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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예맥족(濊貊族) 요동·발해만 연안 등에 거주해, 거주지역의 분포에 따라 예와 맥이 구분되었다고 보았다. 김정배(金貞培)도 예·맥·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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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주어진 환경의 열악성과 경제적 기반의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 대외적으로 팽창정책을 구사했다. 이 과정에서 예맥계 종족이 주민의 상당수를 차지했던 두만강·대동강·요하·송화강 유역을 차례차례 제압해 나가면서 이들 주민들을 고구려 국가지배구조 내로 편입시켰다. 고구려는 동질성을 인정할 수 있는 주민들이 사는 지역을 우선적으로 확보하여 전략거점화하고, 이들을 고구려인으로 동화·통합시키는 정책을 수행해나갔다.
 
고구려는 주어진 환경의 열악성과 경제적 기반의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 대외적으로 팽창정책을 구사했다. 이 과정에서 예맥계 종족이 주민의 상당수를 차지했던 두만강·대동강·요하·송화강 유역을 차례차례 제압해 나가면서 이들 주민들을 고구려 국가지배구조 내로 편입시켰다. 고구려는 동질성을 인정할 수 있는 주민들이 사는 지역을 우선적으로 확보하여 전략거점화하고, 이들을 고구려인으로 동화·통합시키는 정책을 수행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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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古朝鮮)의 종족구성 - 동이족(東夷族)과 예맥족(濊貊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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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조선을 구성하는 최대의 종족은 예맥족(濊貊族)이라는 게 통설이다. 전통적인 중국의 중화사상이 성립된 춘추시대까지만 해도 동이족(東夷族)이 보편적인 종족명칭이었으나, 진나라 통일이후는 예맥족으로 바뀐다. 요동지역과 한반도서북지역을 중심으로 예맥족이 분포하고 있다는 데는 중국이나 한국학계가 모두 인정하고 있다. 문제는 요서지역을 점거한 것으로 보여 지는 고조선과 관련한 흔적들인데, 요동과 요서간의 선후관계에서부터 담당주체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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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적(考古學的)으로 한민족(韓民族)의 기원(起源)과 구성(構成)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연구한 학자는 김정학(金廷鶴)선생이다. 선생은 우리 민족의 기원에 대해 인류학적 연구를 도입하여 문화의 전파과정을 포함하여 민족의 이동경로까지 괄목할 만한 연구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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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따르면, 몽골종의 일파인 최초의 한반도 정착인들은 시베리아 바이칼호 북쪽 이른바 Cis-Baikal의 삼림지대에 살았던 구석기인들이라고 한다. 구석기시대부터 신석기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렵이나 어로와 같은 채집경제에 있었던 '古아시아족(paleoasiatics)' 또는 '古시베리아족(paleosiberians)' 이라 부르는 종족들인데 이들이 한반도로 이동해왔다고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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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중국지방의 농경을 기반으로 한 생산경제에서 보이는 채문토기(彩文土器)와는 다른 특징의 기하문토기(幾何文土器:櫛文土器로 빗살무늬토기라 한다)의 전통과 타제석기(打製石器)나 세석기(細石器)의 전통을 실례로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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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가 기원전 2만5천년경으로 추정되며 그 후 新시베리아족으로서 우랄알타이족에 속하는 청동기문화를 지닌 종족들이 선주하였던 古아시아족을 정복 동화시켰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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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는 한가지 중요한 사실이 빠져 있는데,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를 담당한 주체간에 요녕지역이라는 중간지대의 설정이 생략된 것이다. 즉, 고아시아족이라 하는 몽골리안이 한반도로 이주해 온 것은 구석기시대가 맞지만, 구석기말기 신석기초에 또 한차례의 신시베리아족이 요녕지역으로 남하하는데 이들은 청동기문화를 지닌 종족이 아니었고 그 시기도 기원전 2만5천년경이 아닌 신석기초 기원전 4천~3천5백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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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사 금속기를 연장으로 일부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청동기문화단계의 수준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단지 기후변동에 따른 남하세력으로 요녕지역에 자리 잡아 그 후에 청동기문화를 발전시켰다고 봐야 한다. 이들 요녕청동기문화인들이 한반도로 이주하거나 문화를 전파하게 된다. 그러므로 고아시아족을 정복 동화시킨 세력들은 다름아닌 시베리아전통의 세석기를 사용한 바이칼지역의 신시베리아족으로서 이들이 또한 고아시아족과 융합한 한민족을 구성한 종족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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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발굴된 청동기유물들은 중국측의 보고에 의하면 기원전 2천년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요녕지역이 그 중심이다. 이 요녕청동기문화의 특징은 비파형동검이나 다뉴세문경의 전통 등으로 연결되어 진다. 