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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서선(徐宣)의 자는 보견(寶堅)이고, 광릉군(廣陵) 해서현(海西) 사람이다. 강동(江東)으로 피난 갔었는데, 손책(孫策)의 초빙을 거부하고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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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선(徐宣)의 자는 보견(寶堅)이고, 광릉군(廣陵) 해서현(海西) 사람이다. 강동(江東)으로 피난 갔었는데, 손책(孫策)의 초빙을 거부하고 고향 군(광릉)으로 돌아왔다. 서선은 진교와 함께 요직을 맡았으며, 두 사람은 명성이 나란했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모두 태수 진등(陳登)에게 중시되었고, 또 진등과 함께 태조(太祖, 조조)에게 마음을 의지했다. 해서(海西)와 회포(淮浦), 두 현의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도위 위미(衛彌)와 현령 양습(梁習)은 밤에 서선의 집으로 도망쳤으며, 서선은 몰래 그들을 호송해 죽음을 면하게 해줬다. 태조는 독군 호질(扈質)을 파견해 반란을 일으킨 백성들을 토벌시켰지만, 병력이 적어 나아가지 않았다. 서선은 몰래 호질을 만나 문책하고, 형세를 설명했다. 호질은 곧 진군하여 적을 무찔렀다. 태조는 그를 불러 사공연속으로 삼았다. 동민(東緡), 발간(發幹)의 현령으로 임명됐으며, 제군(齊郡)태수로 승진했고, 중앙으로 들어가 문하독이 되었으며, 태조를 따라 수춘(壽春)으로 갔다.
 
 
마침 마초(馬超)가 난리를 일으켰고, 대군은 서쪽 정벌에 나섰다. 태조는 관리들(官屬)을 보고 말했다.
 
 
​“지금 나는 원정을 가야만 하는데, 이곳이 평정되지 못했으니, 후에 걱정거리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오. 응당 청렴하고 공정하며 덕이 있는 사람을 뽑아 이곳을 진무하고 통솔하도록 해야만 하오.”
 
 
그래서 서선을 좌호군으로 삼아 남아서 군사들을 통솔하도록 했다. 대군이 돌아오자, 서선은 승상동조연이 되었고, 지방으로 나가 위군(魏郡)태수가 되었다. 태조가 낙양(洛陽)에서 세상을 떠나자, 신하들은 궁전 안으로 들어와서 상을 발표했다.
 
 
어떤 사람이 여러 성을 지키는 장수들을 바꾸고, 초(譙), 패(沛) 사람을 기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선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국가는 통일되었고, 사람들은 각기 충성을 다하려고 생각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초, 패 사람만을 기용해야 하는가? 이것은 각 성을 지키고 있는 장수들의 마음을 싸늘하게 하는 것이다.”
 
 
문제(조비)는 서선의 말을 듣고 말했다.
 
 
​“경은 이른바 국가의 안위와 존망을 담당할 중요한 신하요.(社稷之臣)”
 
 
문제가 제위에 오르자, 어사중승으로 승진했으며, 관내후의 작위를 받았고, 성문교위로 바꿔 임명되었으며, 한달 뒤에(旬月) 사례교위(司隸校尉)로 승진했고, 산기상시로 전임되었다. (문제를) 따라 광릉(廣陵)에 갔는데, 전군이 배를 탔을 때 폭풍이 불어와 파도가 쳤다. 문제의 배가 빙그르 돌더니 기울어지자, 서선은 뒤에 떨어져 있는 것이 싫어 파도를 타고 앞으로 나아가 제일 먼저 목적지에 도달했다. 문제는 그의 용감함을 칭찬하고 상서로 승진시켰다. 명제(明帝, 조예)가 즉위하자, 서선은 진양정후로 봉해졌으며, 식읍은 200호였다. 중령군 환범(桓範)은 서선을 명제에게 천거했다.
 
 
“신이 듣건대 제왕께서 인물을 기용하실 경우에는 시대를 헤아리는 유능한 인재를 임명하고, 천하를 쟁탈하는 시대에는 책략을 우선으로 하며, 천하가 평정된 이후에는 충의를 제일로 한다고 했습니다. 때문에 진문공(晉文)은 구범(舅犯)의 계책을 사용했지만 옹계(雍季)의 정의로운 말을 칭찬했고, 돌아와 논공행상을 하는 자리에서 옹계를 가장 위에 있게 했다. 신하들이 어리둥절해하며 말했다.
 
