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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스스로를 단정함과 장중함으로 다스렸으며,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음. 후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됨. | 공은 스스로를 단정함과 장중함으로 다스렸으며,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음. 후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됨. |
2022년 8월 24일 (수) 01:37 판
1760년(영조36)~1826년(순조26).
자 의겸(毅兼). 호 초천(草川). 사천(沙川) 서창경(徐昌鏡)의 아들. 돈암(遯菴)의 10세손.
공은 스스로를 단정함과 장중함으로 다스렸으며,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음. 후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됨.
공은 구고이사(九皐里社)의 등서루(登西樓)를 건립하기 시작하여 이의 완성을 담당하였음. 광뢰(廣瀨) 이야순(李野淳)에게 편지를 보내어 상복례(喪服禮)에 관해서 질의하기도 하였음.
갈천(葛川) 김희주(金熙周)가 「輓徐毅兼弘胤」에서 이르기를,
東南名勝盡飄零 영남의 원로들께서 모두 돌아가심에, 瞻望沙川若曉星 사천(沙川)을 새벽별처럼 우러렀었지. 養病十年多定力 10년 동안 양병(養病)하여 정력(定力) 많이 쌓였고 傳家三世有遺經 3세 동안 대물림되어 옛 경전(經傳) 남아 있다네. 自來蘊藉無塵累 본디 온화한 성품에 속된 때 없었고 愈益謙恭見典刑 더욱 겸손하고 공경하니 전형(典刑) 보게 되었네. 宿約梨亭如昨日 이점(梨店)에 정자(亭子) 짓자던 옛 약속 어제 같으니 溪山依舊待人靑 계산(溪山)은 변함없이 반가운 낯빛으로 기다린다네.
라고 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