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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7일 (월) 03:59 기준 최신판

나세(羅世)
민족 일러 원무신.png
대표명칭 나세
한자표기 羅世
생몰년 1320년-1397년
이칭 연안군
시대 고려
국적 원나라~고려
대표직함 참찬문하, 연해등처병선조전절제사, 경기풍해도서북면등처도추포사
성격 무신
유형 장군


정의

고려 말 조선 초의 장군으로 원나라의 귀화인이다.

내용

활동과 업적

원나라의 귀화인으로, 1363년(고려 공민왕 12)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 홍건적을 격퇴하여 이등공신이 되었다. 1374년 동지밀직사사인 나세는 부원수에 임명되어, 말의 공출을 거부하고, 난을 일으킨 제주도 목호들을 토벌하였다.
그 뒤 강화 등지에서 왜구 격퇴에 공을 세워 연안군(延安君)에 봉해졌다.[1]

진포대첩

1380년 해도원수(海道元帥)가 되어 심덕부·최무선 등과 함께 전함 100척을 이끌고 진포에서 최무선이 만든 화약과 화포를 실전에 처음으로 사용하여 왜선 500척을 쳐부수는 전과를 거두었다.[2]

Quote-left.png 왜적의 배 5백척이 진포(鎭浦) 어귀에 들어와 큰 밧줄로 서로 잡아매고 군사를 나누어 지키다가, 드디어 해안으로 올라 각 주(州)ㆍ군(郡)으로 흩어져 들어가서 마음대로 불사르고 노략질하니, 시체가 산과 들에 덮이고, 곡식을 그 배에 운반하느라고 땅에 쏟아진 쌀이 한 자 부피나 되었다.

나세심덕부최무선 등이 진포에 이르러, 무선이 처음으로 만든 화포(火砲)를 써서 그 배를 불태우니, 연기와 화염이 하늘에 넘쳤다. 왜적이 거의 다 타죽었고, 바다에 빠져 죽은 자도 또한 많았다. 왜적이 포로로 잡은 자녀를 모조리 죽여 시체가 산같이 쌓여서, 지나는 곳마다 피의 물결이었으며, 3백 30여 명만이 탈출하여 왔다. 죽음을 벗어난 적은 옥주(沃州)로 달아나서, 육지에 있던 적과 합세하여 이산(利山)ㆍ영동(永同)현을 불태웠다.

Quote-right.png
출처: 『고려사절요』 31권, 경신신우 6년(1380), 대명 홍무 13년. 온라인 참조: '고려사절요 제31권 / 신우 2(辛禑二)', 『한국고전종합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3]


그는 이 공으로 문하평리에 올랐으며, 조선 개국 후 문하참찬(門下參贊)으로 물러난 뒤 1397년(조선 태조 6) 경기풍해도서북면등처도추포사(京畿豊海道西北面等處都追捕使)가 되어 왜구를 방어하다가 그 해 9월 병사하였다.[4]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나세 홍건적의 난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조선 태조 홍건적의 난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나세 진포대첩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1. 민병하, "나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민병하, "나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고려사절요』 31권, 경신신우 6년(1380), 대명 홍무 13년. 온라인 참조: '고려사절요 제31권 / 신우 2(辛禑二)', 『한국고전종합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4. 민병하, "나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사료
  2. 웹 자원
    • 민병하, "나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