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기록화관 개관

"하인두-동명목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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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16일 (일) 21:06 판


동명목재
하인두-동명목재-1973s.jpg
작가 하인두
제작연도 1973년
규격 300호(197x290.9cm)
유형 경제
분류 유화
소장처 미상



개요

1970년대 당시 생산능력 세계5위의 국제적 규모의 합판생산업체로 성장한 동명목재.

설명

작품 소재

동명목재는 부산에 뿌리를 둔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합판공장으로, 1970년대에는 7년간 수출 1위 자리를 고수했을 정도로 견실한 기업이었다. 부산에 기반을 둔 덕분에 한국전쟁의 참화를 피해갈 수 있었던 동명목재는 전후복구 사업과 더불어 대단한 호황을 누렸다. 1961년에 등장한 박정희 정권이 산림녹화정책을 추진하면서 '벌목금지' 조치를 내렸으나, 동명목재는 1959년부터 인도네시아 산 원목(나왕)을 수입하기로 사업 방침을 바꾼 것이 시대 상황과 맞아 떨어졌다.[1]
이후 동명산업(주), 동명중공업(주), 동명식품(주) 등을 설립하고 동명목재그룹으로 성장하였으나, 1980년 제5공화국 신군부에 의해 그룹이 와해되었다.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는 22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등이 동명목재의 창업자인 고 강석진씨와 그의 아들 강정남(69·현 동명문화학원 이사장)씨 등 이사진을 반사회적 기업인으로 지목해 명예를 훼손했고, 범죄 혐의가 없는데도 강제 수사를 하면서 고문 등의 가혹행위를 저질렀다”고 밝히고,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사과하고 재발방지에 힘쓸 것을 국가에 권고하였다.[2]

작품 배경

부산 용당동에 있었던 동명목재 공장 건물 뒷편의 바다물 속에 필리핀, 말레이지아,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수입한 원목(나왕)을 바다에 그대로 띄어 놓은 장면이 인상적이다. 배로 수입된 직경 1m, 길이 15m~20m의 나왕을 바다에 띄어 놓고 원목관리계원들이 그 위를 돌아다니며 나무의 굵기 등의 치수를 재고 흠집 여부를 판별하여 등급과 규격 등을 매겼다고 한다.[3]

관련 민족기록화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하인두 하인두-동명목재 A는 B를 그렸다 1973년
하인두-동명목재 동명목재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하인두-동명목재 합판산업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동명목재 동명목재 노동자투쟁 A는 B와 관련이 있다 1980년
동명목재 동명목재 재산헌납사건 A는 B와 관련이 있다 1980년
신군부 동명목재 재산헌납사건 A는 B을 일으켰다 1980년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973년 하인두가 하인두-동명목재를 제작하였다.
1979년 총무처가 하인두-동명목재를 대여하였다.
1980년 신군부동명목재 재산헌납사건을 일으켰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575603 126.975119 하인두-동명목재이 총무처에 대여되었다.

그래프

참고문헌

  •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민족기록화 경제편』, 정문사문화, 1992년.

주석

  1. 정순형, "정순형의 부산기업 스토리 - 동명목재", 『부산일보』, 2014년 07월 19일.
  2. 권오성, "진실위, 신군부가 동명목재 재산 강탈", 『한계레신문』, 2008년 10월 22일.
  3. 류지아, "성창목재 합판을 만든 사람들", 『부산문화역사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04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