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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0년(성종 11) 생원시에 합격한 후 장문의 상소를 올려 [[원각사 | 원각사(圓覺寺)]] 승려의 불법을 다스릴 것을 포함한 척불과 유학의 진흥에 관한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였다. 1494년 이극균(李克均)에 의해 유일지사(遺逸之士)로 천거되어 남부참봉에 제수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496년 군자감주부에 제수되었으며, 곧 사헌부감찰을 거쳐 이듬해에는 형조좌랑이 되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가 2년 뒤 순천에 이배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 당인이라는 죄목으로 극형에 처해졌다.<ref>이병휴,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8739 김굉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1480년(성종 11) 생원시에 합격한 후 장문의 상소를 올려 [[원각사 | 원각사(圓覺寺)]] 승려의 불법을 다스릴 것을 포함한 척불과 유학의 진흥에 관한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였다. 1494년 이극균(李克均)에 의해 유일지사(遺逸之士)로 천거되어 남부참봉에 제수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496년 군자감주부에 제수되었으며, 곧 사헌부감찰을 거쳐 이듬해에는 형조좌랑이 되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가 2년 뒤 순천에 이배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 당인이라는 죄목으로 극형에 처해졌다.<ref>이병휴,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8739 김굉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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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굉필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정몽주]]-[[길재]]-[[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조선 성리학의 전달자이다. 그는 특히 ‘소학동자(小學童子)’로 자처할 정도로 [[소학 | 『소학』]]에 심취했었으며 이를 주축으로 하여 수기의 원리를 실천할 구체적 행동 방향을 제시하였으며, 『대학』을 비롯한 각종 성리학 서적을 탐구하여 절대적 선(善)인 리(理)의 보편성을 보장하는 독자적인 성리학적 세계관을 확립했다.<ref>이민아,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12 김굉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이러한 그의 학문은 문인인 [[조광조 | 조광조(趙光祖)]]에게로 이어저 우리 나라 유학사의 정맥을 잇는 계기를 마련하였다.<ref>이병휴,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8739 김굉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김굉필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정몽주]]-[[길재]]-[[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조선 성리학의 전달자이다. 그는 특히 ‘소학동자(小學童子)’로 자처할 정도로 [[소학 | 『소학』]]에 심취했었으며 이를 주축으로 하여 수기의 원리를 실천할 구체적 행동 방향을 제시하였으며, 『대학』을 비롯한 각종 성리학 서적을 탐구하여 절대적 선(善)인 리(理)의 보편성을 보장하는 독자적인 성리학적 세계관을 확립했다.<ref>이민아,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12 김굉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이러한 그의 학문은 문인인 [[조광조 | 조광조(趙光祖)]]에게로 이어저 우리 나라 유학사의 정맥을 잇는 계기를 마련하였다.<ref>이병휴,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8739 김굉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2017년 11월 16일 (목) 14:59 판
김굉필(金宏弼) | |
대표명칭 | 김굉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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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金宏弼 |
생몰년 | 1454-1504 |
본관 | 서흥(瑞興) |
호 | 사옹(簑翁), 한훤당(寒暄堂) |
자 | 대유(大猷) |
출생지 | 한성부 정릉동 |
시대 | 조선 |
국적 | 조선 |
부 | 김뉴(金紐) |
모 | 한승순(韓承舜)의 딸 청추 한씨 |
정의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은 조선 초기의 문인이다.
내용
생애
1480년(성종 11) 생원시에 합격한 후 장문의 상소를 올려 원각사(圓覺寺) 승려의 불법을 다스릴 것을 포함한 척불과 유학의 진흥에 관한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였다. 1494년 이극균(李克均)에 의해 유일지사(遺逸之士)로 천거되어 남부참봉에 제수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496년 군자감주부에 제수되었으며, 곧 사헌부감찰을 거쳐 이듬해에는 형조좌랑이 되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가 2년 뒤 순천에 이배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 당인이라는 죄목으로 극형에 처해졌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