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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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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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에는 비석 건립 관계자에 찬자와 서자 외에 자료를 모은 사람의 역할을 기록하였는데, 비문에 따르면 수철의 문하제자인 음광(飮光)이 비석 건립을 위한 자료를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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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에는 수철의 문하제자인 음광(飮光)이 비석 건립을 위한 자료를 모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Blockquote|문하제자 비구 음광(飮光)이 글을 모으고…(門下弟子比丘飮光咠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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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문하제자 비구 음광(飮光)이 글을 모으고…(門下弟子比丘飮光咠十)<ref>종래의 연구에서는 "飮光" 다음에 오는 글자를 누락된 것으로 판단하여, 음광을 각자승(刻字僧)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서 "飮光" 다음에 오는 글자를 "咠十"로 판독할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음광이 자료를 모은 역할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정선종, 176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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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16일 (일) 15:58 판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南原 實相寺 秀澈和尙塔碑)
(南原 實相寺 秀澈和尙塔碑)
BHST Stele.png
대표명칭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南原 實相寺 秀澈和尙塔碑)
한자 南原 實相寺 秀澈和尙塔碑
주소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길 94-129(입석리) 실상사
문화재 지정번호 보물 제34호
문화재 지정일 1963년 1월 21일
승려 수철


정의

전라남도 남원시 산내면 실상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고승 수철(秀澈, 817~893)의 탑비.

탑비

전체 높이 2.9m, 비신 높이 1.68m, 너비 1.12m. 탑비는 대석(臺石), 비신, 이수(螭首)로 구성되어 있다.

수철화상은 893년(진성왕 7) 5월 4일 입적하였는데, 탑비의 뒷면에 새겨진 음기(陰記)에 따르면, 탑비는 905년(효공왕 9) 10월 15일에 세워지고, 1714년(숙종 40)에 중건[1]되었다.


Quote-left.png □□2년 용집(龍集) 을축(乙丑) 10월 15일에 세움[2] Quote-right.png
출처: 하일식, "심원사 수철화상비", 『한국금석문집성』제13권, 한국국학진흥원, 2013, 24쪽.



Quote-left.png 강희 53년 갑오년(1714) 4월 일에 중건함 Quote-right.png
출처: 하일식, "심원사 수철화상비", 『한국금석문집성』제13권, 한국국학진흥원, 2013, 24쪽.


탑비의 형식은 당시의 일반적인 탑비 형식과 달리 귀부(龜趺)가 없고 대신 안상(眼象) 6구를 새긴 장방형의 대석 위에 비를 세웠으며, 비좌(碑座)에는 큼직한 복련(覆蓮)을 둘렀다.[3] 이수에는 여의주를 중심으로 다투는 듯 두 마리의 용이 좌우 대칭으로 자리 잡고 그 사이를 운문(雲文)으로 채운 형태가 전후면에 거의 동일하게 나타난다. 전면에는 ⌂형으로 액(額)을 마련 후 '능가보월탑비(楞迦寶月塔碑)' 라는 전액(篆額)을 새겼다.[4]

비문

비문은 마멸과 결락이 심하여 판독에 어려움이 많으며, 그로 인해 연구자마다 각기 다른 판독문을 제시하고 있다.[5] 비문은 비신 앞부분의 제목부터 찬자·서자·각자를 기록한 몇 행들이 흐트러져 있으며, 제목을 새긴 첫 행을 독립시키지 않고 그 아래에 서자 또는 각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관직명이 새겨져 있고, 행 머리와 중간에 여백을 둔 곳들이 많다.[6] 또한 이우(李俁)가 편찬한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는 수철화상탑비의 탁본이 남아 있는데, 그 중에는 현재 비석에서는 볼 수 없는 글자 20자가 포함되어 있다.[7]

비문의 찬자·서자·각자는 알 수 없으며, 비문에는 관직명만이 남아 있다.

Quote-left.png 당에 입조하여 하례를 받들고 천자의 쉐를 따라 동도(東都)에 갔던… (入朝奉賀□□□□駕遷幸東都使)

조청랑 검교우위장군 사궁대… 원사 등 동정원 … (朝請郞檢校右衛將軍司宮臺□□□院使等同正員)

Quote-right.png
출처: 하일식, 21쪽.


비문에는 수철의 문하제자인 음광(飮光)이 비석 건립을 위한 자료를 모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Quote-left.png 문하제자 비구 음광(飮光)이 글을 모으고…(門下弟子比丘飮光咠十)[8] Quote-right.png
출처: 하일식, 21쪽.


갤러리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참고문헌

주석

  1. 1714년 탑비가 중건된 사실과 관련하여, 원래의 비신을 다시 세운 것이라고 보는 의견(정선종, 하일식, 최경선)과, 다시 비신을 세우는 과정에서 비문을 새롭게 복각했을 것이라는 의견(추만호, 정병삼)이 있다.
  2. 정선종의 연구(정선종, 「실상사 수철화상탑비의 음기와 중건에 대하여」, 『불교문화연구』제11권, 남도불교문화연구회, 2009.)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사용한 중국연호 다음 2년이 을축(乙丑)년인 해를 수철 화상 입적 후에 찾아본 결과 당나라 마지막 황제 애제(哀帝)의 연호인 천우(天祐) 밖에 없어, 이 탑비는 천우(天祐) 2년인 905년(효공왕 9) 10월 15일에 세워졌다고 한다.
  3.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 2017년 04월 12일.
  4. "건조물문화재(석조) 정기조사서",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최종확인:2017년 4월 12일.
  5. 논문목록
  6. 하일식
  7. 최경선
  8. 종래의 연구에서는 "飮光" 다음에 오는 글자를 누락된 것으로 판단하여, 음광을 각자승(刻字僧)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서 "飮光" 다음에 오는 글자를 "咠十"로 판독할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음광이 자료를 모은 역할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정선종, 1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