 성상(性相)이 다르지 않음을 알았다. 이에 "우리 조사께서 말씀하신 바에 더할 것이 없는데 어찌 수고로이 멀리 가겠는가"라고 이르며, (구법의) 발길을 멈추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라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07쪽.


귀국 및 활동

840년 평로사(平虜使)를 따라 신라에 돌아온 체징은 고향을 교화하다가, 55세 때인 858년에는 지금의 광주 지방인 무주(武州)의 황학난야(黃壑蘭若)로 거처를 옮긴다. 당시 선사의 명성을 접한 헌안왕(憲安王)[8]이 장사현(長沙縣)[9]의 부수(副守)인 김언경(金彦卿)을 보내 선사를 왕경(王京)으로 모시고자 하였다. 체징은 여러번 고사하였으나, 거듭된 왕의 요청에 가지산사(迦智山寺)로 옮겨 갔다.

Quote-left.png 대왕이 소문을 듣고 도를 우러러 꿈속에서조차 사모하여, 선문을 열고자 선사에게 서울로 들어오기를 청했다. 여름 6월에 장사현(長沙縣) 부수(副守)[10] 김언경(金彦卿)을 보내어 차와 약을 가지고 가서 맞이하게 했다. 선사는 구름과 바위를 벗삼아 지내는 것을 편안히 여겼고, 또 결계(結戒)의 달[11]이었으므로 정명(淨名)의 병을 핑계대고 육조(六祖)처럼 사양했다. 겨울 10월에 왕이 다시 명을 내려 승려와 속인 사신(使臣)인 영암군 승정(僧正) 연훈법사(連訓法師)와 교지를 받든 풍선(馮瑄) 등을 보내어 왕의 뜻을 전해 가지산사(迦智山寺)로 옮겨 거처할 것을 청했다. 드디어 마지못해 석장을 날려 가지산문(迦智山門)으로 옮겨 들어가니, 그 산은 곧 원표대덕(元表大德)이 옛날에 거처하던 곳이었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라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08-109쪽.


체징이 가지산사로 들어간 이후, 김언경이 제자의 예를 표하며 선사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사재(私財)를 내어 비로자나불 1구를 봉헌하였다. 또한 헌안왕은 금과 조(租)를 내려 사찰을 장엄하는 비용에 충당토록 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인 861년에는 각처에서 시주한 재물로 사찰을 넓히는 불사(佛事)[12]가 이루어졌고, 체징은 이후 20여 년간 이곳에 주석하며 도의로부터 이어지는 선법(禪法)을 전파하였다.

Quote-left.png 함통(咸通) 신사년(辛巳年, 861, 경문왕 1년)에는 시방(十方)에서 시주한 재물로써 절을 넓히고 그 낙성일에 선사가 사찰에 이르니, 암수무지개가 법당 안으로 뚫고 들어와 갈라진 빛이 방안을 비추고 반짝이는 빛이 사람을 비추었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라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109쪽.


입적

체징은 880년에 입적(入寂)[13] 세속의 나이는 77세, 승랍은 52세였고 제자는 800여 명에 달했다. 이후 3년 뒤인 883년에 제자들이 행장(行狀)[14]을 지어 올리며 선사를 기리는 탑비를 건립할 것을 왕에게 청하니, 왕이 그 마음을 갸륵히 여겨 시호를 보조(普照), 탑호를 창성(彰聖), 절 이름을 보림(寶林)이라 하였다.


Quote-left.png 광명(廣明) 원년(880, 헌강왕 6년) 3월 9일 여러 제자에게 "나는 현생의 보업(報業)이 다하여 나무가 재가 되듯 사라지려니, 너희들은 마땅히 불법을 잘 지키고 게으르지 말라"고 일렀다. 4월 12일 유시(酉時)부터 술시(戌時)까지 천둥, 번개가 온 산을 울렸다. 13일 한밤중에 상방(上房)의 땅이 진동하더니 날이 샐 무렵 오른쪽으로 누운 채로 임종했다. 향년 77세로 승랍 52세였다. 이에 제자 영혜(英惠), 청환(淸奐) 등 800여 인은 의리가 어버이를 잃은 듯 깊었고 정이 하늘과 땅에 사무쳐 추모하여 울부짖으니 그 소리가 계곡을 울렸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라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10-111쪽.