즉, 중국의 요녕지역과 한반도, 만주일대는 중국과 확연히 구분되는 동일 청동기문화권으로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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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요녕지역 청동기문화를 일괄적으로 묶어 '비파형동검문화(琵琶形銅劍文化)'라고 규정지을 수 없다는 점은 고고학적 발굴자료의 분석에서 살펴보았다. 다만 정치적 연맹체로서 연대의식의 상징이 되었던 비파형청동검을 매개로 하여 고조선(古朝鮮)이라는 연맹국가로 연계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와 같은 양상은 고대의 문헌자료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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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에 있어서의 종족문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동화와 융합이라는 문화적 복합현상이 나타나므로 사실상 종족문제는 크게 중요하다고 보기 어려우며, 오히려 지역과 문화적 친연관계에 따라 세력범위가 정해진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는 특히 북방계통의 종족간 가름에 있어서 더욱 그렇다. 이렇게 보면 크게 분류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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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중원지역의 농경문화적 전통의 지역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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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중국북방의 유족문화적 전통의 지역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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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중국동북지역의 반농반목적 전통의 지역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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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으로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중국 북부와 동북지역에는 알타이어족군에 속하는 몽골인종이 분포하고 있고 중원지역에는 비알타이어계의 몽골인종이 분포하고 있어 구별된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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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동북지역의 청동기문화를 담당한 종족구성에 대한 어느 정도의 결론은 이미 지어지고 있다. 요동지역의 청동기문화는 문헌상의 예맥족(濊貊族)이, 요서지역의 청동기문화는 동호족(東胡族)이 각각 담당한 청동문화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과거 북한학자들의 주장처럼 요동지역 초기비파형동검문화 세력들의 확산으로 요서지역 비파형동검문화와 연관된 하가점상층문화가 전개되었다고 하는 '요동요서(遼東遼西) 예맥족설(濊貊族說)'의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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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족구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종족명(種族名)과 지역명(地域名)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는 중국동북지역에 분포한 고대문화를 언급할 때 두가지 계통의 용어를 혼용하여 사용하였었다. 이는 철저하게 중국인의 시각에서 붙인 명칭이기 때문에 시대상황 변화에 대한 정확한 추이변동 추적을 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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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내륙에도 다양한 종족의 융합이 전개되어왔는데 유독 주변지역만을 종족명칭을 시대별로 따로 붙여 서로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여기는 태도는 다분히 중화사관적 태도라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은 중화민족단일체가 주변의 다양한 종족들과 끊임없는 투쟁과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장구한 역사를 유지 발전시켜왔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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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동북지역만 하더라도 '東夷族', '濊族', '貊族', '肅愼族', '邑婁族', '山戎族', '東胡族', '朝鮮族', '發族', '夫餘族', '高句麗族', '靺鞨族', '女眞族', '契丹族', '鮮卑族', '烏丸族' 등 같은 지역이라도 각 시대별로 다른 종족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이러한 종족명칭은 마치 서로 역사적이거나 지리적인 승계관계가 전혀 없는 듯이 비춰지기도 하고 오히려 문화의 단절 느낌마저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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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시대 중국동북지역에 등장하는 종족명은 '숙신족', '예맥족', '동호족', '산융족', '조선족', '발족(發族)' 등이다. '예맥족(濊貊族)'에 관해서는 고조선을 이룬 중심세력이라는 것과 그 위치가 부여·고구려지역에서 원래부터 분포하고 있었던 종족이 예족이고 서쪽에서 이동해 들어가 예족과 융합하여 부여와 고구려를 건국한 종족이 맥족이라는 견해에 일반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문헌상에서 보면 고대 중국동북지역에 관한 종족명칭으로 예(濊)와 맥(貊)이 많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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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측의 문헌에서는 주로 춘추시대이후 형성된 것으로 보는 중화사상(華夷觀)에 의해 주말(周末)에서 진통일(秦統一)까지 동이(東夷)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고 진한(秦漢) 이후는 예맥(濊貊)이 등장한다. 