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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조]](徐景祚)[1852~1938]는 1852년 평안북도 의주의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만주에서 상업에 종사하던 중 기독교 신자가 된 형 [[서상륜]](徐相崙)의 전도로 신자가 되었고, 형과 함께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 한국 최초의 교회로 일컬어지는 소래교회[송천교회]를 설립하였다. 그 후 서울로 이주하여 1887년 봄에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에게 세례를 받고, 1888년부터 언더우드의 조사 및 권서인으로 황해도 장연 지방에서 활동하였다.
 
[[서경조]](徐景祚)[1852~1938]는 1852년 평안북도 의주의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만주에서 상업에 종사하던 중 기독교 신자가 된 형 [[서상륜]](徐相崙)의 전도로 신자가 되었고, 형과 함께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 한국 최초의 교회로 일컬어지는 소래교회[송천교회]를 설립하였다. 그 후 서울로 이주하여 1887년 봄에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에게 세례를 받고, 1888년부터 언더우드의 조사 및 권서인으로 황해도 장연 지방에서 활동하였다.
  
1893년에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윌리엄 베어드(William Martyn Baird)[배위량(裵緯良), 1862~1931]의 초청으로 4월 17일부터 5월 20일까지 약 1개월간 베어드와 함께 400마일에 달하는 순회 전도 여행을 다니며 부산과 인근 지방 전도자로 활동하였다. 이후 서경조는 한국 최초의 장로가 되어 황해도 지방의 교회 설립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1907년 평양 장로회신학교[평양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 서울의 새문안교회에서 협동 목사로 일하다가, 1913년 사임하였고, 1916년 서울 안국교회에서도 잠시 목회 활동을 하다가 곧 사임하였다. 이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에 투신한 둘째 아들 [[서병호]](徐丙浩)와 함께 남은 삶을 보내다 1938년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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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에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윌리엄 베어드(William Martyn Baird)[배위량(裵緯良), 1862~1931]의 초청으로 4월 17일부터 5월 20일까지 약 1개월간 베어드와 함께 400마일에 달하는 순회 전도 여행을 다니며 부산과 인근 지방 전도자로 활동하였다. 이후 [[서경조]]는 한국 최초의 장로가 되어 황해도 지방의 교회 설립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1907년 평양 장로회신학교[평양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 서울의 새문안교회에서 협동 목사로 일하다가, 1913년 사임하였고, 1916년 서울 안국교회에서도 잠시 목회 활동을 하다가 곧 사임하였다. 이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에 투신한 둘째 아들 [[서병호]](徐丙浩)와 함께 남은 삶을 보내다 1938년에 세상을 떠났다.

2022년 8월 11일 (목) 10:07 판

정의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한국 기독교 초기 전도자이자 목사.

활동 사항

서경조(徐景祚)[1852~1938]는 1852년 평안북도 의주의 몰락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만주에서 상업에 종사하던 중 기독교 신자가 된 형 서상륜(徐相崙)의 전도로 신자가 되었고, 형과 함께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 한국 최초의 교회로 일컬어지는 소래교회[송천교회]를 설립하였다. 그 후 서울로 이주하여 1887년 봄에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에게 세례를 받고, 1888년부터 언더우드의 조사 및 권서인으로 황해도 장연 지방에서 활동하였다.

1893년에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윌리엄 베어드(William Martyn Baird)[배위량(裵緯良), 1862~1931]의 초청으로 4월 17일부터 5월 20일까지 약 1개월간 베어드와 함께 400마일에 달하는 순회 전도 여행을 다니며 부산과 인근 지방 전도자로 활동하였다. 이후 서경조는 한국 최초의 장로가 되어 황해도 지방의 교회 설립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1907년 평양 장로회신학교[평양신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 서울의 새문안교회에서 협동 목사로 일하다가, 1913년 사임하였고, 1916년 서울 안국교회에서도 잠시 목회 활동을 하다가 곧 사임하였다. 이후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에 투신한 둘째 아들 서병호(徐丙浩)와 함께 남은 삶을 보내다 1938년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