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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위의 구성은 훗날 [[임진왜란]]을 맞이하면서, 큰 문제점을 야기하게 된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조정]]은 활과 화기 계열인 포(砲)와 화차(火車) 그리고 주력인 기병이 있어 왜군을 물리칠 수 있다고 자신하였지만, 결과는 완전한 패배였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근접전 전투에서 단병기(短兵器) 계열, 이른바 창과 검으로 싸우는 훈련이 일본에 비해서 부족했던 것이다. 즉 조선 전기에 기병위주로 훈련을 실시하고 보병의 원거리 사격 및 기병 보조 중심으로 육성하면서 창이나 검 같은 근거리 무기에 대한 훈련부족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이전(1550~1590년 시기) 조선군은 여러 차례 왜군과 싸워본 경험이 있었는데 대부분 승리를 거두었다. 그 이유는 당시 침략한 왜군이 정규군으로는 볼 수 없는 해적 수준인 데다 그 규모가 소수였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조선은 기존의 전략 방침대로 진행해도 [[임진왜란]] 시기 왜군을 물리 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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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위의 구성은 훗날 [[임진왜란]]을 맞이하면서, 큰 문제점을 야기하게 된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조정]]은 활과 화기 계열인 포(砲)와 화차(火車) 그리고 주력인 기병이 있어 왜군을 물리칠 수 있다고 자신하였지만, 결과는 완전한 패배였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근접전 전투에서 단병기(短兵器) 계열, 이른바 창과 검으로 싸우는 훈련이 일본에 비해서 부족했던 것이다. 즉 조선 전기에 기병위주로 훈련을 실시하고 보병을 원거리 사격 및 기병 보조 중심으로 육성하면서 창이나 검 같은 근거리 무기에 대한 훈련부족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이전(1550~1590년 시기) 조선군은 여러 차례 왜군과 싸워본 경험이 있었는데 대부분 승리를 거두었다. 그 이유는 당시 침략한 왜군이 정규군으로는 볼 수 없는 해적 수준인 데다 그 규모가 소수였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조선은 기존의 전략 방침대로 진행해도 [[임진왜란]] 시기 왜군을 물리 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ref>盧永九, 「조선후기 短兵 戰術의 추이와 『武藝圖譜通志』의 성격」, 『진단학보』, Vol-9, 진단학회, 2001, 357~361쪽.</ref>
 
<ref>盧永九, 「조선후기 短兵 戰術의 추이와 『武藝圖譜通志』의 성격」, 『진단학보』, Vol-9, 진단학회, 2001, 357~361쪽.</ref>
  

2017년 12월 9일 (토) 00:43 판

병학지남
한글팀 병학지남 01 표지.jpg
한자명칭 兵學指南
영문명칭 A military strategy book. A part on military training was extracted.
작자 척계광
작성시기 1787년
간행시기 조선후기
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청구기호 3-283
유형 고서
크기(세로×가로) 34 ×23.2㎝
판본 목판본
수량 1冊
표기문자 한글, 한자


정의

16세기 중기의 명나라 장수 척계광이 지은 『기효신서』 중 군대의 조련방법에 관한 부분을 요약하여 만든 우리나라의 병법서이다.

내용

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권1에 기고정법(旗鼓定法), 기고총결(旗鼓總訣), 권2에 영진정구(營陣正彀), 권3에 영진총도(營陣總圖) 상편, 권4에 영진총도 하편, 권5에 장조정식(場操程式), 성조정식(城操程式), 수조정식(水操程式)이 실려 있다. 이 책은 군대의 조련, 진을 치는 법, 행군, 호령 등에 대한 규정과 설명이 그림과 함께 수록되어 있어서 17세기 이후로 군사 훈련의 기본지침서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각 병영에서 간행된 많은 이본이 전한다. 현존하는 이본은 1787년의 장용영판과 그 복각본이 주류를 이루고, 그밖에 이보다 앞선 판본으로서 최숙(崔橚)의 수정본과 수정 이전의 판본으로 나누어진다. 최숙의 수정본보다 빠른 판본에는 구개음화가 나타나지 않는 등 17세기 국어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므로 이 책은 여러 이본을 통해 국어의 통시적 변화를 보여주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1]