이러한 현상은 진나라가 서이(西夷)출신이었기에 중국지역에 분포하는 이에 대한 관념을 비하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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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夷)나 예맥(濊貊)은 아마도 종족칭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최근의 북경에서 펴낸 『중국대백과전서(中國大百科全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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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夷는 (중국)동북지방 특히 발해연안(還渤海地方)에 거주하였고 그 분포가 강회지방(江淮地方:양자강유역)에 이른다. 이들은 夏, 商(殷), 周 三代때는 夷 혹은 九夷라 하고 西周初 成王때는 한동안 夷가 서로 연합하였으며 그들 종족의 본원지는 東北지방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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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貊이란 『詩經』,『書經』에서 出據하였으며 秦漢代는 胡貊칭이 있었는데 胡는 北方거주족이며 貊은 東北거주족이다. 「注」貊은 즉 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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濊와 貊은 고고학상으로 볼 때, 신석기시대인이 아니고 청동기시대인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당시 중국고대에는 濊와 貊에 대해서 별로 구분없이 비하적 표현으로 사용한 것처럼 보인다. 고구려를 貊이라 하고 부여에 대해서는 濊라 하는 관점을 일부학자들은 각기 다른 지역경제를 반영한 명칭이라고도 보기도 하는데, 한자(漢字)의 의미구성을 고려하여 貊을 산악지역의 거주족으로 보고 濊를 하천지역의 거주족으로 보는 견해로 아직 명확한 근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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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지 언어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夷, 濊, 黎, 麗, 餘 등의 연관성과 貊,駱,白,毫,發,ㅂ·ㄺ 이라는 연관성에 대해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종족별로 구별한다면 이미 중원지역에 중국계 종족이 형성되기 전에 중국동부연안의 평야지대에는 발해연안에서 진출한 '이족(夷族)'이 분포하고 있었고 이들 중 일부가 황하문명을 발전 시킨 은(段)나라 문화를 창조하였을 정도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였었는데 또하나의 이족(西夷族) 출신인 진시황의 통일이후 독자적 세력이 와해되고 중국내륙에서 다른 종족과 동화되어 버렸던 역사적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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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서에는 '발조선(發朝鮮)'이란 명칭이 자주 등장한다. 일부학자들은 '발조선(發朝鮮)'을 '발(發)'과 '조선(朝鮮)'으로 분리시켜서 보려고 하는데,‘발(發)’을 ‘맥(貊)’과 연관지어려는 태도에서 비롯되고 있으나, ‘發’과 ‘貊’은 어원의 형성과정이 다르다. 후술하겠지만,‘發’은 ‘밝’의 알타이어계 한자표기음으로써 ‘백(白, 百)’과 같고 후에 ‘번(番)’과 연결되는 음차(音借)일 뿐 '맥(貊)'과는 상관관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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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貊’은 ‘락(手+各)’자로부터 비롯되는데 ‘各’은 갑골문에서 혈거(穴居:지하식 주거지)를 뜻하고, 부수‘豕’는 ‘돼지, 벌레’를 뜻하므로 ‘貊’은 혈거(지하식 주거지)에서 돼지를 기르며 생활하는 모습을 표현한 상형문자의 합성이다. ‘락(手+各)’은 ‘胡(手+各)’으로 연칭되다가 ‘胡貊’으로 바뀌는데 ‘貊’의 등장은 ‘發, 白, 百’과 연계성이 확인된 이후의 호칭으로 변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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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에는‘예락(濊(豕+各))’의 기록이 보편적인데 진(秦)나라 이전의 선진시대부터 ‘맥(貊)’보다 ‘낙(豕+各)’이 먼저 등장한다. 『순자(荀子)』에는 “秦北界에 호락(胡(手+各))이 있다”하였고, 『전국책(戰國策)』에도 같은 내용이 보인다. 한편, 춘추시대의 유가경전류에는 모두 ‘貊’으로만 표기되어있는데 이것은 후대의 유가사상가들이 편찬한 개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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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상의 ?+?는 컴퓨터로 표현할 수 없는 한자를 파자하여 표기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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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전(左傳)』의‘召公九年條’에 있는 ‘肅愼, 燕, 毫이 北土’라는 기사는 『좌전』이 춘추시대 당시 그대로의 기록을 담고 있다고 보면 이들 세 지역은 중원문화권을 벗어난 북방문화권적 성격을 암시하는 말로 풀이된다. 춘추시대까지만 해도 임호(林胡), 누번(樓煩) 등 북방민족이 장성 이남까지 내려와 점거하고 있었는데 소위 몽골남부지역의 수원(綏遠:Ordos)청동문화의 분포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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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락(手+各)은 호(胡)와 이웃하고 있었고 호(胡)는 전형적인 중국북방의 유목민족을 일컫는 호칭이므로, 호락(胡(豕+各))이 연합하여 연(燕)과 제(齊)를 침범하였다가 제환공(제환공)에게 패하여 퇴각하였다는 『관자(管子)』「소광편(小匡篇)」 기사는 낙(手+各)의 위치가 요서지역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낙(豕+各)은 곧 맥(貊)으로 변하고 예(濊)와 함께 동이족(東夷族)이라는 것은 주지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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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동북지역의 중원지방과 가까운 발해북안 요서지역에 일정한 시기동안 맥족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이 맥(貊)이 중국북방의 호(胡)와 함께 서주말부터 춘추시대에 걸쳐 중원지방으로 빈번하게 침범을 시도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중원식 청동기물을 반입하게 되었을 것이고 이러한 양상이 하가점상층문화에 반영되어 부분적으로 중원식 청동기물들이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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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은 부여와 고구려를 건국한 대수맥(大水貊)과 소수맥(小水貊)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문헌상의 기록으로 맥족이 부여와 고구려가 설립된 만주지역에 이동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흉노(匈奴)가 강성하였던 모돈시대(冒頓時代)일 것으로 추정된다. 