 
​“성북의 공은 구범의 계책 덕분입니다. 주군께서는 그의 계책을 사용했음에도 상에서는 뒤에 두니 뭔가 잘못된 게 아닙니까!”
 
 
진문공이 말했다.
 
 
​“옹계의 말은 100세대의 이익이고, 구범의 말은 일시적인 방책이다. 어찌 일시적인 방책을 백세의 이익 앞에 놓을 수 있겠는가?”
 
 
한고조(高祖)는 진평(陳平)의 지혜를 사용했지만 어린 군주의 뒷 일을 주발(周勃)에게 부탁했습니다. 저는 사사로이 상서 서선을 살펴보았는데, 사람됨이 충의롭고 성품은 돈후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성격을 갖고 있으며, 유달리 청결하고 전아하며 세속에 구애되지 않고, 확고하여 움직이기 어려우며 국가에 대한 절의가 있고, 주와 군의 장관을 역임하면서 모두 그 직무를 빛냈습니다. 지금 복야의 직책이 결원이니, 서선에게 이 일을 대신 관장하도록 하십시오. 책임이 무거우니, 서선보다 적임자는 없을 것입니다.”
 
 
명제는 이에 서선을 좌복야로 임명했고, 후에 시중광록대부의 관직을 더했다. 명제가 허창(許昌)에 갔을 때, 서선은 수도의 일을 총괄했다. 명제가 돌아오자 상서의 담당자가 문서를 상정했다. 명제가 조서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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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0. 14.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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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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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BOOKK(부크크)
 
발매
 
2024.08.28.
 
 
 
서선(徐宣)의 자는 보견(寶堅)이고, 광릉군(廣陵) 해서현(海西) 사람이다. 강동(江東)으로 피난 갔었는데, 손책(孫策)의 초빙을 거부하고 고향 군(광릉)으로 돌아왔다. 서선은 진교와 함께 요직을 맡았으며, 두 사람은 명성이 나란했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모두 태수 진등(陳登)에게 중시되었고, 또 진등과 함께 태조(太祖, 조조)에게 마음을 의지했다. 해서(海西)와 회포(淮浦), 두 현의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도위 위미(衛彌)와 현령 양습(梁習)은 밤에 서선의 집으로 도망쳤으며, 서선은 몰래 그들을 호송해 죽음을 면하게 해줬다. 태조는 독군 호질(扈質)을 파견해 반란을 일으킨 백성들을 토벌시켰지만, 병력이 적어 나아가지 않았다. 서선은 몰래 호질을 만나 문책하고, 형세를 설명했다. 호질은 곧 진군하여 적을 무찔렀다. 태조는 그를 불러 사공연속으로 삼았다. 동민(東緡), 발간(發幹)의 현령으로 임명됐으며, 제군(齊郡)태수로 승진했고, 중앙으로 들어가 문하독이 되었으며, 태조를 따라 수춘(壽春)으로 갔다.  
 
서선(徐宣)의 자는 보견(寶堅)이고, 광릉군(廣陵) 해서현(海西) 사람이다. 강동(江東)으로 피난 갔었는데, 손책(孫策)의 초빙을 거부하고 고향 군(광릉)으로 돌아왔다. 서선은 진교와 함께 요직을 맡았으며, 두 사람은 명성이 나란했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모두 태수 진등(陳登)에게 중시되었고, 또 진등과 함께 태조(太祖, 조조)에게 마음을 의지했다. 해서(海西)와 회포(淮浦), 두 현의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도위 위미(衛彌)와 현령 양습(梁習)은 밤에 서선의 집으로 도망쳤으며, 서선은 몰래 그들을 호송해 죽음을 면하게 해줬다. 태조는 독군 호질(扈質)을 파견해 반란을 일으킨 백성들을 토벌시켰지만, 병력이 적어 나아가지 않았다. 서선은 몰래 호질을 만나 문책하고, 형세를 설명했다. 호질은 곧 진군하여 적을 무찔렀다. 태조는 그를 불러 사공연속으로 삼았다. 동민(東緡), 발간(發幹)의 현령으로 임명됐으며, 제군(齊郡)태수로 승진했고, 중앙으로 들어가 문하독이 되었으며, 태조를 따라 수춘(壽春)으로 갔다.  
  

