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대비전유"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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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12일 (수) 02:26 판
명성대비전유 | |
한자명칭 | 明聖大妃傳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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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Queen Myeongseong’s letter to Song Siyeol to persuade him to return to government service |
작자 | 명성대비 |
간행시기 | 1680년 |
소장처 | 국립청주박물관 |
유형 | 고문서 |
크기(세로×가로) | 33.0×19.0㎝ |
판본 | 필사본 |
수량 | 1첩 |
표기문자 | 한글 |
정의
1680년(숙종 6) 12월 22일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대비(明聖大妃, 1642~1687)가 송시열(宋時烈, 1607~1689)에게 출사를 권고하는 전유(傳諭)이다.
내용
1680년(숙종 6) 12월 22일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대비(明聖大妃, 1642~1687)가 송시열(宋時烈, 1607~1689)에게 출사를 권고하는 전유(傳諭)이다. 1680년 10월 송시열은 서울에 잠시 머물다가 부인의 개장(改葬)과 아들의 병으로 말미암아 다시 서울을 떠났다. 그러나 숙종비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의 부음을 듣고는 바로 환조(還朝)했고, 그 다음 달에 인경왕후의 지문을 제술하도록 명을 받았다. 12월 지문을 올린 송시열은 다시 서울을 떠났고, 숙종은 승지를 보내 만류하였다. 그래도 송시열이 돌아오지 않자 현종비 명성대비가 돌아오라는 내용의 한글 편지를 직접 써 보냈다. 편지를 받은 송시열은 “이는 옛날 송나라의 선인황후(宣仁皇后)가 사마광(司馬光)을 만류했던 고사(古事)이다.” 하고는 은전에 감격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1]
관련항목
시간정보
공간정보
주석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15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