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한기"의 두 판 사이의 차이
31번째 줄: | 31번째 줄: | ||
=='''정의'''== | =='''정의'''== | ||
− | 조선 후기의 | + |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며 과학사상가이다. |
=='''내용'''== | =='''내용'''== | ||
− | 최한기(1803-1877)의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지로(芝老), 호는 혜강(惠岡)·패동(浿東)·명남루(明南樓)·기화당(氣和堂) 등 다수이다. 아버지는 [[최치현|최치현(崔致鉉)]]이며, 어머니는 청주 한씨(淸州韓氏)이다. 평생 학문에 진력하였고, 부인 반남 박씨(潘南朴氏)와의 사이에 2남 5녀를 두었다 | + | ===가계=== |
+ | 최한기(1803-1877)의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지로(芝老), 호는 혜강(惠岡)·패동(浿東)·명남루(明南樓)·기화당(氣和堂) 등 다수이다. 아버지는 [[최치현|최치현(崔致鉉)]]이며, 어머니는 청주 한씨(淸州韓氏)이다. 평생 학문에 진력하였고, 부인 반남 박씨(潘南朴氏)와의 사이에 2남 5녀를 두었다.<ref>박성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7736 최한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 | 부친인 [[최치현]]은 효성이 지극하고 글을 잘해 영락한 삭녕 최씨 가문을 일으킬 재목으로 일찍이 촉망받았다. 그러나 과거 응시에 번번이 낙방하여 출사가 좌절되면서 그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벼슬길과는 인연이 멀었지만, 개성 지역에서는 나름대로 문명(文名)이었다. [[최치현]]과 | + | ===지역 문명이던 친부=== |
+ | 개성 출신이지만, 대부분 서울에서 살았다.<ref>정성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1285&cid=59015&categoryId=59015 최한기]", 인물한국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부친인 [[최치현]]은 효성이 지극하고 글을 잘해 영락한 삭녕 최씨 가문을 일으킬 재목으로 일찍이 촉망받았다. 그러나 과거 응시에 번번이 낙방하여 출사가 좌절되면서 그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벼슬길과는 인연이 멀었지만, 개성 지역에서는 나름대로 문명(文名)이었다. [[최치현]]과 장인 [[한경리]]는 사위와 장인 관계를 넘어 제자와 스승관계였다. 여러 권의 시문집을 남기기도 한 부친 [[최치현]]은 최한기가 10세 때인 1812년 27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 ||
− | 최한기는 | + | ===교양인 양부=== |
+ | 부친의 사망 당시 최한기는 큰집 종숙부인 [[최광현]]의 양자로 이미 입양된 상태였다.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던 본가에 비해 양가는 무과 집안이었다. 양부 [[최광현]]은 1800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지방 군수를 지내기도 했다. 많은 책을 소장하고 거문고도 켤 줄 아는 교양있는 인물이었던 [[최광현]]은 최한기의 외조부인 [[한경리]]를 비롯하여 [[한경의]]·[[김천복]]·[[김헌기]] 등 개성 지역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최한기의 학문적 바탕은 친부와 양부 모두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ref>정성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1285&cid=59015&categoryId=59015 최한기]", 인물한국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
− | + | ===유일한 벗, 김정호=== | |
+ | 최한기는 잘나가는 양반 자제들보다는 자신과 생각이 비슷한 인물들과 어울렸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는 최한기가 벗이라 부른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자기와 뜻을 같이하는 [[이규경]], [[김정호]] 등과 학문 토론을 자주 하였다.<ref>정성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571285&cid=59015&categoryId=59015 최한기]", 인물한국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이들과 함께 중국에서 나온 세계지도를 대추나무에 새겼고, 1834년 [[김정호]]가 『[[청구도|청구도(靑丘圖)]]』를 만들자 여기에 제를 써주기도 하였다.<ref>박성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7736 최한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 | + | ===경험주의적 시각=== | |
+ | 최한기의 학문세계는 유교적 전통에서는 극히 드물게 강한 경험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의 경험론적 방법론이 얼마나 서양의 영향을 받아 성립된 것인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으나, 그는 서양의 역산(曆算)과 기학(氣學)을 크게 중요시하면서 서양의 과학기술 도입에 적극적이었다. 그의 학문방법을 설명한 『[[추측록|추측록(推測錄)]]』·『[[신기통|신기통(神氣通)]]』이 이미 많은 서양과학의 예를 들어 그의 논지를 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뒤의 저술이 모두 서양학문을 소개하려는 노력으로 일관되어 있다.<ref>박성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7736 최한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 | ===최한기의 천문학 저서=== | ||