2025년 6월 20일 (금) 22:19 판

서선(徐宣)의 자는 보견(寶堅)이고, 광릉군(廣陵) 해서현(海西) 사람이다. 강동(江東)으로 피난 갔었는데, 손책(孫策)의 초빙을 거부하고 고향 군(광릉)으로 돌아왔다. 서선은 진교와 함께 요직을 맡았으며, 두 사람은 명성이 나란했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모두 태수 진등(陳登)에게 중시되었고, 또 진등과 함께 태조(太祖, 조조)에게 마음을 의지했다. 해서(海西)와 회포(淮浦), 두 현의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도위 위미(衛彌)와 현령 양습(梁習)은 밤에 서선의 집으로 도망쳤으며, 서선은 몰래 그들을 호송해 죽음을 면하게 해줬다. 태조는 독군 호질(扈質)을 파견해 반란을 일으킨 백성들을 토벌시켰지만, 병력이 적어 나아가지 않았다. 서선은 몰래 호질을 만나 문책하고, 형세를 설명했다. 호질은 곧 진군하여 적을 무찔렀다. 태조는 그를 불러 사공연속으로 삼았다. 동민(東緡), 발간(發幹)의 현령으로 임명됐으며, 제군(齊郡)태수로 승진했고, 중앙으로 들어가 문하독이 되었으며, 태조를 따라 수춘(壽春)으로 갔다.

마침 마초(馬超)가 난리를 일으켰고, 대군은 서쪽 정벌에 나섰다. 태조는 관리들(官屬)을 보고 말했다.

​“지금 나는 원정을 가야만 하는데, 이곳이 평정되지 못했으니, 후에 걱정거리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오. 응당 청렴하고 공정하며 덕이 있는 사람을 뽑아 이곳을 진무하고 통솔하도록 해야만 하오.”

그래서 서선을 좌호군으로 삼아 남아서 군사들을 통솔하도록 했다. 대군이 돌아오자, 서선은 승상동조연이 되었고, 지방으로 나가 위군(魏郡)태수가 되었다. 태조가 낙양(洛陽)에서 세상을 떠나자, 신하들은 궁전 안으로 들어와서 상을 발표했다.

어떤 사람이 여러 성을 지키는 장수들을 바꾸고, 초(譙), 패(沛) 사람을 기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선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국가는 통일되었고, 사람들은 각기 충성을 다하려고 생각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초, 패 사람만을 기용해야 하는가? 이것은 각 성을 지키고 있는 장수들의 마음을 싸늘하게 하는 것이다.”

문제(조비)는 서선의 말을 듣고 말했다.

​“경은 이른바 국가의 안위와 존망을 담당할 중요한 신하요.(社稷之臣)”

문제가 제위에 오르자, 어사중승으로 승진했으며, 관내후의 작위를 받았고, 성문교위로 바꿔 임명되었으며, 한달 뒤에(旬月) 사례교위(司隸校尉)로 승진했고, 산기상시로 전임되었다. (문제를) 따라 광릉(廣陵)에 갔는데, 전군이 배를 탔을 때 폭풍이 불어와 파도가 쳤다. 문제의 배가 빙그르 돌더니 기울어지자, 서선은 뒤에 떨어져 있는 것이 싫어 파도를 타고 앞으로 나아가 제일 먼저 목적지에 도달했다. 문제는 그의 용감함을 칭찬하고 상서로 승진시켰다. 명제(明帝, 조예)가 즉위하자, 서선은 진양정후로 봉해졌으며, 식읍은 200호였다. 중령군 환범(桓範)은 서선을 명제에게 천거했다.

“신이 듣건대 제왕께서 인물을 기용하실 경우에는 시대를 헤아리는 유능한 인재를 임명하고, 천하를 쟁탈하는 시대에는 책략을 우선으로 하며, 천하가 평정된 이후에는 충의를 제일로 한다고 했습니다. 때문에 진문공(晉文)은 구범(舅犯)의 계책을 사용했지만 옹계(雍季)의 정의로운 말을 칭찬했고,

여씨춘추(呂氏春秋)에 따르면 : 옛날에 진문공(晉文公)은 초나라(楚) 사람들과 성복(城濮)에서 전쟁할 때 구범을 불러 물었다.

