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수"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34번째 줄: | 34번째 줄: | ||
=='''내용'''== | =='''내용'''== | ||
− | [[성충]]과 함께 사치와 유흥에 빠져가는 [[백제 의자왕|의자왕]]을 간하다가 유배되었다.<ref>"[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64138 흥수]",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삼국유사]]』 권1 기이1 | + | [[성충]]과 함께 사치와 유흥에 빠져가는 [[백제 의자왕|의자왕]]을 간하다가 유배되었다.<ref>"[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64138 흥수]",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삼국유사]]』 권1 기이1 태종춘추공 조와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6 의자왕 20년 조(660)의 기록을 살피면 그에 관한 대목이 나온다.<br/>660년(백제 의자왕 20) [[나당연합군]]의 침입을 받고 [[백제 의자왕|왕]]이 유배지에 있는 그에게 사자를 보내어 그 방어책을 문의하자, 흥수는 "대체로 좌평 [[성충]]의 말과 같사옵니다."라고 답하였다.<ref>일연,신태영,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한국인문고전연구소, 2012.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33585&categoryId=49616&cid=49616 태종 춘추공]",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또한 당나라 군사는 [[백강]](白江)을 건너지 못하게 하고, 신라군은 [[탄현]](炭峴)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라고 충언했으나, 대신들은 그 말을 믿지 않고 "흥수가 옥중에 있으므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위하지 않을 것이니 그 말을 채용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ref> "흥수", 『삼국유사 사전/박물지 시범개발』, 한국콘텐츠진흥원.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808215&cid=49243&categoryId=49243 흥수]", 문화원형백과-삼국유사 사전/박물지 시범개발,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결국 [[백제 의자왕|의자왕]]은 흥수의 말을 듣지 않았다.<br/>이 때 당군이 이미 [[백강]]을 지나서 진격해오고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공격해온다는 말을 듣자, [[백제 의자왕|왕]]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리하여 [[계백]](階伯)이 거느린 5,000명의 결사대는 [[황산벌싸움]]에서 패하고 [[백강]]에서는 수군이 패하여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다.<ref>성주탁,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6022 흥수]",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부여 삼충사=== | ===부여 삼충사=== | ||
− | 지금도 충청남도 부여군에서는 백제 말의 충신인 성충(成忠), [[계백]](階伯), [[흥수]](興首)의 위국충절을 | + | 지금도 충청남도 부여군에서는 백제 말의 충신인 성충(成忠), [[계백]](階伯), [[흥수]](興首)의 위국충절을 추모하여 [[부여 부소산성|부소산성]] 내의 [[부여 삼충사|삼충사]](三忠祠)에서 매년 10월 [[삼충제]]를 지내고 있다.<ref>"흥수", 『삼국유사 사전/박물지 시범개발』, 한국콘텐츠진흥원.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808215&cid=49243&categoryId=49243 흥수]", 문화원형백과-삼국유사 사전/박물지 시범개발,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지식 관계망'''== | =='''지식 관계망'''== |
2018년 1월 4일 (목) 19:08 판
흥수(興首) | |
대표명칭 | 흥수 |
---|---|
한자표기 | 興首 |
시대 | 삼국 |
국적 | 백제 |
대표직함 | 좌평(佐平) |
유형 | 충신 |
목차
정의
백제 의자왕 대의 충신이다.
내용
성충과 함께 사치와 유흥에 빠져가는 의자왕을 간하다가 유배되었다.[1] 『삼국유사』 권1 기이1 태종춘추공 조와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6 의자왕 20년 조(660)의 기록을 살피면 그에 관한 대목이 나온다.
660년(백제 의자왕 20) 나당연합군의 침입을 받고 왕이 유배지에 있는 그에게 사자를 보내어 그 방어책을 문의하자, 흥수는 "대체로 좌평 성충의 말과 같사옵니다."라고 답하였다.[2] 또한 당나라 군사는 백강(白江)을 건너지 못하게 하고, 신라군은 탄현(炭峴)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라고 충언했으나, 대신들은 그 말을 믿지 않고 "흥수가 옥중에 있으므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위하지 않을 것이니 그 말을 채용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3]결국 의자왕은 흥수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 때 당군이 이미 백강을 지나서 진격해오고 신라군은 탄현을 넘어 공격해온다는 말을 듣자, 왕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리하여 계백(階伯)이 거느린 5,000명의 결사대는 황산벌싸움에서 패하고 백강에서는 수군이 패하여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다.[4]
부여 삼충사
지금도 충청남도 부여군에서는 백제 말의 충신인 성충(成忠), 계백(階伯), 흥수(興首)의 위국충절을 추모하여 부소산성 내의 삼충사(三忠祠)에서 매년 10월 삼충제를 지내고 있다.[5]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흥수 | 부여 삼충사 | A는 B에 제향되었다 | A ekc:isEnshrinedIn B |
흥수공상 | 부여 삼충사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흥수공상 | 흥수 | A는 B를 소재로 삼았다 | A ekc:depicts B |
흥수 | 백제 의자왕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성충 | 흥수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흥수 | 삼국유사 | A는 B에 언급되었다 | A ekc:isMentionedIn B |
흥수 | 삼국사기 | A는 B에 언급되었다 | A ekc:isMentionedIn B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 ↑ "흥수",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 ↑ 일연,신태영,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한국인문고전연구소, 2012. 온라인 참조: "태종 춘추공",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흥수", 『삼국유사 사전/박물지 시범개발』, 한국콘텐츠진흥원. 온라인 참조: "흥수", 문화원형백과-삼국유사 사전/박물지 시범개발,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성주탁, "흥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흥수", 『삼국유사 사전/박물지 시범개발』, 한국콘텐츠진흥원. 온라인 참조: "흥수", 문화원형백과-삼국유사 사전/박물지 시범개발,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웹 자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