기병 중심이었던 조선 초기 병법

병학지남』이 나온 배경에는 조선 초기부터 이어져온 군사전략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조선이 건국하기 이전 고려시기부터 한반도는 요나라 거란, 금나라 여진, 그리고 원나라 몽고족에 이르는 다양한 북방민족과 지속적인 전투를 하였다. 그 결과 당시 병서의 주 내용은 대부분이 기병을 이용한 회전(會戰) 방식을 선호했다. 대표적인 병서로는 『진도지법(陣圖之法)』과 『계축진설(癸丑陣說)』두가지가 있다. 자세히 설명하면, 기병의 병종을 창기병과 활기병으로 나누고 보병을 창병과 화기병 궁병으로 하여, 전체 5종 병종이 서로 조합을 짜서 전투하는 방식이다. 전투가 벌어지면 창기병이 적진으로 돌격하여 진을 흐트러뜨리고 진이 무너지는 것을 확인하면 활기병이 나아가 좌우에서 연사를 한다. 후미는 창병과 화기병 그리고 궁병이 보호하면서 전진한다. 본래 이 전법은 대부분이 북방의 여진족인 중갑기병과 활기병 2종으로 구성된 기마병 군단을 막기 위해서 고안해낸 진법이다. 그런 까닭에 당시 보병과 기병의 비율에서 보면 거의 4~50% 정도가 기병일 정도로 당시 조선은 기병을 중요시 하였다. 예를 들면 1433년 조선이 야인 토벌 작전을 수행할 때 동원된 병력 1만 5천 가운데 기병이 1만명 이었고, 보병은 5천 명이었다. [2]

임진왜란에서 드러난 기존 전법의 한계점

하지만 위의 구성은 훗날 임진왜란을 맞이하면서, 큰 문제점을 야기하게 된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조정은 활과 화기 계열인 포(砲)와 화차(火車) 그리고 주력인 기병이 있어 왜군을 물리칠 수 있다고 자신하였지만, 결과는 완전한 패배였다. 그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근접전 전투에서 단병기(短兵器) 계열, 이른바 창과 검으로 싸우는 훈련이 일본에 비해서 부족했던 것이다. 즉 조선 전기에 기병위주로 훈련을 실시하고 보병을 원거리 사격 및 기병 보조 중심으로 육성하면서 창이나 검 같은 근거리 무기에 대한 훈련부족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이전(1550~1590년 시기) 조선군은 여러 차례 왜군과 싸워본 경험이 있었는데 대부분 승리를 거두었다. 그 이유는 당시 침략한 왜군이 정규군으로는 볼 수 없는 해적 수준인 데다 그 규모가 소수였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조선은 기존의 전략 방침대로 진행해도 임진왜란 시기 왜군을 물리 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3]

가정왜구(嘉靖倭寇)에 시달린 명나라

조선 조정임진왜란을 직접 격고 난 후 기존 전략을 대폭 수정해야 할 필요를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명나라 지원병의 전투 방식을 보면서 명나라남방 절강병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다. 명나라는 이미 임진왜란 이전에 중국 해안으로 침입하던 가정왜구 때문에 심각한 상황에 처해진 시기가 있었다. 1550년 부터 1560년까지 약 10년간 왜구들이 중국의 복건성, 절강성은 물론 깊숙한 내륙의 호남성에까지 침략하여 노략하고 사람들을 학살한 사건이었다. 이전과 같은 왜구이기는 하나 15세기 초반의 왜구와는 완전히 성격이 다르고 규모도 엄청났다. 이들 대부분이 일본 전국시대 시기 지방막부들의 싸움에서 밀려난 병사들과 장교들로, 거의 정규군 수준의 훈련을 갖추고 있었다. 거기다 이들은 창과 검 그리고 조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가정왜구가 일어나자 당연히 이전의 왜적 수준으로 생각했던 명나라 관군은 안일하게 대처하다가 여기저기서 패배하기 시작했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북방 정예병을 투입할까를 고민하였지만, 당시 북방에서는 울량합(오이라트)의 움직임 때문에 북방군을 남방으로 보내기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척계광을 남방으로 보내게 된 것인데, 그는 남방에서 기존의 훈련과 다르게 원앙진을 고안하여 당시 침입한 왜구를 무찔렀다.[4]

