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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철]]은 [[실상산문]]을 개창한 승려인 [[홍척|홍척(洪陟)]]의 제자가 되었다.<ref>[[수철]]이 처음으로 [[홍척]]을 만난 장소에 대해서는 비문의 해석에 따라 ①설악산, ②[[남원 실상사|실상사]], ③경주로 보는 견해가 있다. ①설악산으로 보는 대표적인 연구는 ''추만호, 「심원사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의 금석학적 분석」, 『역사민속학』제1책, 한국역사민속학회, 1991.''로, 비문에서 언급된 "실상선정(實相禪庭)"을 "실상선정국사"라는 [[홍척]]의 호칭으로 해석하여, [[수철]]은 설악산에서 [[홍척]]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②[[남원 실상사|실상사]]로 보는 대표적인 연구는 ''정병삼, "심원사 수철화상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제3책,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로, 비문에서 언급된 "실상선정(實相禪庭)"을 [[남원 실상사|실상사]]라는 장소로 해석하여 [[수철]]은 [[남원 실상사|실상사]]에서 [[홍척]]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③경주로 보는 대표적인 연구는 ''정선종, 「실상사 수철화상탑비의 음기와 중건에 대하여」, 『불교문화연구』제11책, 남도불교문화연구회, 2009.''로, 비문에서 언급된 "□□□師"(8행 17~20열)를 홍척을 가리키는 "證覺□師"로 판독하여, 수철은 홍척이 도읍인 경주에 왔을 때 처음으로 만났다고 주장한다. </ref> | [[수철]]은 [[실상산문]]을 개창한 승려인 [[홍척|홍척(洪陟)]]의 제자가 되었다.<ref>[[수철]]이 처음으로 [[홍척]]을 만난 장소에 대해서는 비문의 해석에 따라 ①설악산, ②[[남원 실상사|실상사]], ③경주로 보는 견해가 있다. ①설악산으로 보는 대표적인 연구는 ''추만호, 「심원사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의 금석학적 분석」, 『역사민속학』제1책, 한국역사민속학회, 1991.''로, 비문에서 언급된 "실상선정(實相禪庭)"을 "실상선정국사"라는 [[홍척]]의 호칭으로 해석하여, [[수철]]은 설악산에서 [[홍척]]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②[[남원 실상사|실상사]]로 보는 대표적인 연구는 ''정병삼, "심원사 수철화상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제3책,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로, 비문에서 언급된 "실상선정(實相禪庭)"을 [[남원 실상사|실상사]]라는 장소로 해석하여 [[수철]]은 [[남원 실상사|실상사]]에서 [[홍척]]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③경주로 보는 대표적인 연구는 ''정선종, 「실상사 수철화상탑비의 음기와 중건에 대하여」, 『불교문화연구』제11책, 남도불교문화연구회, 2009.''로, 비문에서 언급된 "□□□師"(8행 17~20열)를 홍척을 가리키는 "證覺□師"로 판독하여, 수철은 홍척이 도읍인 경주에 왔을 때 처음으로 만났다고 주장한다. </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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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ockquote|스스로 부푼 마음에 … 새처럼 … 뜻을 높이 세우고 … 날개짓을 하여 … 때마침 …사(師)가 임금의 부름에 응하여 화답하듯이 도읍(都邑)에 왔을 때라, 예를 올리니 자신이 원하던 바와 딱 맞아서 가르침 받기를 청하니 허락하였다. 이에 묻기를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하니, “당신의 본성은 무엇입니ᄁᆞ?”하고 답하였다. 이미 신묘한 경지에 깃들어 선경(仙境)을 … 설악(雪岳)(을 거쳐) 홀로 운잠(雲岑)으로 가서 실상사로 찾아뵈었다. 국사가 …를 내리며 “도를 맡기는 것은 오랜 인연을 따르는 바이니 서당(西堂)을 잘 꾸리는 일은 …”라 하였다. | ||
+ | |출처=하일식, "심원사 수철화상비", 『한국금석문집성』제13책, 한국국학진흥원, 2013.}} | ||
수철은 명산 승지를 순례하였다. | 수철은 명산 승지를 순례하였다. |
2017년 4월 2일 (일) 18:25 판
수철(秀澈)() | |
대표명칭 | 수철(秀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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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 | 817년(헌덕왕 9)-893년(진성여왕 7) |
시호 | 수철(秀澈) |
탑호 | 능가보월(楞加寶月) |
성씨 | 김씨(金氏) |
승탑 |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南原 實相寺 秀澈和尙塔) |
승탑비 |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비(南原 實相寺 秀澈和尙塔碑) |
정의
신라시대의 승려
생애
가계와 탄생
수철(秀澈)은 815년 출생하였다. 그의 집안은 증조부가 소판(蘇判)[1]을 지낸 진골(眞骨) 가문이었으나, 조부와 부친에 이르러서는 중앙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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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의 위(位)는 소판으로 혈족이 진골로 빼어나 경사로움이 법신(法身)에까지 넉넉했고, 조부는 일신(日新)이고 부친은 수정(修靜)인데 벼슬하려 하지 않고 대대로 자손을 위한 좋은 계책을 전해주어 가문이 온전하였으니 세상을 피하여 보전한 맑은 것이 있었다. | ![]() |
출처: 하일식, "심원사 수철화상비", 『한국금석문집성』제13책, 한국국학진흥원, 2013. |
수철(秀澈)은 어릴 때 부모를 모두 여의었으며, 이로 인하여 일찍이 출가를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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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도(入道)함에 있어서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돌아보니 헛된 꿈임을 깨달아, 눈먼 거북이 판자조각 만나는 듯한 인연을 언뜻 듣고 부처를 보자 지체하지 않았다. | ![]() |
