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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8일 (수) 22:47 판
원효방 (元曉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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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원효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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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元曉房 |
정의
내용
원효방과 관련한 이야기
원효가 부안에 온 것은 삼국 통일 이후였다. 오랜 전쟁으로 민초들이 원한과 상처로 고통 받고 있었다. 백제 무왕의 왕사였던 묘련스님이 창건한 개암사 위에서 묘련의 제자인 복신이 숨어 백제부흥을 꾀했던 동굴에 원효가 왔다. 개암사 뒤 '울금바위'라 부르는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의 남쪽 면이 큰 입을 벌린 것처럼 패여 있어 수백 명의 사람이 그 안에 들어 앉을 수 있는 바위굴로 되어 있다. 이 굴 옆에는 수백명이 머물 수 있는 대규모 굴들이 있고, 울금바위 뒤쪽엔 백제부흥군들이 베를 짜 옷을 해 입었다는 베틀굴이 있다. 이 곳이 원효방(元曉房)이다. 옛날 원효가 이 곳에 암자를 짓고 여기에 머물면서 도를 닦고, 이따금 저 김제평야로 나아가서 불법을 강의(野壇法席) 하였는데, 그 때 수백 명의 군중이 이 곳에 모여들었다고 한다. 원효는 야단법석에서 민초들과 함께 춤추며 원한과 갈등의 가슴을 어루만지고 상생의 노래를 불렀다. 사복(蛇福)도 이 토굴에 같이 머물렀는데, 원효에게 차를 끓어주려고 해도 물이 없어 안타까와하니, 그 때부터 바위틈에서 물이 나오게 되었다. 그 물 맛이 매우 달아, 다천(茶泉)혹은 유천이라 부르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원효방의 샘물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원효대사 스토리뱅크), 2009., 한국콘텐츠진흥원)
다음날 부령현(扶寧縣) 현령(縣令) 이군(李君)과 다른 손[客] 6ㆍ7명과 더불어 원효방(元曉房)에 갔다. 나무 사다리가 있는데 높이가 수십 층이나 되어 발을 후들후들 떨면서 찬찬히 올라가니, 짚 앞의 계단과 창호(窓戶)가 수풀 끝에 솟아 있었다. 듣건대 종종 호랑이나 표범이 부여잡고 올라오려다가 올라오지 못한다 하였다. 곁에 한 암자(庵子)가 있는데 속전(俗傳)에 의하면 뱀포[蛇包] 성인(聖人)이 옛날에 머물던 곳인데, 원효(元曉)가 와서 살았으므로 뱀포도 또한 와서 모시고 있었는데, 차를 달여 효공(曉公)에게 드리려 하였으나 샘물이 없어 걱정을 하자 이 물이 바위 틈에서 문득 솟아났는데 물맛이 매우 달아 젖같아서 이로써 늘 차를 달였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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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동문선 제66권, 기(記), 『남행월 일기(南行月日記)』.[1] |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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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방 | 원효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주석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웹자원
- "남행월 일기",
『한국고전종합DB』online , 한국고전번역원.
- "남행월 일기",