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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26일 (일) 13:20 판
책황귀비홀기 | |
영문명칭 | A process of installation of Concubine Sunbi Eom to Hwangguibi |
---|---|
작자 | 미상 |
간행시기 | 1903년(광무7) |
소장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청구기호 | 2-2723 |
유형 | 고서 |
크기(세로×가로) | 27.6×9.2cm |
판본 | 필사본 |
수량 | 1첩 |
표기문자 | 한글 |
개요
1903년(광무7)에 고종황제의 후궁 순비엄씨(淳妃 嚴氏, 1854~1911)를 황귀비로 책봉하는 의례의 절차를 한글로 기록한 홀기이다.
내용
1903년(광무7)에 고종황제의 후궁 순비엄씨(淳妃 嚴氏, 1854~1911)를 황귀비로 책봉하는 의례의 절차를 한글로 기록한 홀기이다. 세로로 긴 형태의 첩장으로, 첩의 앞뒷면은 붉은색 비단으로 감싸고 흰색의 제첨을 붙여 한글로 『책(*고한글)황귀비홀긔』라고 명기하였다. 6절 12면으로 한 면에 4행이 보이도록 접었으며, 붉은 인찰선을 긋고 해당 내용을 격식에 맞춰 썼다. 엄씨는 1859년(철종10)에 나인으로 입궁하여 내전 지밀상궁이 되었으나, 1886년(고종23)에 승은을 입고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에 의해 추방되었다. 1895년(고종32) 을미사변 이후 다시 입궁한 뒤 1897년에 고종이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한 해에 영친왕(英親王)을 낳고 귀인(貴人)이 되었다. 1903년에는 황귀비(皇貴妃)에 책봉되고 금책문과 인장을 하사하는 책례를 거행함으로써 위의를 세웠다. 본 의례는 1903년 11월 7일에 경운궁 중화전에서 거행되었다. 『진봉황귀비의궤(進封皇貴妃儀軌)』에 따르면, 당시 의례는 고종이 황귀비 책봉을 선포하는 ‘책황귀비의(冊皇貴妃儀)’, 황귀비 엄씨가 책문과 인장을 하사받는 ‘황귀비수책의(皇貴妃受冊儀)’, 황귀비가 황제에게 인사를 올리는 ‘황귀비조현황제의(皇貴妃朝見皇帝儀)’ 순으로 진행되었다. 본 홀기의 주요 내용은, 종친 및 문무백관 앞에서 ‘순비 엄씨를 황귀비로 진봉한다’는 내용의 제서(制書)를 선포하는 절차, 정사 이승응(李昇應, 1836~1909)과 부사 이용식(李容植, 1838~?)이 각각 금책(金冊)과 금인(金印)을 넣은 책함(冊函)과 인록(印盝)을 받들고 내궁(內宮)으로 나아가는 의식 등이다. 당시 책문은 홍문관학사 김학진(金鶴鎭)이 찬진했는데, 그 내용은 탁본 『황귀비책봉문(皇貴妃冊封文)』에서 확인할 수 있다. [1]
관련항목
중심 | 연결정보 | 대상 |
---|---|---|
책황귀비홀기 | 인물 | 고종황제 |
책황귀비홀기 | 인물 | 순비엄씨 |
책황귀비홀기 | 인물 | 명성황후 |
책황귀비홀기 | 인물 | 영친왕 |
책황귀비홀기 | 인물 | 이승응 |
책황귀비홀기 | 인물 | 이용식 |
책황귀비홀기 | 인물 | 김학진 |
책황귀비홀기 | 사건 | 을미사변 |
책황귀비홀기 | 사건 | 대한제국 건국 |
책황귀비홀기 | 장소 | 경운궁 중화전 |
책황귀비홀기 | 소장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시간정보
중심 | 시간정보명 | 시간값 |
---|---|---|
책황귀비홀기 | 간행년 | 1903년 |
책황귀비홀기 | 간행년 | 광무7년 |
공간정보
중심 | 연결정보 | 공간정보이름 | 경도 | 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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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황귀비홀기 | 소장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37.39197 | 127.054387 |
책황귀비홀기 | 거행장소 | 경운궁 중화전 | 37.565758 | 126.974810 |
참고문헌
주석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2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