출처: 하일식, "심원사 수철화상비", 『한국금석문집성』제13책, 한국국학진흥원, 2013. |
출가수행
수철(秀澈)은 15세경에 연허(緣虛) 율사에게 출가하고[2], 천종(天縱) 대덕에게 수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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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살 남짓에 불법을 배우고자 하여 연허율사(緣虛律師)에게서 머리를 깎고 천종대덕(天縱大德)에게 경전을 배웠다. | ![]() |
출처: 하일식, "심원사 수철화상비", 『한국금석문집성』제13책, 한국국학진흥원, 2013. |
이후 수철(秀澈)은 동원경(東原京) 복천사(福泉寺)에서 윤법(潤法) 대덕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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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경(東原京)[3] 복천사(福泉寺)[4]에 이르러 윤법대덕(潤法大德)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 ![]() |
출처: 하일식, "심원사 수철화상비", 『한국금석문집성』제13책, 한국국학진흥원, 2013. |
활동
수철은 실상산문을 개창한 승려인 홍척(洪陟)의 제자가 되었다.[5]
수철은 명산 승지를 순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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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이치를 풀어냈으니 거처에 걸림이 있겠는가. 이로부터 名山 勝地의 탑에 예배하러 돌아다니시니 …… 參禪에서 꽃술을 드날리고 華嚴에서 향기를 모으셨다. | ![]() |
출처: 정병삼, "심원사 수철화상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제3책,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
수철은 지리산 지실사를 창건하고 가르침을 펼쳤다.
수철은 서울에 가서 팔각당에서 경문왕의 교와 선의 같고 다름에 대한 물음에 답을 하였다.
수철은 헌강왕과도 교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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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傅를 추증받은 憲康大王께서 왕위를 이어 자주 서신을 보내시므로 거동을 옮겨 ……. | ![]() |
출처: 정병삼, "심원사 수철화상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제3책,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
수철은 혜위법사와 천○법대덕 등의 승려들과 교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철은 진성왕과도 교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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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眞聖王께서 定康王이 나라를 다스림에 힘들어 하다가 돌아가자 이에 앞의 허물을 따라 …… 어찌 누추한 곳이라 하겠는가. 본래 …… 물들지 않음을 얻어 그윽한 도리가 끝까지 맑고 한가하니 일평생의 큰 인연이 임금의 스승이 되는데 한점의 흠도 없었다. | ![]() |
출처: 정병삼, "심원사 수철화상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제3책,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
입적
관련항목
주석
- ↑ 신라시대의 관등. 17등 관계 중의 제3등 관계로, 진골만이 받을 수 있는 관등이었으며 공복(公服)의 빛깔은 자색(紫色)이었다. "잡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 비문에서는 이 시기를 지학(志學)이라고 표현하였다.("年餘志學學佛是圖落采於緣虛律師") 따라서 수철은 대략 829년 경에 출가한 것으로 보인다.
- ↑ 김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나, 처용가에서 경주를 동경이라 하여 두 가지 가능성이 있음. 고려시대의 동원경 용례를 참고하여 명주로 보기도 함. 하일식, "심원사 수철화상비", 『한국금석문집성』제13책, 한국국학진흥원, 2013, 16쪽 각주33번.
- ↑ 官壇이 있어 郎空大師도 여기서 구족계를 받음(「太子師 郎空大師塔碑」). 구체적 위치는 미상이지만 명주 관내에 있었다고 보기도 함. 하일식, "심원사 수철화상비", 『한국금석문집성』제13책, 한국국학진흥원, 2013, 16쪽 각주34번.
- ↑ 수철이 처음으로 홍척을 만난 장소에 대해서는 비문의 해석에 따라 ①설악산, ②실상사, ③경주로 보는 견해가 있다. ①설악산으로 보는 대표적인 연구는 추만호, 「심원사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의 금석학적 분석」, 『역사민속학』제1책, 한국역사민속학회, 1991.로, 비문에서 언급된 "실상선정(實相禪庭)"을 "실상선정국사"라는 홍척의 호칭으로 해석하여, 수철은 설악산에서 홍척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②실상사로 보는 대표적인 연구는 정병삼, "심원사 수철화상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제3책,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로, 비문에서 언급된 "실상선정(實相禪庭)"을 실상사라는 장소로 해석하여 수철은 실상사에서 홍척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③경주로 보는 대표적인 연구는 정선종, 「실상사 수철화상탑비의 음기와 중건에 대하여」, 『불교문화연구』제11책, 남도불교문화연구회, 2009.로, 비문에서 언급된 "□□□師"(8행 17~20열)를 홍척을 가리키는 "證覺□師"로 판독하여, 수철은 홍척이 도읍인 경주에 왔을 때 처음으로 만났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