흉노의 강력한 대추장 모돈(冒頓)에 의해 동호(東胡)가 격파되고 그 여파로 맥(貊)도 동쪽으로 이동하여 예족(濊族) 지역에 들어가 부여와 고구려를 건국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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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에 “匈奴가 東으로 濊貊朝鮮과 접하게 되었다”는 기사에서 ‘濊貊’연칭은 이러한 정황을 반영한 표기이다. 따라서 '예'는 요동지방을 중심으로 신석기시대부터 강이나 하천을 터전으로 농경생활을 영위해왔던 선주민들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들 예족도 맥족과는 자연환경이 달라 경제생활 방식이 달랐지만, 두말할 필요도 없이 중국지역으로 이주해 간 사람들과 같은 동이족(東夷族)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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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은 하가점상층문화에서 나타난 기마풍속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고 또한 요서지역의 비파형동검문화를 구성한 중요집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맥족은 비록 목축을 주로 하였지만 농경을 바탕으로 한 예족과 같은 동이족(東夷族)이었기 때문에 상호 융화에 큰 무리가 없었을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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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요동지역과 길림장춘지역의 비파형동검문화의 주인공은 예족이고 요서지역의 비파형동검문화는 맥족이라는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데, 맥족이 동천하기 전의 하가점상층문화와 요동지역 청동문화가 지역에 따른 문화적 성격은 다를지라도 종족적으로는 같은 동이족으로서 상호연계되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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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파형동검의 형식변화를 보아도 Ⅳ식 동검의 시기에 요서지역에는 Ⅳ식 동검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길림장춘지역과 압록강하류역의 단동지역에만 Ⅳ식과 Ⅴ식의 후기형 동검이 나타나는 것은 이러한 맥족의 이동과 관계깊은 현상으로 문헌정황과도 일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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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 예맥족과 남방 韓族 합쳐 한민족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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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한민족(韓民族)은 북방의 예맥족(濊貊族)과 남방의 한족(韓族)이 합쳐서 형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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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중부와 서남부, 한반도 북부에 살고 있던 예맥족은 다시 고조선을 세운 조선족과 부여·고구려·옥저·동예를 세운 부여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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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결국 기원후 5세기 말 고구려로 통일된다. 한편 한반도 중·남부에 위치했던 한족은 독자적인 신석기 및 청동기 문화를 갖고 있었다.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마한·진한·변한 등 3개 집단으로 분립(分立)한 한족은 결국 백제와 신라로 양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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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맥족과 한족은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특히 기원전 2세기 말 중국에서 이주해 온 위만(衛滿)에 나라를 빼았긴 고조선의 준왕(準王)이 자신의 지지세력과 함께 한반도 남부로 이주한 후에는 두 집단이 뒤섞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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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같은 혼합은 신라의 삼국통일로 1차 완성되고, 다시 고려가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고 발해가 멸망한 후 고구려계 발해인들이 고려에 대규모로 유입되면서 최종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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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한민족의 형성 과정은 민족의 가장 뚜렷한 지표인 언어에서도 확인된다. 한국어의 뿌리는 예맥족과 한족이 함께 사용하던 ‘부여한조어(夫餘韓祖語)’로 이것이 발전한 고구려·백제·신라의 언어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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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삼국 통일에 따라 경주 중심의 신라어로 통합된 언어는 고려 초기 한민족이 최종 완성된 후 개성 지방의 언어를 중심으로 집결된다.

