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식(조선)"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새 문서: == 정의 == 조선시대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의 의병장. 지사. == 개설 ==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청지(淸之), 호는 명암(銘巖). 아버지는...) |
(→개설) |
||
4번째 줄: | 4번째 줄: | ||
== 개설 == | == 개설 == | ||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청지(淸之), 호는 명암(銘巖). 아버지는 봉사(奉事) [[서충립]](徐忠立) 양자이다. |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청지(淸之), 호는 명암(銘巖). 아버지는 봉사(奉事) [[서충립]](徐忠立) 양자이다. | ||
+ | |||
+ | |||
+ | == 가족 == | ||
+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
+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고려)|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
+ |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신(고려1)|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 | ||
+ |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 | ||
+ | *****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진(고려)|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 | ||
+ | ******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
+ |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영(고려)|서영]](徐穎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
+ | ******** 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균형]](徐鈞衡 종2품 정당문학) | ||
+ | ********* 고고고조할아버지: [[서침]](徐沈 정3품 조봉대부) | ||
+ | ********** 고고조할아버지 : [[서문한(조선)|서문한]](徐文翰 현감) | ||
+ | *********** 고조할아버지 : [[서제]](徐濟, 현감공파(縣監公派) | ||
+ | ************ 증조할아버지 : [[서맹원(조선)|서맹원]](徐孟源 충순위) | ||
+ | ************* 할아버지 : [[서필(조선)|서필]](徐弼 예빈시 직장) | ||
+ | ************** 아버지 : [[서응기]](徐應期 생원) | ||
+ | *************** 형 : [[서형]](徐泂 진사) | ||
+ | **************** 조카(양자.[[서흡]]의 자): [[서사원(조선)|서사원]](徐思遠 학자) | ||
+ | **************** 형 :[[서흡]](徐洽 전교) | ||
+ | **************** 본인 : [[서식(조선)|서식]](徐湜 의병장) | ||
+ | **************** 동생 : [[서함]](徐涵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 ||
+ | ***************** 조카: [[서사건]](徐思建 증 장악원 정(贈 掌樂院正) | ||
+ | ****************** 손조카: [[서변]](徐忭 학자) | ||
+ | *********** 작은고조할아버지 : [[서도]](徐渡, 학유공파(學諭公派) | ||
+ | ************ 작은증조할아버지: [[서지원(조선)|서지원]](徐智元 학자) | ||
== 생애 및 활동사항 == | == 생애 및 활동사항 == |
2022년 8월 16일 (화) 12:01 판
목차
정의
조선시대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의 의병장. 지사.
개설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청지(淸之), 호는 명암(銘巖). 아버지는 봉사(奉事) 서충립(徐忠立) 양자이다.
가족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주행(徐周行)(달성군)
생애 및 활동사항
8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삼년상을 치르는데 가례(家禮)를 준수해서 사람들이 어른으로 대접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로 어머니를 모시는데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한 번은 어머니가 위독하여 목숨이 경각에 달리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어머니의 입에 넣어주자 어머니가 소생하였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김천일(金千鎰)·고경명(高敬命)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병으로 나서지 못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운봉현감(雲峯縣監) 남간(南侃)을 찾아가 의병활동을 주장하자 남간이 공을 의병장으로 삼았다. 공이 이에 격문을 돌리고 의병 수천명을 모아 황산(荒山)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벼슬을 주었으나 끝내 사양하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또다시 천안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다.
연속되는 국난으로 고을의 풍기가 문란해지자 마을의 뜻있는 노인들과 향약 7조를 제정하고 사재를 털어서 향토부흥에 헌신하였다. 운봉(雲峰)의 용암서원(龍巖書院)과 엄계서원(嚴溪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