원앙진의 구성과 전투방법

원앙진을 자세히 살펴보면 앞에 2명의 등패수(방패와 검으로 무장한 병사)가 있으며, 앞열 좌우 양옆 끝에는 낭선(긴 창에 가시넝쿨 같은 철사를 박아놓은 무기)병졸이 있었다. 그 앞 열 중앙에는 부단장 급인 병사가 깃발을 들고 있으며, 깃발 뒤 중앙에는 4명의 창병이 무장하고 있고 그 뒤에는 당파(삼지창 모양의 창병) 병사 2명이 있다. 맨 뒤에는 비 전투명인 화병(취사병)이 있다. 낭선 2명 창병 4명 부단장 1명 화평 1명 당파병 2명 조를 짜 약 10명이 한 부대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특히 왜구 병력들과 근접전이 벌어질때 등패수가 적의 창과 검을 막고, 낭선으로 견제하며 창병이 뒤에서 찔러댄다. 견디지 못한 왜구가 물러날 때 이 부대는 진형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다이아몬드 형태를 유지한 채 앞으로 이동하면서 적을 압박한다. 척계광의 이 전법은 매우 효과적이어서 가정왜구를 종식 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이 경험을 토대로 기효신서(紀效新書)란 책을 썼다.[5]

병법 개혁과 병학지남

원앙진 전법은 임진왜란 때도 활용되어 왜구를 격퇴하는 데 뛰어난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조선 조정임진왜란 때부터 기효신서를 정식 교본으로 사용하여 훈련하기 시작했고, 병학지남이란 책으로 만들었다. 정확한 편찬자와 편찬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조선 후기에 각 군영에서 지속적으로 출판되고 있었고 1787년에 선전관 이유경이 교정하고 장용영에서 편찬되었다. 장용영본은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6]

지식 관계망

  • 병학지남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기효신서 병학지남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기효신서 척계광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병학지남 이유경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병학지남 장용영 A는 B에에서 간행되었다 A dcterms:publisher B
병학지남 조선 조정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병학지남 임진왜란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임진왜란 왜군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임진왜란 원앙진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기효신서 원앙진 A는 B를 언급하였다 A ekc:mentions B
기효신서 가정왜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가정왜구 왜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오이라트 가정왜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오이라트 명나라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일본 전국시대 가정왜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척계광 가정왜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척계광 남방 절강병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명나라 척계광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병학지남 A는 B에 소장되었다 A edm:currentLocation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560년 척계광기효신서를 저술했다
1550년-1560년 명나라에서 가정왜구가 일어났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1787년 병학지남장용영에서 간행되었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39197 127.054387 병학지남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100쪽.
  2. 최형국, 「朝鮮時代騎兵의 戰術的운용과 馬上武藝의 변화」, 『역사와실학』, Vol-38, 역사실학회, 2009,11~19쪽.
  3. 盧永九, 「조선후기 短兵 戰術의 추이와 『武藝圖譜通志』의 성격」, 『진단학보』, Vol-9, 진단학회, 2001, 357~361쪽.
  4. 盧永九, 「조선후기 短兵 戰術의 추이와 『武藝圖譜通志』의 성격」, 『진단학보』, Vol-9, 진단학회, 2001, 357~361쪽.
  5. 盧永九, 「조선후기 短兵 戰術의 추이와 『武藝圖譜通志』의 성격」, 『진단학보』, Vol-9, 진단학회, 2001, 357~361쪽.
  6. 盧永九, 「조선후기 短兵 戰術의 추이와 『武藝圖譜通志』의 성격」, 『진단학보』, Vol-9, 진단학회, 2001, 357~361쪽.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김진수, 「조선후기 鳥銃 연구의 현황과 과제」, 『군사연구』, Vol.139, 육군군사연구소, 2015, 453-472쪽.
    • 윤무학, 「조선(朝鮮) 후기(後期)의 병서(兵書) 편찬(編纂)과 병학(兵學) 사상(思想)」, 『한국 철학논집』, Vol.36, 한국철학사연구회, 2013, 101-133쪽.
    • 최형국, 「朝鮮時代騎兵의 戰術的운용과 馬上武藝의 변화」, 『역사와실학』, Vol.38, 역사실학회, 2009, 5-53쪽.
    • 盧永九, 「조선후기 短兵 戰術의 추이와 『武藝圖譜通志』의 성격」, 『진단학보』, Vol.9, 진단학회, 2001, 355-38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