2022년 10월 10일 (월) 09:04 판

예맥족(濊貊族)

요동·발해만 연안 등에 거주해, 거주지역의 분포에 따라 예와 맥이 구분되었다고 보았다. 김정배(金貞培)도 예·맥·한은 동일계 족속으로서 그 분포지역의 차이에 따라 각각 구분되어졌다고 보았다.

이종설(異種說)의 대표적인 주장자는 미카미(三上次男)인데, 그는 예족은 유문토기문화(有文土器文化)를 영위했고, 생활방식에 있어서 수렵·어로의 비중이 컸던 고아시아족(古Asia族)계통이고, 맥족은 무문토기문화(無文土器文化)를 남긴 퉁구스족계통으로 파악하였다. 미카미의 주장은 빗살문토기문화와 무문토기문화가 같은 시기의 것이 아니라 시대를 선후하는 문화였다는 사실이 확실해짐에 따라 부정되어졌다.

한편, 이옥(李玉)은 맥족과 예족은 원래 중국의 산시성·허베이성 방면에 각각 거주하다가 점차 동으로 이동해왔는데, 서기전 3세기 무렵 장춘·농안 방면에 먼저 정착해 있던 예족은 이어 이동해온 맥족에게 밀려 남으로 왔다가 고조선에 쫓겨 요동군(遼東郡)에 예속하게 된 것이 예군(濊君) 남려(南閭)의 집단이었고, 이 예의 일부가 맥족에 흡수되어 서기전 2세기경 새로운 종족인 예맥이 성립했으니 이것이 고구려족(高句麗族)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렇듯 백가쟁명 식으로 다양한 견해들이 제기되어 왔다. 현재 학계에서는 예맥이 예와 맥으로 구분되지만, 서로 다른 계통이 아닌 하나의 계통이더라도 다른 갈래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즉, 예와 맥은 사회적·정치적으로 서로 구분이 되지만 종족상으로는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예맥 내부의 여러 집단 중에 우세한 집단이 등장하여 주변 세력을 병합하면서 점차 세력을 키워나갔다. 예맥고조선(古朝鮮)을 구성하는 종족집단을 이루었고, 한반도 중남부에 거주했던 한족(韓族)과 더불어 한민족 형성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한편 고구려의 종족기원과 관련하여 예·맥·예맥이 많이 주목되었다. 이들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어 현재로서는 정설이 없다. 고구려의 종족 기원에 대해서는 예족설, 맥족설, 예맥족설, 예맥족에서의 분화설, 원래는 예족인데 명칭상 맥족이라는 설 등 상정할 수 있는 가능성은 모두 제시되었다. 어느 하나로 단정지을 수는 없고 고구려 종족은 지역에 따라 대수맥(大水貊)·소수맥(小水貊) 등 조금씩 다른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3∼2세기 요동(遼東)에서 청천강에 이르는 지역에서 세형동검(細形銅劍)과 주조철부(鑄造鐵斧) 등 초기 철기문화를 사용하는 집단이 거주했다. 이들은 늦어도 기원전 3세기 말에는 철기문화를 받아들이고 적석묘(積石墓)를 축조하면서 주변지역과 구별되는 문화적 전통을 수립하였다고 추정된다. 철제 농기구의 보급은 농경기술의 발달과 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왔을 것이다. 나아가 인구의 증가와 사회분화를 촉진시켜 혼강(渾江)과 압록강 중류 지역 각지에서 점차 새로운 정치체의 형성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을 태동시켰다. 고구려 발흥지인 혼강과 독로강(禿魯江) 유역을 포괄한 압록상 중류 유역에 거주하던 주민은 기원 전후한 시기부터 점차 맥족이라고 불렀다. 부여 방면에서 이주해 온 일부 예족이 이에 융합되었다. 이어 고구려의 성장과 함께 인근의 여러 족속들이 흡수되어 고구려가 확대되었다.

고구려는 주어진 환경의 열악성과 경제적 기반의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 대외적으로 팽창정책을 구사했다. 이 과정에서 예맥계 종족이 주민의 상당수를 차지했던 두만강·대동강·요하·송화강 유역을 차례차례 제압해 나가면서 이들 주민들을 고구려 국가지배구조 내로 편입시켰다. 고구려는 동질성을 인정할 수 있는 주민들이 사는 지역을 우선적으로 확보하여 전략거점화하고, 이들을 고구려인으로 동화·통합시키는 정책을 수행해나갔다.

고조선(古朝鮮)의 종족구성 - 동이족(東夷族)과 예맥족(濊貊族)

▶ 고조선을 구성하는 최대의 종족은 예맥족(濊貊族)이라는 게 통설이다. 전통적인 중국의 중화사상이 성립된 춘추시대까지만 해도 동이족(東夷族)이 보편적인 종족명칭이었으나, 진나라 통일이후는 예맥족으로 바뀐다. 요동지역과 한반도서북지역을 중심으로 예맥족이 분포하고 있다는 데는 중국이나 한국학계가 모두 인정하고 있다. 문제는 요서지역을 점거한 것으로 보여 지는 고조선과 관련한 흔적들인데, 요동과 요서간의 선후관계에서부터 담당주체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

고고학적(考古學的)으로 한민족(韓民族)의 기원(起源)과 구성(構成)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연구한 학자는 김정학(金廷鶴)선생이다. 선생은 우리 민족의 기원에 대해 인류학적 연구를 도입하여 문화의 전파과정을 포함하여 민족의 이동경로까지 괄목할 만한 연구업적을 남겼다.

그에 따르면, 몽골종의 일파인 최초의 한반도 정착인들은 시베리아 바이칼호 북쪽 이른바 Cis-Baikal의 삼림지대에 살았던 구석기인들이라고 한다. 구석기시대부터 신석기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렵이나 어로와 같은 채집경제에 있었던 '古아시아족(paleoasiatics)' 또는 '古시베리아족(paleosiberians)' 이라 부르는 종족들인데 이들이 한반도로 이동해왔다고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중국지방의 농경을 기반으로 한 생산경제에서 보이는 채문토기(彩文土器)와는 다른 특징의 기하문토기(幾何文土器:櫛文土器로 빗살무늬토기라 한다)의 전통과 타제석기(打製石器)나 세석기(細石器)의 전통을 실례로 들고 있다.

이때가 기원전 2만5천년경으로 추정되며 그 후 新시베리아족으로서 우랄알타이족에 속하는 청동기문화를 지닌 종족들이 선주하였던 古아시아족을 정복 동화시켰다고 본다.

여기에는 한가지 중요한 사실이 빠져 있는데,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를 담당한 주체간에 요녕지역이라는 중간지대의 설정이 생략된 것이다. 즉, 고아시아족이라 하는 몽골리안이 한반도로 이주해 온 것은 구석기시대가 맞지만, 구석기말기 신석기초에 또 한차례의 신시베리아족이 요녕지역으로 남하하는데 이들은 청동기문화를 지닌 종족이 아니었고 그 시기도 기원전 2만5천년경이 아닌 신석기초 기원전 4천~3천5백년전이다.