+ | 1857년에 쓴 『[[지구전요|지구전요(地球典要)]]』에서 최한기는 세계 각국의 지리·역사·물산·학문 등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미 중국에서 나온 위원(魏源)의 『[[해국도지|해국도지(海國圖志)]]』와 [[서계여|서계여(徐繼畲)]]의 『[[영환지략|영환지략(瀛環志略)]]』을 바탕으로 요약한 것이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내세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비롯하여 적지않은 서양과학의 내용도 여기에 적잖이 포함되어 있다. 서양천문학에 관하여서는 1867년에 간행된 『[[성기운화|성기운화(星氣運化)]]』가 있다. 이는 영국의 유명한 천문학자 허셜(Herschel,W.)이 쓴 『[[천문학개론]]』(The Outline of Astrono-my)의 중국어 번역본인 『[[담천|담천(談天)]]』을 다시 중역한 것이다.<ref>박성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7736 최한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 | |||
+ | ===서양의학에 관한 저술=== | ||
+ | 그는 특히 서양의학의 소개에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1866년에 지은 그의 『[[신기천험|신기천험(身機踐驗)]]』은 인체를 신기가 운화(運化)하는 기계 같은 것으로 보고 서양의학의 대강을 소개한 것이다. 동양의학에 비하여 해부학이 크게 앞서 있고 병리학도 더 발달되어 있다고 지적한 그의 『[[신기천험]]』은 영국인 선교의사 홉슨(Hobson, B., 중국 이름 合信)의 서양의학서적을 ‘편수’하여 만든 것이다.<ref>박성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7736 최한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br/> | ||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최한기의 저술을 연대순으로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농정회요|농정회요(農政會要)]]』(1830), 『[[육해법|육해법(陸海法)]]』(1834), 『[[청구도제|청구도제(靑丘圖題)]]』(1834), 『[[만국경위지구도|만국경위지구도(萬國經緯地球圖)]]』(1834, 현존 미상), 『[[추측록]]』(1836), 『[[강관론|강관론(講官論)]]』(1836), 『[[신기통]]』(1836), 『[[기측체의|기측체의(氣測體義)]]』(1836, 추측록과 신기통을 합본한 것), 『[[감평|감평(鑑枰)]]』(1838, 뒤에 人政에 포함됨), 『[[의상이수|의상이수(儀象理數)]]』(1839), 『[[심기도설|심기도설(心器圖說)]]』(1842), 『[[소차유찬|소차유찬(疏箚類纂)]]』(1843), 『[[습산진벌|습산진벌(習算津筏)]]』(1850), 『[[우주책|우주책(宇宙策)]]』(연대 미상), 『[[지구전요]]』(1857), 『[[기학|기학(氣學)]]』(1857), 『[[운화측험|운화측험(運化測驗)]]』(1860), 『[[인정|인정(人政)]]』(1860), 『[[신기천험]]』(1866), 『[[성기운화]]』(1867), 『[[명남루수록|명남루수록(明南樓隨錄)]]』(연대 미상) 등이다.<ref>박성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7736 최한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최한기의 저술을 연대순으로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농정회요|농정회요(農政會要)]]』(1830), 『[[육해법|육해법(陸海法)]]』(1834), 『[[청구도제|청구도제(靑丘圖題)]]』(1834), 『[[만국경위지구도|만국경위지구도(萬國經緯地球圖)]]』(1834, 현존 미상), 『[[추측록]]』(1836), 『[[강관론|강관론(講官論)]]』(1836), 『[[신기통]]』(1836), 『[[기측체의|기측체의(氣測體義)]]』(1836, 추측록과 신기통을 합본한 것), 『[[감평|감평(鑑枰)]]』(1838, 뒤에 人政에 포함됨), 『[[의상이수|의상이수(儀象理數)]]』(1839), 『[[심기도설|심기도설(心器圖說)]]』(1842), 『[[소차유찬|소차유찬(疏箚類纂)]]』(1843), 『[[습산진벌|습산진벌(習算津筏)]]』(1850), 『[[우주책|우주책(宇宙策)]]』(연대 미상), 『[[지구전요]]』(1857), 『[[기학|기학(氣學)]]』(1857), 『[[운화측험|운화측험(運化測驗)]]』(1860), 『[[인정|인정(人政)]]』(1860), 『[[신기천험]]』(1866), 『[[성기운화]]』(1867), 『[[명남루수록|명남루수록(明南樓隨錄)]]』(연대 미상) 등이다.<ref>박성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7736 최한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2018년 1월 4일 (목) 16:47 판
최한기(崔漢綺) | |
대표명칭 | 최한기 |
---|---|
한자표기 | 崔漢綺 |
생몰년 | 1803-1877 |
본관 | 삭녕(朔寧) |
호 | 혜강(惠岡), 패동(浿東), 명남루(明南樓), 기화당(氣和堂) |
자 | 지로(芝老) |
시대 | 조선 |
대표저서 | 농정회요, 육해법, 청구도제, 만국경위지구도 |
배우자 | 반남 박씨(潘南朴氏) |
부 | 최치현(崔致鉉) |
모 | 청주 한씨(淸州韓氏) |
자녀 | 최병대(崔柄大) |
성격 | 문신, 학자 |
유형 | 인물 |
목차
정의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며 과학사상가이다.