참고문헌

  • 곽승훈, 「김영의 보조선사비명 찬술」, 『신라사학보』 제27호, 신라사학회, 2013.4, 197-232쪽.
  • 곽승훈, 「보조체징선사의 선교일체와 보현행원신앙」, 『사학연구』 111, 한국사학회, 2013.09, 125-158쪽.
  • 박미선, 「신라 헌안왕의 선종 정책 -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100, 한국역사연구회, 2016, 211-239쪽.
  • 이계표, 「신라 하대의 가지산문」, 『역사학연구』 7, 호남사학회, 1993, 265-294쪽.
  • 이영호, 「신라 가지산문의 법통과 위상 인식」, 『신라문화』 32,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2008, 271-297쪽.
  • 이지관,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라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96-114쪽.
  • 조범환, 「新羅 下代 體澄 禪師와 迦智山門의 개창」, 『정신문화연구』 Vol.28 No.3, 한국학중앙연구원, 2005, 3-24쪽.
  • 지문갑(종민), 「도의, 체징과 가지산선문에 관한 연구」,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5.
  • 진창영, 「신라하대 선불교 도입기 선사들의 교화실천과 교학사상: 도의, 체징을 중심으로」, 『교육사상연구』 제29권 제4호, 한국교육사상연구회, 2015, 167-196쪽.
  • 최선희, 「체징과 가지산문 개창」, 『역사학연구』 25, 호남사학회, 2005, 1-27쪽.
  • 최완수,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24 - 신라 선종과 비로자나불의 출현", 『신동아』 2001년 6월호.

각주

  1. 충청남도 서산군 운산면 용현리에 있던 절로, 신라 때 창건했으며 일명 강당사(講堂寺)라고도 한다
  2. 비구와 비구니가 받아 지켜야 할 온전한 계율이다. 비구는 250계, 비구니는 348계
  3. 조범환, 「新羅 下代 體澄 禪師와 迦智山門의 개창」, 『정신문화연구』 Vol.28 No.3, 2005, 7쪽.
  4. 충남 서산군 운산면 용현리 성왕산에 있던 절로 신라말 고려초기에 활약했던 법인국사(法印國師) 탄문(坦文, 900~975)의 비가 있다. 이지관,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라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05쪽.
  5. 후세 사람의 귀의와 존경을 받을 만한 승려이거나 1종 1파를 세운 승려에게 붙여지는 칭호이다
  6. 최완수,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24 - 신라 선종과 비로자나불의 출현", 『신동아』 2001년 6월호. 2017년 03월 01일 확인.
  7. 선(禪)에 대한 가르침. 선정(禪定)에 의한 수행법. 선종(禪宗)에 있어서 좌선의 방법. 경론에 의지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부처님의 심인을 전해주는 방법
  8. 신라의 마흔 일곱째 임금
  9. 오늘날의 전라북도 고창 일대. "장사현", 『디지털고창문화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17년 03월 01일 확인.
  10. 조선시대때 종친부에서 종실과 종친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종4품의 벼슬
  11. 계율을 결성하고 보호하여 유지하는 달이란 뜻으로 하안거(夏安居)의 기간을 가리킨다. 곧 매년 4월 16일부터 7월 15일에 이르는 기간으로 참선, 불교연구, 정진, 수양하는 기간을 말한다. 이지관,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라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109쪽.
  12. 불가에서 행하는 모든 일
  13. 승려(僧侶)의 죽음을 뜻한다. 생사의 번뇌를 벗어나 열반에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14. 죽은 사람이 평생 살아온 일을 적은 글

이 문서 인용하기

  1. 오프라인 저작에서 인용할 경우
  2. 온라인 저작에서 인용할 경우
    •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문정보학 교실, "{{PAGENAME}}", 『한국 기록유산의 디지털 스토리텔링 자원 개발』, 2017.
  3. 위키 문서에서 인용할 경우
    •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문정보학 교실, "승탑비문 교열예시", 『한국 기록유산의 디지털 스토리텔링 자원 개발』,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