설사 금속기를 연장으로 일부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청동기문화단계의 수준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단지 기후변동에 따른 남하세력으로 요녕지역에 자리 잡아 그 후에 청동기문화를 발전시켰다고 봐야 한다. 이들 요녕청동기문화인들이 한반도로 이주하거나 문화를 전파하게 된다. 그러므로 고아시아족을 정복 동화시킨 세력들은 다름아닌 시베리아전통의 세석기를 사용한 바이칼지역의 신시베리아족으로서 이들이 또한 고아시아족과 융합한 한민족을 구성한 종족인 셈이다.

현재 발굴된 청동기유물들은 중국측의 보고에 의하면 기원전 2천년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요녕지역이 그 중심이다. 이 요녕청동기문화의 특징은 비파형동검이나 다뉴세문경의 전통 등으로 연결되어 진다. 즉, 중국의 요녕지역과 한반도, 만주일대는 중국과 확연히 구분되는 동일 청동기문화권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요녕지역 청동기문화를 일괄적으로 묶어 '비파형동검문화(琵琶形銅劍文化)'라고 규정지을 수 없다는 점은 고고학적 발굴자료의 분석에서 살펴보았다. 다만 정치적 연맹체로서 연대의식의 상징이 되었던 비파형청동검을 매개로 하여 고조선(古朝鮮)이라는 연맹국가로 연계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와 같은 양상은 고대의 문헌자료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선사시대에 있어서의 종족문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동화와 융합이라는 문화적 복합현상이 나타나므로 사실상 종족문제는 크게 중요하다고 보기 어려우며, 오히려 지역과 문화적 친연관계에 따라 세력범위가 정해진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는 특히 북방계통의 종족간 가름에 있어서 더욱 그렇다. 이렇게 보면 크게 분류하여

(1)중원지역의 농경문화적 전통의 지역문화

(2)중국북방의 유족문화적 전통의 지역문화

(3)중국동북지역의 반농반목적 전통의 지역문화

등으로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중국 북부와 동북지역에는 알타이어족군에 속하는 몽골인종이 분포하고 있고 중원지역에는 비알타이어계의 몽골인종이 분포하고 있어 구별된다 하겠다.

중국동북지역의 청동기문화를 담당한 종족구성에 대한 어느 정도의 결론은 이미 지어지고 있다. 요동지역의 청동기문화는 문헌상의 예맥족(濊貊族)이, 요서지역의 청동기문화는 동호족(東胡族)이 각각 담당한 청동문화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과거 북한학자들의 주장처럼 요동지역 초기비파형동검문화 세력들의 확산으로 요서지역 비파형동검문화와 연관된 하가점상층문화가 전개되었다고 하는 '요동요서(遼東遼西) 예맥족설(濊貊族說)'의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이다.

종족구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종족명(種族名)과 지역명(地域名)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는 중국동북지역에 분포한 고대문화를 언급할 때 두가지 계통의 용어를 혼용하여 사용하였었다. 이는 철저하게 중국인의 시각에서 붙인 명칭이기 때문에 시대상황 변화에 대한 정확한 추이변동 추적을 하기 어렵게 되어 있다.

중국내륙에도 다양한 종족의 융합이 전개되어왔는데 유독 주변지역만을 종족명칭을 시대별로 따로 붙여 서로 상관관계가 없는 것으로 여기는 태도는 다분히 중화사관적 태도라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은 중화민족단일체가 주변의 다양한 종족들과 끊임없는 투쟁과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장구한 역사를 유지 발전시켜왔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생각된다.

중국동북지역만 하더라도 '東夷族', '濊族', '貊族', '肅愼族', '邑婁族', '山戎族', '東胡族', '朝鮮族', '發族', '夫餘族', '高句麗族', '靺鞨族', '女眞族', '契丹族', '鮮卑族', '烏丸族' 등 같은 지역이라도 각 시대별로 다른 종족명칭으로 부르고 있다. 이러한 종족명칭은 마치 서로 역사적이거나 지리적인 승계관계가 전혀 없는 듯이 비춰지기도 하고 오히려 문화의 단절 느낌마저 주고 있는 것이다.

청동기시대 중국동북지역에 등장하는 종족명은 '숙신족', '예맥족', '동호족', '산융족', '조선족', '발족(發族)' 등이다. '예맥족(濊貊族)'에 관해서는 고조선을 이룬 중심세력이라는 것과 그 위치가 부여·고구려지역에서 원래부터 분포하고 있었던 종족이 예족이고 서쪽에서 이동해 들어가 예족과 융합하여 부여와 고구려를 건국한 종족이 맥족이라는 견해에 일반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문헌상에서 보면 고대 중국동북지역에 관한 종족명칭으로 예(濊)와 맥(貊)이 많이 등장한다.