내용
가계
최한기(1803-1877)의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지로(芝老), 호는 혜강(惠岡)·패동(浿東)·명남루(明南樓)·기화당(氣和堂) 등 다수이다. 아버지는 최치현(崔致鉉)이며, 어머니는 청주 한씨(淸州韓氏)이다. 평생 학문에 진력하였고, 부인 반남 박씨(潘南朴氏)와의 사이에 2남 5녀를 두었다.[1]
지역 문명이던 친부
개성 출신이지만, 대부분 서울에서 살았다.[2] 부친인 최치현은 효성이 지극하고 글을 잘해 영락한 삭녕 최씨 가문을 일으킬 재목으로 일찍이 촉망받았다. 그러나 과거 응시에 번번이 낙방하여 출사가 좌절되면서 그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벼슬길과는 인연이 멀었지만, 개성 지역에서는 나름대로 문명(文名)이었다. 최치현과 장인 한경리는 사위와 장인 관계를 넘어 제자와 스승관계였다. 여러 권의 시문집을 남기기도 한 부친 최치현은 최한기가 10세 때인 1812년 27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교양인 양부
부친의 사망 당시 최한기는 큰집 종숙부인 최광현의 양자로 이미 입양된 상태였다.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던 본가에 비해 양가는 무과 집안이었다. 양부 최광현은 1800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지방 군수를 지내기도 했다. 많은 책을 소장하고 거문고도 켤 줄 아는 교양있는 인물이었던 최광현은 최한기의 외조부인 한경리를 비롯하여 한경의·김천복·김헌기 등 개성 지역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최한기의 학문적 바탕은 친부와 양부 모두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3]
유일한 벗, 김정호
최한기는 잘나가는 양반 자제들보다는 자신과 생각이 비슷한 인물들과 어울렸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는 최한기가 벗이라 부른 유일한 인물이다. 그는 자기와 뜻을 같이하는 이규경, 김정호 등과 학문 토론을 자주 하였다.[4] 이들과 함께 중국에서 나온 세계지도를 대추나무에 새겼고, 1834년 김정호가 『청구도(靑丘圖)』를 만들자 여기에 제를 써주기도 하였다.[5]
경험주의적 시각
최한기의 학문세계는 유교적 전통에서는 극히 드물게 강한 경험주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의 경험론적 방법론이 얼마나 서양의 영향을 받아 성립된 것인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으나, 그는 서양의 역산(曆算)과 기학(氣學)을 크게 중요시하면서 서양의 과학기술 도입에 적극적이었다. 그의 학문방법을 설명한 『추측록(推測錄)』·『신기통(神氣通)』이 이미 많은 서양과학의 예를 들어 그의 논지를 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뒤의 저술이 모두 서양학문을 소개하려는 노력으로 일관되어 있다.[6]
최한기의 천문학 저서
1857년에 쓴 『지구전요(地球典要)』에서 최한기는 세계 각국의 지리·역사·물산·학문 등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미 중국에서 나온 위원(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志)』와 서계여(徐繼畲)의 『영환지략(瀛環志略)』을 바탕으로 요약한 것이다.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내세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비롯하여 적지않은 서양과학의 내용도 여기에 적잖이 포함되어 있다. 서양천문학에 관하여서는 1867년에 간행된 『성기운화(星氣運化)』가 있다. 이는 영국의 유명한 천문학자 허셜(Herschel,W.)이 쓴 『천문학개론』(The Outline of Astrono-my)의 중국어 번역본인 『담천(談天)』을 다시 중역한 것이다.[7]
서양의학에 관한 저술
