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기록화관 개관

"김태-동령부 우라산성의 공함"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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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왼편에서 백마를 탄 흰색 갑옷의 장군이 [[이성계]]이고, 오른편에 초록색 옷을 입은 사람이 동녕부 동지(東寧府同知) [[이오로첩목아|이오로첩목아(李吾魯帖木兒)]]이다.<br/>
 
작품 왼편에서 백마를 탄 흰색 갑옷의 장군이 [[이성계]]이고, 오른편에 초록색 옷을 입은 사람이 동녕부 동지(東寧府同知) [[이오로첩목아|이오로첩목아(李吾魯帖木兒)]]이다.<br/>
 
태조실록에 따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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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오로첩목아|이오로첩목아(李吾魯帖木兒)]]가, 태조가 온다는 말을 듣고서 [[오녀산성|우라산성(亐羅山城)]]으로 옮겨 보전하여 험준한 곳에 웅거해 막으려고 하였는데, 태조가 야돈촌(也頓村)에 이르자, [[이오로첩목아]]가 와서 도전(挑戰)하다가 잠시 후에 갑옷을 버리고 재배(再拜)하며 말하기를,<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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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오로첩목아|이오로첩목아(李吾魯帖木兒)]]가, 태조가 온다는 말을 듣고서 [[오녀산성|우라산성(亐羅山城)]]으로 옮겨 보전하여 험준한 곳에 웅거해 막으려고 하였는데, 태조가 야돈촌(也頓村)에 이르자, [[이오로첩목아]]가 와서 도전(挑戰)하다가 잠시 후에 갑옷을 버리고 재배(再拜)하며 말하기를,
“나의 선조(先祖)는 본래 고려 사람입니다. 신복(臣僕)이 되기를 원합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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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선조(先祖)는 본래 고려 사람입니다. 신복(臣僕)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고는, 3백여 호(戶)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aa_000047 태조실록 1권, 총서 47번째기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 온라인 서비스』<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4월 04일.</ref>
 
하고는, 3백여 호(戶)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aa_000047 태조실록 1권, 총서 47번째기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 온라인 서비스』<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4월 04일.</ref>
  

2017년 4월 4일 (화) 22:16 판


동령부 오라산성의 공함
김태-오라산성함락(이성계)-1975s.jpg
작가 김태
제작연도 1975년
규격 300호(197x290.9cm)
유형 전쟁
분류 유화
소장처 전쟁기념관


개요

고려 공민왕이 원·명 교체기의 공백상태를 이용하여 고려의 전통적인 북진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동녕부정벌을 일으켰는데, 해당 작품은 그 일환으로, 1370년 1월에 이성계 지휘하의 고려군이 고구려의 도읍지였던 동녕부 우라산성(于羅山城)을 함락시키는 장면을 재현하였다.
이 작품은 정확한 인체묘사와 인물들의 표정, 의상과 배경에 대한 작가의 세심한 배려 등이 돋보이는 수작들 가운데 하나이다.[1]

설명

작품 왼편에서 백마를 탄 흰색 갑옷의 장군이 이성계이고, 오른편에 초록색 옷을 입은 사람이 동녕부 동지(東寧府同知) 이오로첩목아(李吾魯帖木兒)이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이오로첩목아(李吾魯帖木兒)가, 태조가 온다는 말을 듣고서 우라산성(亐羅山城)으로 옮겨 보전하여 험준한 곳에 웅거해 막으려고 하였는데, 태조가 야돈촌(也頓村)에 이르자, 이오로첩목아가 와서 도전(挑戰)하다가 잠시 후에 갑옷을 버리고 재배(再拜)하며 말하기를,

“나의 선조(先祖)는 본래 고려 사람입니다. 신복(臣僕)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고는, 3백여 호(戶)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다.[2]


공민왕 19년(1370) 정월, 이성계는 군대를 거느리고 동북면(東北面)으로부터 황초령(黃草嶺)을 넘고 다시 설한령(雪寒嶺)에 이른 다음 또 7백여 리를 행진하여 압록강(鴨綠江)을 건넜다.

이때 동녕부(東寧府) 동지(同知) 이오로첩목아(李吾魯帖木兒)는 태조가 온다는 말을 듣고 대로(大路)에 웅거하여 방어하고자 하였다. 태조가 야둔촌(也頓村)에 이르니, 이오로첩목아(吾魯帖木兒)가 잠시 도전(挑戰) 하다가 조금 후에 투항하며 "우리 선조(先祖)는 본디 고려 사람이니, 원컨대, 신복(臣僕)이 되겠습니다." 하고, 3백여 호(戶)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였다.

그러나 추장(酋長) 고안위(高安慰)는 오히려 성(城)에 웅거하여 항복하지 않으므로, 이성계의 군사들이 그를 포위하였다. 이때 이성계는 활과 살을 가지지 않았으므로 수종(隨從) 하는 사람의 활을 가져와서 편전(片箭)을 사용하여 이들에게 쏘았다. 70여 발이나 쏘았는데 모두 적의 얼굴에 바로 맞으니, 성중(城中) 사람들이 겁을 먹었다. 이에 고안위(高安慰)는 처자(妻子) 마저 버린 채 몰래 밤에 도망쳤다. 이튿날 두목(頭目) 20여 명이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항복한데 이어 여러 산성(山城)들도 소문만 듣고 모두 항복하니, 호(戶)를 얻은 것이 무릇 만여 호(萬餘戶)나 되었다. 전쟁에서 얻은 소 천여 마리와 말 수백여 필을 모두 그 주인에게 돌려주니, 북방 사람이 크게 기뻐하여 귀순(歸順) 한 사람들로 저자(市)를 방불케 했다. (조선왕조 실록 중 태조실록)

조선왕조실록 중 태조실록에 따르면,


장군이 1370년  오녀산성(五女山城 : 卒本城)을 향하여 편전(片箭)에 아기화살을 덧걸어 70발을 쏘아 적군의 안면을 적중시켰다. 군량미 보급을 책임지고 있던 부보상들도 그 광경을 지켜보고 환호했다. 

