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숭복사지 대숭복사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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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외동읍 말방리 숭복사지(崇福寺址)에서 15편의 비석 조각이 발견되었을 뿐 비의 전체적인 모습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신라시대 학자 최치원(崔致遠)의 문집에서 추려낸 4개의 비문, "사산비명(四山碑銘)" 중에 숭복사비가 포함되어 있어 비석의 조성 배경을 알 수 있게 되었다.<ref>"[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999836 숭복사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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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외동읍 말방리 [[경주 숭복사지|숭복사지(崇福寺址)]]에서 15편의 비석 조각이 발견되었을 뿐 비의 전체적인 모습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신라시대 학자 [[최치원|최치원(崔致遠)]]의 문집에서 추려낸 4개의 비문, "사산비명(四山碑銘)" 중에 숭복사비(崇福寺碑)가 포함되어 있어 비석의 조성 배경을 알 수 있게 되었다.<ref>"[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999836 숭복사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비문에 따르면 885년(신라 헌강왕 11) 왕이 현재의 숭복사지에 있던 곡사(鵠寺)라는 절을 크게 중창한 뒤 명칭을 숭복사로 개칭하고 최치원에게 비문을 짓도록 명령하였는데 이후 헌강왕과 그 뒤를 이은 정강왕이 연이어 승하하는 바람에 비문을 짓지 못하다가 896년(신라 진성여왕 10)에 이르러서야 비문을 완성하였다고 전한다.<ref>"[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999836 숭복사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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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에 따르면 885년([[신라 헌강왕|헌강왕]] 11) 왕이 현재의 [[경주 숭복사지|숭복사지]]에 있던 [[경주 숭복사지|곡사(鵠寺)]]라는 절을 크게 중창한 뒤 명칭을 [[경주 숭복사|숭복사(崇福寺)]]로 개칭하고 [[최치원]]에게 비문을 짓도록 명령하였는데, 이후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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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비석 조각은 국립경주박물관과 동국대학교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ref>"[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999836 숭복사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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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복사비는 신라 하대 왕실과 불교와의 관계, 귀족들의 불교신앙을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며, 풍수지리설에 입각하여 사원의 땅에 원성왕릉을 만든 관행을 알려주고 있어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게다가 비문에 왕릉 근처의 땅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토지가격을 지불하고 있는 모습, 왕토(王土)나 공전(公田)이란 표현이 보이고 있어 신라 토지제도 연구의 기초 사료로 활용되고 있기도 하다.<ref>"[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2825 숭복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sup>online</sup></online></html>, 국립문화재연구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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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비석 조각은 [[국립경주박물관]]과 [[동국대학교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ref>"[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999836 숭복사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숭복사비는 896년(진성여왕 10)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것이다. 비의 모습이나 탁본도 전혀 전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서산대사의 제자인 해안(海眼)이 최치원(崔致遠)의 문집에서 4개의 비문을 뽑아 사산비명(四山碑銘)이라고 불렀는데, 숭복사비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비문은 바로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필사본에 근거한 것이다.<ref>"[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2825 숭복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sup>online</sup></online></html>, 국립문화재연구소.</ref>
 
 
 
숭복사는 김원량(金元良)이 창건한 곡사(鵠寺)에서 기원하였다.
 
885년(헌강왕 11)에 명칭을 숭복사로 바꾸고, 그 다음해에 최치원(崔致遠)에게 비문을 짓도록 명령하였다. 최치원(崔致遠)은 헌강왕(憲康王)정강왕이 연이어 승하하는 바람에 한동안 비문을 짓지 못하다가 마침내 896년(진성여왕 10)에 완성하였다. 아마도 비는 대략 이 무렵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ref>"[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2825 숭복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sup>online</sup></online></html>, 국립문화재연구소.</ref>
 
 
 
숭복사비는 신라 하대 왕실과 불교와의 관계, 귀족들의 불교신앙을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며, 풍수지리설에 입각하여 사원의 땅에 원성왕릉을 만든 관행을 알려주고 있어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게다가 비문에 왕릉 근처의 땅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토지가격을 지불하고 있는 모습, 왕토(王土)나 공전(公田)이란 표현이 보이고 있어 신라 토지제도 연구의 기초 사료로 활용되고 있기도 하다.<ref>"[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2825 숭복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sup>online</sup></online></html>, 국립문화재연구소.</ref>
 
  
 
{{비문정보
 
{{비문정보

2017년 11월 11일 (토) 15:59 판

경주 숭복사지 대숭복사비
(慶州 崇福寺址 大崇福寺碑)
BHST Stele.png
대표명칭 경주 숭복사지 대숭복사비
한자 慶州 崇福寺址 大崇福寺碑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말방리 68-2
찬자 최치원(崔致遠)
각자 환견(桓蠲)
건립연대 896년



정의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숭복사지(崇福寺址)에 있었던 통일신라시대의 탑비.

내용

경주시 외동읍 말방리 숭복사지(崇福寺址)에서 15편의 비석 조각이 발견되었을 뿐 비의 전체적인 모습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신라시대 학자 최치원(崔致遠)의 문집에서 추려낸 4개의 비문, "사산비명(四山碑銘)" 중에 숭복사비(崇福寺碑)가 포함되어 있어 비석의 조성 배경을 알 수 있게 되었다.[1]

비문에 따르면 885년(헌강왕 11) 왕이 현재의 숭복사지에 있던 곡사(鵠寺)라는 절을 크게 중창한 뒤 명칭을 숭복사(崇福寺)로 개칭하고 최치원에게 비문을 짓도록 명령하였는데, 이후 [[신라

헌강왕|헌강왕]]과 그 뒤를 이은 정강왕이 연이어 승하하는 바람에 비문을 짓지 못하다가 896년(진성여왕 10)에 이르러서야 비문을 완성하였다고 전한다.[2]

숭복사비는 신라 하대 왕실과 불교와의 관계, 귀족들의 불교신앙을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며, 풍수지리설에 입각하여 사원의 땅에 원성왕릉을 만든 관행을 알려주고 있어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게다가 비문에 왕릉 근처의 땅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토지가격을 지불하고 있는 모습, 왕토(王土)나 공전(公田)이란 표현이 보이고 있어 신라 토지제도 연구의 기초 사료로 활용되고 있기도 하다.[3]\

현재 비석 조각은 국립경주박물관동국대학교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4]


비문 보러가기
"숭복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경주 숭복사지 대숭복사비 국립경주박물관 A는 B에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경주 숭복사지 대숭복사비 동국대학교박물관 A는 B에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경주 숭복사지 대숭복사비 경주 숭복사지 A는 B에 있었다 A edm:formerLocation B
경주 숭복사지 대숭복사비 최치원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A ekc:writer B
경주 숭복사지 대숭복사비 환견 A는 B가 비문을 새겼다 A ekc:inscriber B

주석

  1. "숭복사비", 『두산백과』online.
  2. "숭복사비", 『두산백과』online.
  3. "숭복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4. "숭복사비", 『두산백과』online.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웹자원
    • "숭복사비", 『두산백과』online.
    • "숭복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