중국측의 문헌에서는 주로 춘추시대이후 형성된 것으로 보는 중화사상(華夷觀)에 의해 주말(周末)에서 진통일(秦統一)까지 동이(東夷)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고 진한(秦漢) 이후는 예맥(濊貊)이 등장한다. 이러한 현상은 진나라가 서이(西夷)출신이었기에 중국지역에 분포하는 이에 대한 관념을 비하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이(夷)나 예맥(濊貊)은 아마도 종족칭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최근의 북경에서 펴낸 『중국대백과전서(中國大百科全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夷는 (중국)동북지방 특히 발해연안(還渤海地方)에 거주하였고 그 분포가 강회지방(江淮地方:양자강유역)에 이른다. 이들은 夏, 商(殷), 周 三代때는 夷 혹은 九夷라 하고 西周初 成王때는 한동안 夷가 서로 연합하였으며 그들 종족의 본원지는 東北지방에 있었다.’

‘貊이란 『詩經』,『書經』에서 出據하였으며 秦漢代는 胡貊칭이 있었는데 胡는 北方거주족이며 貊은 東北거주족이다. 「注」貊은 즉 濊다.’

濊와 貊은 고고학상으로 볼 때, 신석기시대인이 아니고 청동기시대인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당시 중국고대에는 濊와 貊에 대해서 별로 구분없이 비하적 표현으로 사용한 것처럼 보인다. 고구려를 貊이라 하고 부여에 대해서는 濊라 하는 관점을 일부학자들은 각기 다른 지역경제를 반영한 명칭이라고도 보기도 하는데, 한자(漢字)의 의미구성을 고려하여 貊을 산악지역의 거주족으로 보고 濊를 하천지역의 거주족으로 보는 견해로 아직 명확한 근거는 없다.

한가지 언어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夷, 濊, 黎, 麗, 餘 등의 연관성과 貊,駱,白,毫,發,ㅂ·ㄺ 이라는 연관성에 대해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종족별로 구별한다면 이미 중원지역에 중국계 종족이 형성되기 전에 중국동부연안의 평야지대에는 발해연안에서 진출한 '이족(夷族)'이 분포하고 있었고 이들 중 일부가 황하문명을 발전 시킨 은(段)나라 문화를 창조하였을 정도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였었는데 또하나의 이족(西夷族) 출신인 진시황의 통일이후 독자적 세력이 와해되고 중국내륙에서 다른 종족과 동화되어 버렸던 역사적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중국사서에는 '발조선(發朝鮮)'이란 명칭이 자주 등장한다. 일부학자들은 '발조선(發朝鮮)'을 '발(發)'과 '조선(朝鮮)'으로 분리시켜서 보려고 하는데,‘발(發)’을 ‘맥(貊)’과 연관지어려는 태도에서 비롯되고 있으나, ‘發’과 ‘貊’은 어원의 형성과정이 다르다. 후술하겠지만,‘發’은 ‘밝’의 알타이어계 한자표기음으로써 ‘백(白, 百)’과 같고 후에 ‘번(番)’과 연결되는 음차(音借)일 뿐 '맥(貊)'과는 상관관계가 없다.

‘貊’은 ‘락(手+各)’자로부터 비롯되는데 ‘各’은 갑골문에서 혈거(穴居:지하식 주거지)를 뜻하고, 부수‘豕’는 ‘돼지, 벌레’를 뜻하므로 ‘貊’은 혈거(지하식 주거지)에서 돼지를 기르며 생활하는 모습을 표현한 상형문자의 합성이다. ‘락(手+各)’은 ‘胡(手+各)’으로 연칭되다가 ‘胡貊’으로 바뀌는데 ‘貊’의 등장은 ‘發, 白, 百’과 연계성이 확인된 이후의 호칭으로 변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사기(史記)』에는‘예락(濊(豕+各))’의 기록이 보편적인데 진(秦)나라 이전의 선진시대부터 ‘맥(貊)’보다 ‘낙(豕+各)’이 먼저 등장한다. 『순자(荀子)』에는 “秦北界에 호락(胡(手+各))이 있다”하였고, 『전국책(戰國策)』에도 같은 내용이 보인다. 한편, 춘추시대의 유가경전류에는 모두 ‘貊’으로만 표기되어있는데 이것은 후대의 유가사상가들이 편찬한 개작이기 때문이다.

(한자표기상의 ?+?는 컴퓨터로 표현할 수 없는 한자를 파자하여 표기한 것임.)

『좌전(左傳)』의‘召公九年條’에 있는 ‘肅愼, 燕, 毫이 北土’라는 기사는 『좌전』이 춘추시대 당시 그대로의 기록을 담고 있다고 보면 이들 세 지역은 중원문화권을 벗어난 북방문화권적 성격을 암시하는 말로 풀이된다. 춘추시대까지만 해도 임호(林胡), 누번(樓煩) 등 북방민족이 장성 이남까지 내려와 점거하고 있었는데 소위 몽골남부지역의 수원(綏遠:Ordos)청동문화의 분포권이다.