1370(공민왕 19)년 1월 동북면(함경도) 병마사인 이성계 장군이 기병 5천 명과 보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동북면에서 황초령(黃草嶺)을 넘어 원나라의 잔당인 이오로티무르(李吾魯帖木兒:李原景)가 지키고 있는 압록강 중류지역 환인시(桓仁市)에 위치한 우라산성(于羅山城 : 亏羅山城 兀剌山城 五老山城 五女山城)을 공격했다. 우라산성은 사면이 절벽으로서 난공불락의 천연요새인 바위산성이었다. 해발 820m인 깎아지른 듯한 절벽의 산성에서 전투를 치른 것은 믿기 힘들 정도이다. 이성계 장군의 신출귀몰한 편전술과 기마술의 승리이었다.

편전을 사용할 수 있는 병사는 100명 중 한두 명에 불과하다. 편전의 사정거리는 317m로서 일반화살의 225m보다 100m가량 더 멀리 나간다. 편전의 초속은 71.8m로 일반화살의 59.8m를 크게 상회한다. 고속화살일수록 관통력이 우수한 것이다. 이성계 장군은 편전을 사용할 수 있는 신묘한 사격술(射擊術)을 구사하여 우라산성을 함락했다.


이성계 장군은 전쟁터에 나가야 할 새벽에 수행하는 부관들에게 건너편의 장대한 나무를 가리키면서 다섯 개의 가지를 지목하게 한 다음 다섯 개의 화살을 동시에 장전하여 시위를 당기면 각각 목표점을 명중한다. 만약 한 개라도 명중되지 않으면 병사들의 출진을 보류시켰다. 장군이 스스로의 몸 상태를 점검하는 방법이었다. 모든 화살이 목표지점을 명중시키게 되면 장군은 군사들을 총지휘 감독하면서 출진하고 병사들의 사기는 충천하여 필승을 거두었다.

이성계 장군의 출진에 따라 공민왕은 동쪽의 두만강 너머 간도지역과 서쪽의 요동 심장부인 요성까지 원나라를 내쫓고 옛 땅을 되찾는 북벌을 성공리에 마무리지었다. 공민왕은 만주가 우리 땅임을 선포하고 군대를 철수했다. 공민왕의 만주수복으로 인하여 조선은 두만강 유역을 확보하게 되었다. 공민왕의 북벌은 만주가 우리 역사의 무대라는 점을 새삼 확인했던 것이다. ← 대한경영사론 (졸저 45쪽 참조)

환런현[桓仁縣] 중심에서 8km 떨어져 있다. 해발 820m에 있다. 200m 높이에 이르는 절벽의 천연 지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장벽을 만들고 동쪽과 남쪽의 산세가 완만한 곳만 성벽을 쌓았다. 오녀산성의 전체 평면은 직사각형에 가까우며 남북길이 600m, 동서너비 130~300m이다. 1996년부터 1998년 발굴조사에서 고구려 시대 유물 2천여 점이 발굴되었으며, 저수지, 망대, 병영 등의 건물터가 남아 있다. 성안은 넓고 평평하며 중앙부에는 천지(天池)라고 하는 샘이 있다. 2004년 다른 고구려 유적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고구려의 첫 도읍지인 졸본성(卒本城)으로 비정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녀산성 [五女山城] (두산백과)

해당 작품은 승자와 패자의 극명한 대립, 즉 대각선으로 나뉘는 화면 상단과 하단이라는 위치선정, 아래를 내려다보고 위를 올려다보는 시선의 대립, 기세등등한 포즈와 무릎을 꿇은 굴욕적인 포즈의 대립, 완전한 정면상은 아닐지라도 정면을 보여주고 있는 아군과 등을 보이고 있는 적군이라는 전통적인, 또는 도식화된 이분법을 그대로 따름으로써 승리라는 메시지를 일차원적으로 전달할 따름이다.[3]

시각적 안내

김태-오라산성함락(이성계)-1975s.jpg


관련 민족기록화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김태 김태-동령부 우라산성의 공함 A는 B를 그렸다 1975년
김태-동령부 우라산성의 공함 이성계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김태-동령부 우라산성의 공함 동녕부정벌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김태-동령부 우라산성의 공함 오녀산성 A는 B를 배경으로 한다
이성계 동녕부정벌 A는 B를 지휘하였다
이성계 오녀산성 A는 B를 공격하였다 1370년 1월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975년 김태가 김태-동령부 우라산성의 공함를 제작하였다.
1991년 1월 8일-1992년 1월 7일 국회사무처가 김태-동령부 우라산성의 공함를 대여하였다.
1370년 1월 이성계오녀산성을 공격하였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532103 126.914133 김태-동령부 우라산성의 공함이 국회사무처에 대여되었다.
37.532103 126.914133 김태-동령부 우라산성의 공함이 전쟁기념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래프

참고문헌

  • "동녕부정벌, 『두산백과 온라인 서비스』, 두산백과. 2017년 04월 04일 확인

주석

  1. 박혜성, 「1960-1970년대 민족기록화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년, 92쪽.
  2. "태조실록 1권, 총서 47번째기사", 『조선왕조실록 온라인 서비스』online,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4월 04일.
  3. 박혜성, 「1960-1970년대 민족기록화 연구」,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년, 9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