그는 특히 서양의학의 소개에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1866년에 지은 그의 『신기천험(身機踐驗)』은 인체를 신기가 운화(運化)하는 기계 같은 것으로 보고 서양의학의 대강을 소개한 것이다. 동양의학에 비하여 해부학이 크게 앞서 있고 병리학도 더 발달되어 있다고 지적한 그의 『신기천험』은 영국인 선교의사 홉슨(Hobson, B., 중국 이름 合信)의 서양의학서적을 ‘편수’하여 만든 것이다.[8]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최한기의 저술을 연대순으로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농정회요(農政會要)』(1830), 『육해법(陸海法)』(1834), 『청구도제(靑丘圖題)』(1834), 『만국경위지구도(萬國經緯地球圖)』(1834, 현존 미상), 『추측록』(1836), 『강관론(講官論)』(1836), 『신기통』(1836), 『기측체의(氣測體義)』(1836, 추측록과 신기통을 합본한 것), 『감평(鑑枰)』(1838, 뒤에 人政에 포함됨), 『의상이수(儀象理數)』(1839), 『심기도설(心器圖說)』(1842), 『소차유찬(疏箚類纂)』(1843), 『습산진벌(習算津筏)』(1850), 『우주책(宇宙策)』(연대 미상), 『지구전요』(1857), 『기학(氣學)』(1857), 『운화측험(運化測驗)』(1860), 『인정(人政)』(1860), 『신기천험』(1866), 『성기운화』(1867), 『명남루수록(明南樓隨錄)』(연대 미상) 등이다.[9]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최치현 | 최한기 | A는 B의 아버지이다 | A ekc:hasSon B |
최한기 | 최병대 | A는 B의 아버지이다 | A ekc:hasSon B |
최광현 | 최한기 | A는 B의 아버지이다 | A ekc:hasSon B |
최한기 | 김정호 | A는 B와 교유하였다 | A foaf:knows B |
최한기 | 농정회요 | A는 B가 저술하였다 | A dcterms:creator B |
최한기 | 육해법 | A는 B가 저술하였다 | A dcterms:creator B |
최한기 | 청구도제 | A는 B가 저술하였다 | A dcterms:creator B |
최한기 | 만국경위지구도 | A는 B가 저술하였다 | A dcterms:creator B |
최한기 | 추측록 | A는 B가 저술하였다 | A dcterms:creator B |
최한기 | 강관론 | A는 B가 저술하였다 | A dcterms:creator B |
최한기 | 신기통 | A는 B가 저술하였다 | A dcterms:creator B |
최한기 | 기측체의 | A는 B가 저술하였다 | A dcterms:creator B |
최한기 | 감평 | A는 B가 저술하였다 | A dcterms:creator B |
최한기 | 의상이수 | A는 B가 저술하였다 | A dcterms:creator B |
최한기 | 심기도설 | A는 B가 저술하였다 | A dcterms:creator B |
최한기 | 소차유찬 | A는 B가 저술하였다 | A dcterms:creator B |
최한기 | 습산진벌 | A는 B가 저술하였다 | A dcterms:creator B |
최한기 | 우주책 | A는 B가 저술하였다 | A dcterms:creator B |
최한기 | 지구전요 | A는 B가 저술하였다 | A dcterms:creator B |
최한기 | 기학 | A는 B가 저술하였다 | A dcterms:creator B |
최한기 | 운화측험 | A는 B가 저술하였다 | A dcterms:creator B |
최한기 | 인정 | A는 B가 저술하였다 | A dcterms:creator B |
최한기 | 신기천험 | A는 B가 저술하였다 | A dcterms:creator B |
최한기 | 성기운화 | A는 B가 저술하였다 | A dcterms:creator B |
최한기 | 명남루수록 | A는 B가 저술하였다 | A dcterms:creator B |
최한기 | 신헌 | A는 B와 교유하였다 | A foaf:knows B |
청구도 | 청구도제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청구도 | 김정호 | A는 B가 저술하였다 | A dcterms:creator B |
주석
- ↑ 박성래, "최한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정성희, "최한기", 인물한국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정성희, "최한기", 인물한국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정성희, "최한기", 인물한국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박성래, "최한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박성래, "최한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박성래, "최한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박성래, "최한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박성래, "최한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