따라서 락(手+各)은 호(胡)와 이웃하고 있었고 호(胡)는 전형적인 중국북방의 유목민족을 일컫는 호칭이므로, 호락(胡(豕+各))이 연합하여 연(燕)과 제(齊)를 침범하였다가 제환공(제환공)에게 패하여 퇴각하였다는 『관자(管子)』「소광편(小匡篇)」 기사는 낙(手+各)의 위치가 요서지역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낙(豕+各)은 곧 맥(貊)으로 변하고 예(濊)와 함께 동이족(東夷族)이라는 것은 주지된 사실이다.

중국동북지역의 중원지방과 가까운 발해북안 요서지역에 일정한 시기동안 맥족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이 맥(貊)이 중국북방의 호(胡)와 함께 서주말부터 춘추시대에 걸쳐 중원지방으로 빈번하게 침범을 시도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중원식 청동기물을 반입하게 되었을 것이고 이러한 양상이 하가점상층문화에 반영되어 부분적으로 중원식 청동기물들이 나타나고 있다.

맥은 부여와 고구려를 건국한 대수맥(大水貊)과 소수맥(小水貊)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문헌상의 기록으로 맥족이 부여와 고구려가 설립된 만주지역에 이동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흉노(匈奴)가 강성하였던 모돈시대(冒頓時代)일 것으로 추정된다. 흉노의 강력한 대추장 모돈(冒頓)에 의해 동호(東胡)가 격파되고 그 여파로 맥(貊)도 동쪽으로 이동하여 예족(濊族) 지역에 들어가 부여와 고구려를 건국하게 된 것이다.

『사기』에 “匈奴가 東으로 濊貊朝鮮과 접하게 되었다”는 기사에서 ‘濊貊’연칭은 이러한 정황을 반영한 표기이다. 따라서 '예'는 요동지방을 중심으로 신석기시대부터 강이나 하천을 터전으로 농경생활을 영위해왔던 선주민들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들 예족도 맥족과는 자연환경이 달라 경제생활 방식이 달랐지만, 두말할 필요도 없이 중국지역으로 이주해 간 사람들과 같은 동이족(東夷族)이었다.

맥은 하가점상층문화에서 나타난 기마풍속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고 또한 요서지역의 비파형동검문화를 구성한 중요집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맥족은 비록 목축을 주로 하였지만 농경을 바탕으로 한 예족과 같은 동이족(東夷族)이었기 때문에 상호 융화에 큰 무리가 없었을 줄 안다.

이것은 요동지역과 길림장춘지역의 비파형동검문화의 주인공은 예족이고 요서지역의 비파형동검문화는 맥족이라는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데, 맥족이 동천하기 전의 하가점상층문화와 요동지역 청동문화가 지역에 따른 문화적 성격은 다를지라도 종족적으로는 같은 동이족으로서 상호연계되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비파형동검의 형식변화를 보아도 Ⅳ식 동검의 시기에 요서지역에는 Ⅳ식 동검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길림장춘지역과 압록강하류역의 단동지역에만 Ⅳ식과 Ⅴ식의 후기형 동검이 나타나는 것은 이러한 맥족의 이동과 관계깊은 현상으로 문헌정황과도 일치하고 있다.


북방 예맥족과 남방 韓族 합쳐 한민족 형성

오늘의 한민족(韓民族)은 북방의 예맥족(濊貊族)과 남방의 한족(韓族)이 합쳐서 형성된 것이다.

만주 중부와 서남부, 한반도 북부에 살고 있던 예맥족은 다시 고조선을 세운 조선족과 부여·고구려·옥저·동예를 세운 부여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들은 결국 기원후 5세기 말 고구려로 통일된다. 한편 한반도 중·남부에 위치했던 한족은 독자적인 신석기 및 청동기 문화를 갖고 있었다.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마한·진한·변한 등 3개 집단으로 분립(分立)한 한족은 결국 백제와 신라로 양분된다.

예맥족과 한족은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특히 기원전 2세기 말 중국에서 이주해 온 위만(衛滿)에 나라를 빼았긴 고조선의 준왕(準王)이 자신의 지지세력과 함께 한반도 남부로 이주한 후에는 두 집단이 뒤섞이게 됐다.

그리고 이 같은 혼합은 신라의 삼국통일로 1차 완성되고, 다시 고려가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고 발해가 멸망한 후 고구려계 발해인들이 고려에 대규모로 유입되면서 최종 완성된다.

이런 한민족의 형성 과정은 민족의 가장 뚜렷한 지표인 언어에서도 확인된다. 한국어의 뿌리는 예맥족과 한족이 함께 사용하던 ‘부여한조어(夫餘韓祖語)’로 이것이 발전한 고구려·백제·신라의 언어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는 없었다.

신라의 삼국 통일에 따라 경주 중심의 신라어로 통합된 언어는 고려 초기 한민족이 최종 완성된 후 개성 지방의 언어를 중심으로 집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