​“초나라 사람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구범이 답했다.

“예절을 중시하는 자는 번거로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움에 능한 자는 속임수 쓰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속임수를 써 보십시오.”

진문공이 구범의 말을 옹계(雍季)에게 말했다. 그러자 옹계가 말했다.

​“연못의 물을 모두 퍼내어 물고기를 잡으면 잡지 못할 리 없지만, 다음 해에는 잡을 물고기가 없게 될 것이고, 산의 나무를 모두 불태워서 짐승들을 잡으면 잡지 못할 리 없지만 다음 해에는 잡을 짐승이 없게 될 것입니다. 속임수는 지금은 쓸 수 있지만 뒷날에는 다시 쓸 수 없을 것이니 장기적인 술책은 아닙니다.”

진문공은 구범의 말을 따랐고, 초나라는 성북에서 패했다. 하지만 돌아와 논공행상을 하는 자리에서 옹계를 가장 위에 있게 했다. 신하들이 어리둥절해하며 말했다.

​“성북의 공은 구범의 계책 덕분입니다. 주군께서는 그의 계책을 사용했음에도 상에서는 뒤에 두니 뭔가 잘못된 게 아닙니까!”

진문공이 말했다.

​“옹계의 말은 100세대의 이익이고, 구범의 말은 일시적인 방책이다. 어찌 일시적인 방책을 백세의 이익 앞에 놓을 수 있겠는가?”

한고조(高祖)는 진평(陳平)의 지혜를 사용했지만 어린 군주의 뒷 일을 주발(周勃)에게 부탁했습니다. 저는 사사로이 상서 서선을 살펴보았는데, 사람됨이 충의롭고 성품은 돈후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성격을 갖고 있으며, 유달리 청결하고 전아하며 세속에 구애되지 않고, 확고하여 움직이기 어려우며 국가에 대한 절의가 있고, 주와 군의 장관을 역임하면서 모두 그 직무를 빛냈습니다. 지금 복야의 직책이 결원이니, 서선에게 이 일을 대신 관장하도록 하십시오. 책임이 무거우니, 서선보다 적임자는 없을 것입니다.”

명제는 이에 서선을 좌복야로 임명했고, 후에 시중광록대부의 관직을 더했다. 명제가 허창(許昌)에 갔을 때, 서선은 수도의 일을 총괄했다. 명제가 돌아오자 상서의 담당자가 문서를 상정했다. 명제가 조서를 내렸다.

​“내가 직접 보는 것과 복야(仆射, 서선)가 보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결국 보지 않았다. 황실 기물을 만드는 곳(尚方令)에서 기물을 함부로 만들었기 때문에 매질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서선은 상소를 올려 형벌이 너무 엄하다고 진술했으며, 또 궁전을 세우는 일로 백성들의 힘을 소모시키지 말 것을 간언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명제는 모두 직접 조서를 작성하여 그의 의견을 칭찬하고 장려하고는 아울러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서선이 말했다.

​“일흔 살에는 응당 관직을 떠나야만 합니다. 지금 저는 이미 88세가 되었으니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질병을 이유로 하여 관직을 떠날 것을 강력히 피력했지만, 명제는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청룡 4년(青龍, 236), 세상을 떠났다. 평민의 옷(布衣)을 입히고 두건(疏巾)을 써서 당시에 입던 옷으로 염하게 했다.(斂) 조서를 내렸다.

​“서선은 성실하고 겉과 속이 곧고 바르며, 세 조정를 섬겼는데, 공명하며 엄정하고 나의 보좌를 맡은 절조가 있으니 국가의 주춧돌(柱石) 같은 신하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항상 그에게 삼공의 직무를 담당하도록 하려고 했는데, 관직에 오르게 하지도 못하고, 안타깝게도 그는 세상을 떠났구나! 그를 거기장군으로 추증하고, 공의 예로써 장례를 지내도록 하라.”

시호를 정후라고 했으며, 아들 서흠(欽)이 뒤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