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소(조선)"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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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9일 (일) 17:0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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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소(孫昭)
대표명칭 손소
한자표기 孫昭
생몰년 1433년-1484년
본관 경주
이칭 양민공(襄敏公)
시호 양민(襄敏)
송재(松齋)
일장(日章)
시대 조선
국적 조선
대표직함 계림군(雞林君)
손사성(孫士晟)
권명리(權明理)의 딸
상훈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
성격 문신


정의

손소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내용

생애

손소(1433(세종 15)∼1484(성종 15))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일장(日章), 호는 송재(松齋). 손현검(孫玄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손등(孫登)이고, 아버지는 증 병조참판 손사성(孫士晟)이다. 어머니는 권명리(權明理)의 딸이다.[1]

활동사항

1459년(세조 5)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 보직되었다.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로 있을 때, 문예시(文藝試)에 장원하여 한 자급(資級) 특진되었다. 1464년 정월 『의방유취(醫方類聚)』의 교정을 잘못 보아 파직되었다. 그러나 그 해 7월 집현전을 폐지하고 예문관이 대신하도록 했을 때, 겸예문관이 되었다가 11월에 병조좌랑을 거쳐 종묘서령(宗廟署令)이 되었다.1467년 5월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평노장군(平虜將軍) 박중손(朴仲孫)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군무(軍務)를 관장, 평정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책훈되고 내섬시정(內贍寺正)으로 특진되었다. 1469년(예종 1) 성주목사를 거쳐 공조참의와 안동부사를 역임하고 계림군(雞林君)에 봉해졌다. 1476년 11월 진주목사로 나갔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전리(田里)로 돌아갔으나, 왕이 특명으로 녹봉(祿俸)을 지급하도록 하였다.[2]

평가

청렴결백하고 백성을 다스리되 친자식같이 하였다. 일찍이 성주목사로 있을 때 기근이 극심하게 들었으나 극진한 마음으로 구휼하여 희생자가 없었다고 한다. 때문에 그 곳 이민(里民)의 호소로 임기가 연장되기도 하는 등 목민관의 모범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부모에 대한 효성도 지극하여 성주·진주·안동 등의 외관직은 경주에 있는 노부를 봉양하기 위해 자원하여 왕의 특지(特旨)로 임명된 벼슬이었다. 글씨를 잘 썼으며, 시호는 양민(襄敏)이다.[3]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손소(조선) 이시애의 난 A는 B에 참여하였다
손소(조선) 박중손 A는 B와 관련이 있다
손소(조선) 이언적 A는 B와 인척 관계이다
손소(조선) 경주손씨 송첨종택 A는 B와 관련이 있다
박중손 이시애의 난 A는 B와 관련이 있다
손사성 손소(조선) A는 B의 어버이이다
손등 손사성 A는 B의 어버이이다

시간정보

시간 내용
1459년 손소가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언정자에 보직되었다
1464년 손소 『의방유취(醫方類聚)』의 교정을 잘못 보아 파직되었다
1464년 7월 손소가 예문관의 겸예문관이 되었다
1467년 손소이시애의 난을 토벌하여 적개공신이 되었다
1469년 손소가 계림군에 봉해졌다
1471년 손소가 진주목사로 있다가 사직하였다

주석

  1. "손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손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손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사료
    • 『세조실록(世祖實錄)』
    • 『예종실록(睿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해동잡록(海東雜錄)』
    •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 『점필재집(佔畢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