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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0일 (월) 19:43 판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
대표명칭 | 연려실기술 |
---|---|
한자표기 | 燃藜室記述 |
유형 | 문헌 |
저자 | 이긍익(李肯翊) |
저술시기 | 1776년 |
간행시기 | 1776년 |
시대 | 조선 |
정의
조선 후기 실학자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이 지은 역사서.
내용
저술배경
‘연려실(燃藜室)’은 이긍익의 호이며, 『연려실기술』은 이긍익이 저술한 조선 시대 역사서이다. 이긍익의 아버지인 이광사(李匡師)는 1755년 나주 괘서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는데, 이긍익은 아버지의 유배지인 신지도(薪智島)에서 『연려실기술』을 저술하기 시작했다.[1]
구성
태조(太祖, 재위 1392~1398)에서 현종(顯宗, 재위 1659~1674)까지 각 왕대의 주요 사건을 담고 있는 ‘원집(原集)’, 저자 이긍익이 생존했던 숙종(肅宗, 재위 1674~1720) 당대의 사실을 기록한 ‘속집(續集)’, 전례⋅문예⋅천문⋅지리⋅대외 관계⋅고전 등을 편목별(篇目別)로 분류하여 연혁과 출처를 수록한 ‘별집(別集)’으로 구성되었다. 『연려실기술』의 주된 서술 방식은 기사본말체로서 원집, 속집에 적용되었다. 기사본말체는 시대 순으로 사건을 서술하되, 인과 관계의 흐름에 따라 사건의 전말을 파악할 수 있게 한 서술 방식이다.[2]
특징
『연려실기술』은 사건을 간략히 기재하고, 그 아래 여러 사서에서 발췌한 관련 자료를 열거한 후 끝에 출처를 밝힘으로써 독자의 이해를 도우면서도 저자의 견해는 밝히지 않았다. 이는 『연려실기술』이 실증적이고 객관적인 역사 서술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긍익은 국가 공식 기록보다 민간에서 정리된 야사⋅일기⋅문집 중 신뢰할 만한 기록을 중심으로 400여 종에 달하는 자료를 인용함으로써 객관성을 높이고 실증에 더욱 주력하였다.[3]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연려실기술 | 이금익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이광사 | 이금익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이광사 | 나주괘서사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주석
- ↑ "연려실기술",
『우리역사넷』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연려실기술",
『우리역사넷』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연려실기술",
『우리역사넷』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이존희, 「「燃藜室記述」의 分析的 考察 : 이긍익의 역사의식을 중심으로」, 『한국학보』 Vol.7, 일지사, 1981.
- 신병주,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술이부작``의 정신, 역사서의 모범-」, 『선비문화』 Vol.22, 남명학연구원, 2012.
- 웹자원
- "연려실기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연려실기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