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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1년 후손들이 증산사(甑山祠)[경상남도 양산시 매곡동]를 건립하여 제향하였는데, 증산사는 흥선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으로 훼철되었다가 2004년 복원되었다. 2000년 충의사[울산광역시 중구 서원11길 25]와 2017년 창표사[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631]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 1791년 후손들이 증산사(甑山祠)[경상남도 양산시 매곡동]를 건립하여 제향하였는데, 증산사는 흥선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으로 훼철되었다가 2004년 복원되었다. 2000년 충의사[울산광역시 중구 서원11길 25]와 2017년 창표사[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631]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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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증산사(甑山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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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상남도 양산시 매곡동에 있는 조선 후기 재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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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곡동에 처음 뿌리를 내린 사람이 바로 임진왜란 때의 공신인 서몽호이다. 서몽호가 임진왜란 때 왜적을 토벌하고, 수많은 공을 세우자 권율 장군과 어사 한준겸이 임금에게 그 공을 알려 훈련원주부를 제수받았다. 서몽호가 죽은 뒤에는 충절을 기리고자 영남의 유림들이 건의하여 경상감영의 지원으로 1791년 매곡리에 사당을 지었다. 이때 사우를 증산사라 하고, 당호를 행의당(行義堂)라 하고, 재호(齋號)를 지의재(知義齋)라 하고, 문을 숭의문(崇義門)이라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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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당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5칸이다. |
2022년 8월 16일 (화) 09:28 판
서몽호(徐夢虎)
정의
임진왜란 때 활약한 울산 출신의 의병.
가계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병보(炳甫). 고려 때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서진(徐晉)의 후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주부(主簿) 서건손(徐乾孫)이며, 아버지는 서면(徐勉)이고 어머니는 영일현감을 지낸 박문옥(朴文沃)의 딸 경주박씨(慶州朴氏)이다. 처는 안복동(安福同)의 딸이다.
활동 사항
서몽호(徐夢虎)[1539~1615]는 울산광역시 북구 호계동에서 태어났다. 1609년 당시 울산도호부 동면 농소리에 거주하였으며, 울산군에 속한 웅상면 매곡리[현 양산시 매곡동]에 입향하였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웃의 장정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이해 5월 함월산성에서 울산과 경주 지역의 의병장들이 의병 부대를 편성할 때 참여하였다. 5월 7일 병영성 탈환전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으며, 6월 9일 울산과 경주를 비롯한 영남 지역 의병들이 결전을 결의한 경주 문천회맹(蚊川會盟)에 참여하였다. 권율(權慄)과 어사 한준겸(韓浚謙)이 공을 알려 수문장에 이어 훈련원주부에 제수되었다. 1599년 10월에는 명나라 장수 마귀(馬貴)가 울산 서생포에서 회동을 열고 창표당(蒼表堂)을 지어 공을 세운 사절들의 위패를 열향(列享)하였다고 전하는데, 그 기문인 「창표당안(蒼表堂案)」에 만도 의용(晩到義勇) 15명 중 한 사람으로 기록되었다.
묘소
묘소는 경상남도 양산시 매곡동 산35번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1791년 후손들이 증산사(甑山祠)[경상남도 양산시 매곡동]를 건립하여 제향하였는데, 증산사는 흥선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으로 훼철되었다가 2004년 복원되었다. 2000년 충의사[울산광역시 중구 서원11길 25]와 2017년 창표사[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631]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증산사(甑山祠)
[정의]
경상남도 양산시 매곡동에 있는 조선 후기 재실.
[개설]
매곡동에 처음 뿌리를 내린 사람이 바로 임진왜란 때의 공신인 서몽호이다. 서몽호가 임진왜란 때 왜적을 토벌하고, 수많은 공을 세우자 권율 장군과 어사 한준겸이 임금에게 그 공을 알려 훈련원주부를 제수받았다. 서몽호가 죽은 뒤에는 충절을 기리고자 영남의 유림들이 건의하여 경상감영의 지원으로 1791년 매곡리에 사당을 지었다. 이때 사우를 증산사라 하고, 당호를 행의당(行義堂)라 하고, 재호(齋號)를 지의재(知義齋)라 하고, 문을 숭의문(崇義門)이라 하였다.
[변천]
1791년에 창건하였다가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2004년에 복원하였다.
[형태]
사당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5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