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무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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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무주청사(辨誣奏請使)’라고도 하는 변무사(辨誣使)는 왕실이나 국가의 중요사실이 중국조정에 잘못 전해졌거나 오해의 소지가 있어 문제가 야기되었을 때 이를 해명하고 그 정정을 요구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왕실의 종계(宗系)나 누명은 특히 국가의 체면에 관계된 일이어서 변무사가 파견되는 일이 많았다. 그 중에서 특히 유명했던 것은 태조의 종계변무(宗系辨誣)였는데 이는 『명태조실록(明太祖實錄)』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조선 태조|이성계(李成桂)]]가 [[이인임|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잘못 기록된 것을 시정하기 위한 일이었다.<ref>이영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2913 변무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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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무주청사(辨誣奏請使)’라고도 한다. 왕실이나 국가의 중요한 사실이 중국조정에 잘못 전해졌거나 오해의 소지가 있어 문제가 야기되었을 때 이를 해명하고 그 정정을 요구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왕실의 종계(宗系)나 누명은 특히 국가의 체면에 관계된 일이어서 변무사가 파견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중에서 특히 유명했던 것은 태조의 종계변무(宗系辨誣)였는데 이는 『명태조실록(明太祖實錄)』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조선 태조|이성계(李成桂)]]가 [[이인임|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잘못 기록된 것을 시정하기 위한 일이었다.<ref>이영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2913 변무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조선 초기부터 여러 차례 변무사가 파견되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1584년([[조선 선조|선조]] 17) [[황정욱|황정욱(黃廷彧)]] 일행에 의하여 마침내 시정되었다.<ref>이영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2913 변무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이후 1598년 9월 명나라 조사관 [[정응태|정응태(丁應泰)와]] 지휘관 [[양호|양호(楊鎬)]] 사이에 내분으로 소위 ‘[[정응태 무고사건]]’이 일어나서 명나라에 변무사를 파견하기도 하였다.<ref>신병주, "[http://news.mk.co.kr/v2/economy/view.php?year=2017&no=624945 임진왜란 기록물 ‘징비록’ 남긴 류성룡 이순신·권율 천거한 왜란극복 최고 공신]", <html><online style="color:purple">『매경이코노미』<sup>online</sup></online></html>, 작성일: 2017년 09월 18일.</ref> 1676년([[조선 숙종|숙종]] 2)에는 [[인조반정|인조반정(仁祖反正)]]에 관한 모욕적인 기록이 『명십육조기(明十六朝紀)』에 기록되어 있었으므로 이를 해명하기 위한 변무사가 파견되기도 하였다.<ref>이영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2913 변무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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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부터 여러 차례 변무사가 파견되었으나 진전이 없다가 1584년([[조선 선조|선조]] 17) [[황정욱|황정욱(黃廷彧)]] 일행에 의하여 마침내 시정되었다.<ref>이영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2913 변무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이후 1598년 9월 명나라 조사관 [[정응태|정응태(丁應泰)와]] 지휘관 [[양호|양호(楊鎬)]] 사이에 소위 ‘[[정응태 무고사건]]’이 일어나서 명나라에 변무사를 파견하기도 하였다.<ref>신병주, "[http://news.mk.co.kr/v2/economy/view.php?year=2017&no=624945 임진왜란 기록물 ‘징비록’ 남긴 류성룡 이순신·권율 천거한 왜란극복 최고 공신]", <html><online style="color:purple">『매경이코노미』<sup>online</sup></online></html>, 작성일: 2017년 09월 18일.</ref> 1676년([[조선 숙종|숙종]] 2)에는 [[인조반정|인조반정(仁祖反正)]]에 관한 모욕적인 기록이 『명십육조기(明十六朝紀)』에 모욕적으로 기록되어 있던 인조반정(仁祖反正) 기록을 해명하기 위하여 변무사가 파견되기도 하였다.<ref>이영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2913 변무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지식관계망'''==
 
=='''지식관계망'''==

2018년 1월 2일 (화) 20:09 판

번무사
(辨誣使)
대표명칭 번무사
한자표기 辨誣使
유형 사신(使臣)



정의

조선시대 명·청나라에서 조선을 곡해(曲解)한 일이 생겼을 때 그 사실을 밝히기 위해 파견한 사신이다.[1]

내용

‘변무주청사(辨誣奏請使)’라고도 한다. 왕실이나 국가의 중요한 사실이 중국조정에 잘못 전해졌거나 오해의 소지가 있어 문제가 야기되었을 때 이를 해명하고 그 정정을 요구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왕실의 종계(宗系)나 누명은 특히 국가의 체면에 관계된 일이어서 변무사가 파견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중에서 특히 유명했던 것은 태조의 종계변무(宗系辨誣)였는데 이는 『명태조실록(明太祖實錄)』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이성계(李成桂)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잘못 기록된 것을 시정하기 위한 일이었다.[2]

조선 초기부터 여러 차례 변무사가 파견되었으나 진전이 없다가 1584년(선조 17) 황정욱(黃廷彧) 일행에 의하여 마침내 시정되었다.[3] 이후 1598년 9월 명나라 조사관 정응태(丁應泰)와 지휘관 양호(楊鎬) 사이에 소위 ‘정응태 무고사건’이 일어나서 명나라에 변무사를 파견하기도 하였다.[4] 1676년(숙종 2)에는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관한 모욕적인 기록이 『명십육조기(明十六朝紀)』에 모욕적으로 기록되어 있던 인조반정(仁祖反正) 기록을 해명하기 위하여 변무사가 파견되기도 하였다.[5]

지식관계망

  • 이항복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황정욱 변무사 A는 B에 의해 설립되었다 A ekc:founder B
변무사 인조반정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변무사 정응태 무고사건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각자료

주석

  1. "변무사", 『두산백과』online.
  2. 이영춘, "변무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이영춘, "변무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신병주, "임진왜란 기록물 ‘징비록’ 남긴 류성룡 이순신·권율 천거한 왜란극복 최고 공신", 『매경이코노미』online, 작성일: 2017년 09월 18일.
  5. 이영춘, "변무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